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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건문제)

명나라 건문제(建文帝) 주윤문(朱允炆)의 행방에 얽힌 수수께끼

by 중은우시 2007. 3. 17.

명나라 건문 4년(1402년) 6월, 연왕의 군대가 남경성을 진입했다. 정난지역(靖難之役)은 연왕(燕王) 주체(朱)의 승리로 끝이 났다. 주체는 황제위에 올랐고, 바로 명성조 영락제가 그이다.

 

주체는 주원장의 넷째아들이며, 모략이 뛰어났고, 용감했으며 전쟁에 능했다. 원제국을 멸망시키는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고, 건국후에 연왕에 봉해졌고, 중병(重兵)을 이끌고 북경에 주둔했다. 주원장이 죽은 후, 장손인 주윤문이 즉위했고, 바로 건문제이다. 주윤문은 제도를 바꾸고 번왕을 폐지했는데, 그 뜻은 실력을 가졌던 번왕인 숙부들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주체는 이에 불복하여 병사를 이끌고 반항하였고, 4년간의 전쟁을 거쳐 주체가 결국 남경성을 점령하고 황제에 오르니, 역사는 이 사건을 "정난지역"이라고 부른다.

 

곡응태(谷應泰)의 <<명사기사본말>>의 기재에 따르면 : 연왕이 성을 부수고 들어오자, 주윤문은 칼을 뽑아 자진하려 하였다. 환관 왕월이 옆에서 말리면서 말하기를 "폐하 가볍게 목숨을 버리려하지 마십시오. 이전에 태조황제께서 승하하실때, 일찌기 상자를 하나 남겨놓으시고, 말씀하시기를 '자손이 위기에 처하면 상자를 열어봐라. 그러면 방법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주윤문은 즉시 왕월에게 상자를 가져오라고 하였고, 조금후 환관 4명이 상자를 들고 대전에 들어왔다. 상자의 사방은 쇠로 둘러쌓여 있었고, 열쇠구멍안에까지 철로 채워놓았다. 왕월은 철추를 가져와서 상자를 부수고 열었다. 안에는 도첩(度牒, 승려증명) 3장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가사, 승려모자, 승려신발등의 물건이 있었고, 머리깍는 칼이 하나와 은덩어리 10개가 있었다. 그리고 종이가 한 장 있었는데, 거기에는 "윤문은 귀문(鬼門)으로 나가고, 나머지 사람은 수관어구(水關御溝)로 나가며, 어둑해질 때 신락관의 서방에서 만나라"고 썼다.

 

주윤문은 탄식하며 말하기를 "천명이 이러하다면 또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환관은 즉시 칼을 들어 주윤문의 머리를 깎았다. 주윤문은 의관을 벗고 가사를 걸쳤다.  도첩을 잘 간수하면서, 한편으로는 궁중에 불을 지르라고 하였다. 금방 불꽃이 타올랐고, 금벽휘황한 황궁은 금방 잿더미로 화했다. 황후인 마씨는 불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고, 비빈들도 많이 불에 타 죽었다. 주윤문은 한 차례 통곡을 하고는 옷을 떨치고 나갔다. 귀문은 태평문 안에 있는 내성의 작은 문이었고, 겨우 한 사람이 출입할 수 있었으며, 바깥에는 수도와 통했다. 주운문은 몸을 숙여 먼저 빠져나가고, 나머지 사람들도 줄줄이 문을 빠져나갔다. 문밖에는 마침 작은 배가 한 척 있었는데, 배에는 도사가 한 사람 있었는데 주윤문에게 배를 타라고 하고, 머리를 숙이면서 "만세"라고 불렀다. 도사는 "어젯밤에 고황제(주원장)이 보였는데, 신에게 명하여 이곳에서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 빠져나온 사람들은 마침내 배를 타고 떠났다.

 

이것은 아주 기괴한 전설인데, 아주 널리 알려져 있다. 서남의 여러성에서는 적지 않은 주윤문의 유적과 전설이 전해진다. 전설에 의하면 주윤문은 귀주 금축(지금의 귀주 광순)에 피난해 있을 때, 시를 한 수 지은 적이 있다고 한다.

 

풍진일석홀남침(風塵一夕忽南侵)

천명잠이사해심(天命潛移四海心)

봉반단산홍일원(鳳返丹山紅日遠)

용귀창해벽운심(龍歸滄海碧雲深)

자미유상성환공(紫微有象星還拱)

옥루무성수자침(玉漏無聲水自)

요상금성금야월(遙想禁城今夜月)

육궁유망취화림(六宮猶望翠華臨)

 

이 시는 주윤문의 신분에 아주 부합한다.

 

비록 주윤문이 정말 서남일대에 유랑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행방은 하나의 수수께끼가 되었다. 누구도 그가 정말 불에 타서 죽었는지 아닌지를 확실히 말할 수 없었다. 주체는 큰 불가운데 두 구의 시신을 발견하고, 이를 주윤문과 황후 마씨라고 봐서 매장한다. 그러나, 사실 그의 내심 깊은 곳에는 주윤문의 죽음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주체는 여러번 호과급사중 호형을 파견해서, 주윤문의 면모를 잘 알고 있는 내시 주상과 함께 무당도사 장삼풍(張三豊)을 만나러간다는 이유로 육로로 각주, 군, 향, 읍을 다니면서 주윤문의 행방을 탐문했다. 영락2년(1404년)에는 주윤문이 이미 해외로 도망쳤다는 말이 돌았다. 주체는 다시 심복환관인 정화(鄭和, 세상에서는 三寶太監이라고 하였음)로 하여금 병사를 이끌고 바다로 나가서 서양(西洋, 당시 말라카해협서쪽을 서양이라고 불렀음. 즉 현재의 인도양)으로 가도록 하였다. 이것이 역사상 유명한 "정화하서양(鄭和下西洋)"이다. 그러나 역시 주윤문의 행방은 찾지 못한다.

 

영락21년(1423년) 바깥은 십여년동안 떠돌아다니던 호형이 돌연 북경으로 돌아왔다. 이 때 주체는 선부에서 주둔하고 있었는데, 호형이 도착한 때가 마침 깊은 밤이었고, 주체는 이미 잠들었었다. 그러나, 호형이 왔다는 말을 듣고 바로 옷을 입고는 만나보았다. 군신 두 사람은 사경까지 밀담을 나누었다. <<명사>>에는 이렇게 기재하고 있다: "건문제가 바다로 갔다는 말이 들렸고, 황제는 내신 정화를 여러차례 바다로 보내어 서양으로 가게 했다. 이때에 이르러 의심이 풀렸다" 이로써 보면, 호형이 이미 건문제 주윤문에 대한 확실한 소식을 가지고 왔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미 여러해가 지났기 때문에 주윤문은 기본적으로 황제위를 빼앗을 생각도 할 수 없고, 능력도 없었다. 이에 이르러 주체는 더 이상 주윤문의 종적을 찾으려고 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다른 기재에 의하면, 나중에 나이가 이미 64세가 된 주윤문이 다른 사람에게 발견되여 경성으로 데려져온다. 명영종은 진위를 가리기 위하여, 일찌기 주윤문을 모신 바 있는 늙은 태감 오량에게 알아보게 한다. 주윤문의 왼발목에는 검은 점이 있었는데, 오량이 살펴보고는 진짜라고 하게 된다. 그리고 주윤문의 발을 붙잡고 통곡한다. 주윤문은 궁내로 맞아들여져서 늙어죽을 때까지 거주하였다.

 

만력2년(1574년) 10월, 12세의 명신종(만력제) 주익균은 돌연 수보 장거정에게 주윤문의 행방에 관하여 질문한다. 장거정은 당시에 이렇게 답변한다: "국사에는 이 일을 기재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조의 옛 사람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건문황제(주윤문)은 정난의 군사가 성에 들어올 때 삭발하고 승복을 입은 채 사잇문으로 빠져나갔으며, 나중에 사방을 유랑하였는데, 사람들이 아무도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로써 볼 때, 장거정도 주윤문이 불에 타 죽은 것이라고 믿지는 않았고, 도망쳤다고 믿었던 것같다.

 

시간이 오래 흘렀고, 명성조 주체가 걱정하던 건문제의 복귀문제는 이미 더 이상 이슈가 아니게 되었다. 명신종이 공개적으로 물을 정도가 되었다는 것을 보면, 이제는 더 이상 이것은 무슨 금기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윤문의 진정한 행방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이것은 명나라역사의 영원한 수수께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