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당)

모용희(慕容熙): 공전절후의 치정천자(痴情天子)

중은우시 2013. 4. 13. 17:28

글: 진사황(秦四晃)

 

모용희는 후연(後燕) 열종(烈宗) 모용보(慕容寶)의 동생이며, 중종(中宗) 모용성(慕容盛)의 숙부이다. 모용보는 외삼촌 난한(蘭汗)에 유인되어 살해당한다. 난한은 스스로 창려왕(昌黎王)에 오른다. 모용성은 부친의 복수로 난한을 살해하고, 후연의 황권을 넘겨받는다. 이 때, 그의 모친인 황태후 정씨(丁氏)는 한창 나이로 젊고 아름다운 과부였다. 그녀는 뜨거운 눈길을 용모가 당당한 시동생 모용희에게 보낸다. 모용희도 이에 응하여 은근히 형수에 접근한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같이 자게 된다. 얼마후, 모용성은 반란을 평정하다가 칼에 상처를 입어 죽고 만다. 태후가 조정을 주재할 수 있게 되자, 시동생 모용희를 용상에 끌어올린다. 그가 바로 후연 소문황제(昭文皇帝)이다. 이들 밀회를 즐긴 원앙은 이때부터 후연의 조정을 좌지우지하며 마음대로 향락을 즐긴다.

 

정씨는 어쨌든 선제의 황후이고, 전조의 태후마마이다. 다시 한번 재혼하여 시동생의 황후가 될 수는 없다. 402년, 모용희의 후궁에 꽃처럼 아름다운 친자매가 들어온다. 황수(皇嫂) 정씨는 졸지에 작일황화(昨日黃花)가 된다. 미색이 사라지니 사랑도 잃게 된다. 모용희는 사랑을 모조리 이 자매에 쏟는다.

 

이 자매는 중산윤(中山尹) 부모(謨)의 두 딸이다. "이부병미이염(二幷美而艶)". 언니는 부융아(苻娀娥)인데, 귀인(貴人)에 봉한다. 동생은 부훈영(訓英)으로, 언니보다 더 요염했고, 귀빈(貴嬪)에 봉해진다. 항간에 "애강산갱애미인(愛江山更愛美人)"이라는 말이 있다. 모용희는 이 말의 살아있는 사레이다. 요염하고 경국경성의 부씨자매는 후연황제의 사랑을 받는다. 그녀들은 후연황제를 여취여치(如醉如痴), 사거활래(死去活來)하게 만든다.

 

두 미인의 환심을 사고, 두 비빈과 놀기 위하여, <진서.재기제이십사>에 따르면, 인력을 이만명이나 동원하여 방원 십여리에 이르는 용등원(龍騰苑)을 짓는다. 그리고 용등원에는 경운산이라는 가산을 짓는데, 바닥이 오백보이고 높이가 17장에 이르렀다고 한다. 또한, 소요궁, 감로전을 짓고 방만 수백칸에 이르며, 정자와 누각이 연이어 있었다. 그리고 인공도랑을 파서 강물을 원내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언니가 더울까봐 모용희는 특별히 그녀를 위하여 곡광해와 청량지를 파서 피서할 수 있게 해주었다.

 

휘황하고 아름다운 환락의 장소가 완공되었다. 혹서와 고온을 견디며 공사에 동원되어 일을 하던 노동자들중 절반정도는 혹서와 노동으로 현장에서 사망한다.

 

정태후는 자신이 올려놓은 남자가 은혜를 잊고 다른 여자에게 사랑을 옮겨가자, 화를 참지못하고 사랑을 되찾기 위하여 소동을 벌인다. 그러나 결국 모용희에 의하여 정씨는 핍박당해 자살을 하게 된다. 가련하고 다정한 황수 정씨는 결국 가을부채와 같은 처지가 되어 자살로 몰리게 된다. 한차례의 불륜관계는 이렇게 끝이 난다. 그후 모용희는 언니인 부융아를 소의(昭儀)로 삼고, 동생 부훈영을 영응황후(榮膺皇后)로 책봉한다.

 

소의는 복천명박(福淺命薄)했다. 황제의 사랑을 한창 받으려 할 때, 돌연 병으로 쓰러진다. 여러가지 수단을 다 썼지만,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모용희는 자매 둘을 "백벽일쌍(白璧一雙)"으로 보았는데, 어찌 그중 하나가 없어지는 것을 눈뜨고 본단 말인가? 그래서 천하에 명을 내려, 묘수회춘하게 할 수 있는 자를 찾았고, 만일 성공하면 황금만냥을 상으로 내리겠다고 한다. 민간에 왕온(王溫)이라는 의생이 있었는데, 스스로 나서서 부소의의 진맥을 하였다. 모용희는 한때 기뻐하면서 희망에 차서 사랑하는 여인이 건강을 회복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왕온이 온갖 방법을 다 썼지만, 여전히 그녀의 병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부소의는 결국 세상을 떠난다. 모용희는 화도 나고, 후회도 되고, 한도 남고, 실망으로 인하여 고통을 이를 악물고 참으며, "왕온의 사지를 갈라서 불태운다." 부융아에게는 "민황후"라는 명호를 내려 위로한다.

 

여동생인 황후 부훈영이 천자 모용희에게 유일하게 남았다. 그는 그녀를 배로 사랑하며 자신의 심간(心肝)으로 여긴다.

 

부황후는 산과 물에서 노는 것을 좋아했다. 모용희는 두 말도 하지 않고, 바로 만족시켜 준다. 부씨를 따라 "북으로 백록산에 오르고, 동으로 청령을 넘으며, 남으로 창해까지 간다" 대강남북을 다 돌아다니고 호광산색을 감상한다. 황제와 황후의 순행이 편안하게 이루어지고 원만하게 진행되도록 하기 위하여 병사들은 힘들게 일했고, 백성들도 고생을 했다. 이 과정에서 모두 5천명이 생명을 잃는다.

 

부황후는 여름이 언 물고기를 먹고 싶어했고, 한겨울에 신선한 지황(선지황은 초여름에 꽃을 피운다)을 먹고 싶어했다. 모용희는 명을 내려 처리하게 했고, 임무를 완성못하면 죽였다.

 

모용희는 부황후를 위하여 다시 승화전(承華殿)을 지으려 했다. 이는 원래의 승화전보다 배는 큰 것이었다. 그렇게 하려면 북문의 바깥에서 많은 흙을 옮겨와야 했다. 당시 흙의 가격은 쌀의 가격과 같아서 아주 비쌌다. 두정(杜靜)이라는 대신이 죽음을 무릎쓰고 간언한다. 이렇게 하면 백성들이 너무 힘들고 재물을 너무 많이 소비하게 된다고, 그 결과 황제의 분노를 사서 그는 목이 잘린다.

 

황제와 황후는 서로 여교사칠(如膠似漆)이었고, 주야로 항상 함께 다녔다. 행군때나 전쟁때도 마찬가지였다. 모용희는 부씨를 항상 곁에 데리고 다녔다. 후연이 거란과 교전을 할 때, 모용희는 전선에 가서야 상대방의 병마가 강성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병사를 거두어 퇴각하려 한다. 그의 곁에 서 있던 부씨는 눈썹을 찡그리며 불쾌해 보였다. 그리고 애교섞인 목소리로 전투하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모용희는 병마에게 방향을 바꾸어 전투하라고 지시한다. 삼천여리나 달려와서 병사와 전마가 피곤에 지쳐 있는데, 이렇게 하는 것은 죽는 길이었다. 결국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하고 돌아오게 된다.

 

풍몽룡은 <고금담개.치절부>에 이렇게 기록했다. 부황후는 모용희를 따라 고구려를 치러 갔다. 요동에 도착해서 후연의 군대가 성벽아래에 지하통로를 팠다. "성이 함락되고, 황후가 연을 타고 들어가고자 해서, 병사들에게 먼저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성이 함락되려고 하니 부황후는 흥이 일어서 자신이 먼저 들어가 보겠다고 한다. 그리하여 병사들이 지하통로로 먼저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렇게 시간을 끌다가 상대방에서 지하통로를 다시 막아버린다. 결국 가마를 타고 성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을 뿐아니라, 성을 함락시키지도 못하고 돌아왔다.

 

홍안박명이라고 언니도 젊은 나이에 죽었고, 부황후도 하늘이 그리 많은 시간을 주지 않았다. 한창 나이때 죽고 만다. 부씨가 돌연 사망하자, 모용희는 가슴을 치며 크게 곡을 하고, 친아버지 어머니가 죽었을 때보다 슬퍼한다. 그는 부씨의 사체를 안고 계속 쓰다듬었고, 완전히 시신이 얼고 굳을 때까지 그렇게 했다. 모용희는 그 모습을 보도 또 한번 비통하게 운다. 그는 곡을 하다가 기절까지 했다. 곁에 있는 사람들이 한참을 위로하고나서야 겨우 다시 깨어났다. 부씨의 죽음은 그의 심장에서 살을 발라낸 것과 같았다. 상처는 치유되지 않았다. 천자는 조정의 문무백관들에게 자신과 함께 황후를 위하여 소복을 입고 소식을 하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감시하는 사람을 배치하여 "눈물을 흘리는 자는 충효하다고 여기고, 그렇지 않으면 죄를 내렸다." 신하들은 모두 두려워하며 매운 것을 눈에 넣어 눈물을 흘렸다.

 

이것만으로 그가 처를 잃은 고통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는 강제로 나이가 젊은 형수, 고양왕 모용륭의 애비인 장씨를 부황후를 따라 순장시키라고 명한다. 장씨와 가족들이 애절하게 간청했지만, 모용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부씨를 염하고, 관두껑이 이미 닫혔는데, 모용희는 사랑하는 처와 음양으로 갈라지는 것을 참지 못하여, 다시 관두껑을 열고 관 속에 들어가 부황후를 한참동안 안고 이별한다.

 

부씨를 위하여 능묘를 만드는데, 모용희는 국고의 모든 돈을 쓴다. 위로는 공경에서 아래로는 백성까지 집집마다 사람을 보내어 묘를 만들게 한다. 장례를 치르는 날, 머리를 흐트리고 맨발로 친히 영구를 들고 이십여리를 간다. 영구차가 너무 커서 성문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되자 모용희는 그 자리에서 성문을 철거하라고 명령한다. 이렇게 여러 사람을 고생시키고서야 비로소 부황후는 매장된다.

 

부씨가 매장되고나자 모용희는 혼을 잃은 것같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자 그의 인생에서의 사랑과 희망도 모두 떠나버린 듯했다. 밤낮으로 그의 머리 속에서 맴도는 것은 하루빨리 부황후의 곁으로 가겠다는 것이고, 다시 지하에서 다시 만나겠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봉건제왕들의 사치와 음락을 질책한다. 모용희와 같이 한쌍의 자매를 위하여 백성들을 힘들게 하고 재물을 낭비하고, 국고를 다 써버리고, 장병과 백성의 사활을 돌보지 않으면서 그자 자신의 사랑만 생각하고 자신의 즐거움만 생각하는 것은 다른 고대제왕들과 차이가 없다. 그러나 바꾸어 단순한 인성의 각도에서 보자면, 그는 이 두 자매 특히 동생 부훈영에 대하여 진정으로 사랑했고, 그 정도는 거의 미치광이 수준이었고, 온 마음을 다 기울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한 여자에게 이렇게 정이 깊었고, 모든 것을 돌보지 않았다. 제왕들 가운데, 아마도 이융기(당현종) 마저도 부끄러워할 정도라 할 것이고, 중국역사상 유례가 없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