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마수(馬帥)
장건(張騫), 감영(甘英)이 서역을 경영한지 다시 7세기가 흘렀다. 그리고 또 한명의 중국인이 아시아의 서쪽변경으로 가서 처음으로 믿을만한 기록을 남겼다. 이 사람의 신분은 아주 독특했다. 아랍인들이 붙잡은 전쟁포로였던 것이다. 그의 이름은 두환(杜環)이고, 그는 <경행기(經行記)>를 남겨서, 생동감있게 아랍세계를 묘사하고, 더더구나 유라시아대륙에 걸쳐 있던 동로마제국에 대하여도 기록했다. 이것은 중국인이 처음으로 남긴 유라시아대륙의 모습이었다.
750년, 중국에서는 천보(天寶)연간이라고 부르는 시기인데, 전체 사회는 전례없는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여러번 대외전쟁도 진행했다. 비록 이때 이융기(李隆基, 당현종)는 날로 주색에 빠져 더이상 나라를 다스리는데 정력을 쏟던 영명한 군주가 아니었고, 번영한 사회의 표면아래에는 심각한 위기가 도사리고 있었지만, 대당은 최소한 여전히 '대'당이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강국이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중동의 아랍인들도 신속히 발전했다. 무하마드와 4명의 정통 칼리파이래, 무슬림은 이미 앗시리아인, 페르시아인 및 로마인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광활한 판도를 장악했다. 아랍반도의 몇몇 부락에서 이미 유럽, 아시아 및 아프리카의 삼대주에 걸친 대제국을 형성했고, 서쪽으로는 전체 북아프리카와 스페인을 점령했고, 동쪽으로는 전체 서아시아와 중아시아의 절반을 손아귀에 넣었다. 지중해는 아랍인들의 내해가 되었다. 아랍제국은 중국, 토번을 제외한 서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또 하나의 역량이 된다.
한민족에 있어서, 중원과 강남을 제외한 지역은 '오랑캐의 땅'이고, 그다지 흡인력이 없다. 이들 토지는 농작물을 대량으로 재배할 수가 없다. 한족의 "확장"은 대부분 주변민족들이 전에 한족들이 소유했던 토지를 빼앗아 감으로서 다시 빼앗아로기 위하여 싸운 것이다. 본국영토의 안정과 후환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병력을 일으킨 것이다.
아랍제국은 지리적인 이점을 가지고 있었고, 게다가 당나라군대의 주력은 이 시기에 청해와 토번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어서, 서역까지는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아랍의 영향력이 점점 나타나기 시작했다. 서역제국은 원래 불교등 자신의 전통종교를 대부분 신봉하고 있었는데, 이슬람문화의 동진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더더구나 용맹한 무슬림전사를 두려워했다. 그리하여 적지 않은 국가들이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한다. 처음에 당나라는 이를 신경쓰지 않았지만, "석국사건(石國事件)"이 발생하고나서 비로소 전쟁의 봉화가 타올랐다.
750년, 당나라의 통치자는 서역의 번국 석국이 '번신의 예를 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유로 삼아, 당나라 안서절도사 고선지(高仙芝)로 하여금 병력을 이끌고 토벌하게 한다. 석국은 투항을 요청하고, 고선지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약속한다. 얼마후, 고선지는 약속을 어기고, 석국의 성을 점령하여 피로 씻고, 남자들은 끌고가고, 노인과 부녀자, 아이들은 모조리 죽였다. 그리고 재물을 약탈하고, 석국의 국왕을 포로로 잡는다. 751년 정월, 고선지가 조정으로 들어와, 여러 국왕을 당현종에게 바친다. 그리고 그 전공으로 우우림대장군의 직위를 받는다. 그리고 석국국왕은 참수한다. 이때가 고선지의 장군으로서의 생애에서 최고봉이다.
요행히 도망친 석국의 왕자는 대식국(大食國, 아랍제국)의 압바스왕조(黑衣大食)에 구원을 청한다. 대식의 원군은 당나라의 서역4진을 습격하고자 계획한다. 고선지는 선발제인으로 대식국을 적극적으로 공격한다. 고선지는 대당연합군을 이끌고 장거리를 공격하여 습격한다. 700여리를 깊이 진입하여 마지막으로 탈라스에서 대식국의 군대와 조우한다.
고선지는 탈라스를 5일간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다. 아랍의 원군이 도착하여, 배후에서 당군을 급습한다. 쌍방은 탈라스강의 양안에서 결전을 벌인다. 갈라록(葛邏祿)족 용병은 상황이 좋지 않자, 돌연 배신을 한다. 당군의 진영은 졸지에 혼란에 빠진다. 아랍연합군은 그 틈을 타서 중기병을 출동시켜 당나라군진영의 가운데로 돌격한다. 연일 계속된 전쟁에서 당군은 내외의 협공하에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고, 결국은 궤멸한다. 고선지장군은 밤에 엄호를 받아 단기로 도망친다.
이 전투에서 당군의 손실은 참혹한다. 2만명의 안서정예부대는 거의 전멸한다. 겨우 천여명만이 살아서 돌아간다. 사망자와 포로로 잡힌 자가 각각 절반이다. 두환은 바로 그 포로로 잡힌 사람중 하나이다.
이 전투는 당나라가 서역에서 영향력을 상실하는 전환점이 될 뿐아니라, 당나라국운의 전환점이 된다. 전후 4년이 지나서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고, 시인들은 "개변(開邊, 변경개척)"과 "원략(遠略)"을 저주하기 시작한다.
당군을 따라간 서기관인 두환은 포로중의 하나가 되어 대식국(아랍제국)으로 끌려간다. 포로가 된 후 대식국에서 12년을 유랑한다. 그는 흑의대식의 온 나라를 돌아다니게 된다. 이때부터 그의 전설적인 유랑인생이 시작된다. 그는 처음으로 북아프리카로 가서 저작을 남긴 중국인이 된다. 두환은 762년이 되어서야 중국으로 돌아온다. 비록 스스로 원해서 간 것은 아니지만, 그의 '여행'은 여전히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아쉬운 점은 <경행기>가 일찌감치 실전되어, 전부 전해질 수 없게 된 점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두환의 숙부(혹은 백부)인 두우(杜佑)가 자신의 책에서 남겨놓은 편린뿐이다. 두우는 당나라의 정치가이고 <통전(通傳)>을 지었다.
당시의 압바스왕조의 대도시에서 두환은 그곳에 이미 중국에서온 직조기기가 있는 것을 발견했을 뿐아니라, 친히 중국장인(금은장인, 화장(畵匠) 및 방직기술자)들이 그곳에서 일하고 있는 것을 목도한다. 예를 들어, 경조(京兆) 사람 번숙(樊淑), 유차(劉泚)는 "한장기작화자(漢作起作畵者)"였고, 하동 사람인 낙릉(樂陵), 여례(呂禮)는 "직락자(織絡者)"였다.
두환이 본 마린국(摩隣國) 사람은 피부가 검고, 야조(椰棗)를 주식으로 삼는 에리투리아연해의 주민이다. 그가 이집트를 방문했을 때, 인상이 가장 깊었던 것은 현지의 기독교의사가 안질과 이질을 잘 치료한다는 것이었다. 많은 병에 대한 예방방법이 있었고, 뇌외과수술은 더더욱 놀랄 정도였다. 현지의 아랍의삭중심은 이집트와 시리아였는데, 기독교도인 의사가 아랍의술을 주도했다고 한다. 두환은 그들을 대진(大秦)의사라고 불렀다. 그들이 비잔틴의 의학전통을 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경행기>에서 이렇게 썼다: "그 대진은 안질과 이질을 고치는데 뛰어났다. 혹은 병이 나타나기 전에 미리 보고, 뇌를 열어 벌레를 꺼냈다." 이것은 현지 지중해지역의 뛰어난 의술을 반영한다.
그는 아랍인들의 신앙인 이슬람교에 대하여도 기록을 남겼다: "하루에 다섯번 하늘에 예배를 하고....예배당이 있는데, 수만명이 들어간다. 매 칠일마다 왕이 나와서 예배를 한다. 사람들에게 설법을 하는데 이렇게 한다: '사람이 사는 것은 아주 어렵다. 하늘의 도리는 바뀌지 않는다. 간사하거나 물건을 훔치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자신은 안전하게 하고 다른 사람을 위험에 빠지게 하거나, 가난한 사람을 괴롭히고 천한 사람을 못살게 굴거나 이 중의 하나에 해당하면 그 죄가 아주 크다. 전쟁을 할 때 적에게 죽으면 반드시 하늘로 올라갈 수 있다. 적을 죽이면 그 복은 무한하다."
"대식의 법은 제자,친척이 판결을 한다. 작은 잘못이 있으면 서로 연루되지 않는다. 돼지, 개, 당나귀 말 등의 고개를 먹지 않는다. 국왕의 부모를 모시지 않고, 귀신을 믿지 않으며, 하늘(알라)에 제사지낼 뿐이다." 그는 이렇게 생동감있게 이슬람교문화를 소개했다. 그리고, "여자들이 문을 나설때면 반드시 얼굴을 가려야 한다. 귀천을 불문한다." 이것은 더더구나 진실되게 아랍세계의 풍경을 묘사한 것이다.
아랍의 번영한 경제도 두환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성곽의 안에, 골목의 가운데, 토지에서 나는 것은 없는 것이 없다. 사방으로 연결되고, 온갖 물건이 풍부하고 값싸다. 비단과 구슬이 온 시장에 가득하다. 낙타와 당나귀가 길거리에 가득하다." "유리그릇, 옥석으로 만든 병과 그릇이 셀 수 없이 많다. 쌀이나 밀가루도 중화와 다르지 않다."
두환의 이런 기록은 이미 소문의 정도를 벗어났다. 완전히 그 자신이 친히 본 일들이다. 전혀 허구적인 성분이 없다. 지적할만한 점은, 사적에 기록된 대식국의 사신으로 당나라에 온 경우는 모두 36번이다. 당나라는 그러나 대식에 사신을 보낸 적이 없다. 진정 이 대국을 겪어보고, 기록을 남긴 당나라 사람은 아마 두환이라는 이 탈라스전투의 포로뿐일 것이다.
두환의 족적이 다다른 곳은 이미 "불림(拂菻)(비잔틴)"에 가까워졌다. 이들 지방의 문화에도 적건 많건 '불림'의 문화분위기가 있었다. 그리고 당시 대식과 불림은 계속 전쟁을 벌였다. 대식에도 불림의 전쟁포로가 있었다. 그리고 두환과도 접촉한 것같다. 이 '불림'은 바로 대당, 대식과 마찬가지로 대제국인 동로마제국 즉 비잔틴제국을 가리킨다.
두환의 <경행기>에 나오는 불림국은 "대진이라고도 부르는데, 사람들의 얼굴색이 홍백색이다. 남자들은 모조리 흰옷을 입고, 여자들은 모두 주금(珠錦)을 입는다. 술마시기를 좋아하고, 건병(乾餠)을 좋아한다....그들의 풍속은 7일마다 하루가 휴일로, 매매(장사)도 하지 않고, 출납(돈거래)도 하지 않는다. 오로지 술을 마시고 하루종일 논다." 이렇게 사실적으로 동로마인들의 피부색, 남자들이 입는 곳, 부녀들이 악세사리를 즐기고, 술마시는 것을 좋아하고, 빵을 잘먹으며, 7일에 하루씩 쉬면서 논다는 상황을 사실적으로 기록했다.
<경행기>는 상세하게 발한나국(拔汗那國, Ferghana), 강국(康國), 사자국(師子國, Simhala), 파사국(波斯國), 쇄엽(碎葉), 석국(石國), 대식(大食)등 여러나라의 지리환경, 산천하류, 토산풍물, 생활풍속, 종교, 명절오락등 여러 방면의 상황을 기록했다. 우리가 이들 나라의 역사문화를 연구하는데 아주 진귀한 원시자료를 제공해준다. 예를 들어, 두환은 고선지를 따라 서역각지를 정벌할 때, 서역각지의 관련상황을 손바닥 보듯이 잘 알고 있었다. 예를 들어, 졸엽은 전략적 위치가 아주 중요하고, 안서4진의 하나이다. 두환의 기록에 따르면, 천보7년(748년) 졸엽성은 여러번 전쟁을 겪다보니 거주지가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원래 교하공주가 거주하던 대운사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는 당나라가 졸엽을 관할하고 경영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준다.
<경행기>는 중국이 이슬람교에 대하여 기록한 최초의 한문전적이다. 두환은 첫번째로 정확하게 이슬람교를 이해한 중국인이다. 두환은 포로로 잡혀 있는 기간동안이 이슬람교의 전성이며 번성기였다. 그는 객관적으로 이슬람교 신앙, 예배, 금식 및 행위규범, 음식, 의복장식, 금기등 교의, 교법등을 기록했다. 두환은 또한 조로아스터교, 기독교, 불교의 상황도 기록했다. 이것은 세계종교의 변화발전과 전파교류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사료가 된다.
<경행기>에는 당나라에서 포로로 잡힌 사병들 중에셔 기술을 가진, 금은장, 화장, 견직공, 종이제조장인등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 그들은 중국의 선진적인 과학기술, 특히 종이제조술을 현지에 전해준다. 사마르칸트에는 최초의 종이공장이 들어선다. 그후 점차 다마스커스, 카이로 및 모로코와 스페인의 일부도시에까지 전해진다. 매끄럽고 부드러우며, 글을 쓰기에 좋은 중국종이는 금방 이전까지 오래 쓰였던 이집트파피루스, 양피, 나무껍질등을 대체한다. 서방문명은 이로 인하여 급속히 발전한다.
역사학자인 백수이(白壽彛)는 <경행기>에 나타나 있는 이슬람교에 대한 기술과 중국종이제조술의 전수를 탈라스전투의 2가지 영향이라고 하였다. 이는 중세기 아랍제국과 당왕조의 문화교류성과이며, 중국이슬람역사와 중국과 아랍국가가의 관계사를 연구하는데 진귀한 자료이다.
유감스러운 점은, 두환의 경력이 당시에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경행기>가 없어진 것은 바로 이 점을 설명한다. 그후 기나긴 농경역사에서, 사람들은 서쪽세계에 대하여는 그저 전설과 기괴한 이야기로만 남았다. 그 연유는 바로 이런저런 소문들을 믿어버렸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북송 <태평어람>에는 이런 말이 있다. "불림(비잔틴)에는 바다 가운데 섬이 있는데, 섬의 서북쪽에 구덩이가 있다. 깊이가 천여척이고 고기를 던지면 새가 보석을 물고 나오는데, 큰 것은 5근에 달한다." 이런 이야기는 <천일야화>의 신밧드이야기, 사이프러스지방의 주교인 에피파니오스의 책에서도 유사한 기재를 찾아볼 수 있다.
단성식의 필기인 <유양잡저>에도 고아인 여자아이가 계모에게 괴롭힘을 당했는데, 선인의 도움을 받아 황금신발을 신고 연회에 참석하여, 국왕의 왕후가 된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유럽동화 신데렐라와 어떤 관련이 있다.
두환은 처음에 적대적인 마음을 품고 아랍에 들어갔다. 아랍에서 십년이상 포로생활을 했고, 석방되어 귀국한 후, 아랍과 이슬람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지는 않았고, 오히려 아랍을 찬양하고 이슬람을 찬양하는 저작 <경행기>를 남긴다.
보응원년(762년)의 여름, 두환은 그의 여정을 마친다. 두환이 마지막으로 간 곳은 에티오피아의 미치와항구이다. 그는 그 곳에서 페르시아만으로 돌아온 후, 마침내 대당으로 가는 상선을 탄다. 상선을 타고 광주에 도착함으로써 그는 떠난지 오래된 중국으로 되돌아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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