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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당)

당나라때 고관들은 왜 가난뱅이행세를 했는가?

by 중은우시 2011. 12. 6.

글: 지백수흑(知白守黑)

 

당나라때의 공무원 수입은 적다고 할 수 없었다. 급여 이외에도 윤필비(潤筆費), 하사금등 가외수입이 있었다. 이 정도면 먹고입는데 걱정할 것은 없었다. 백거이, 왕유처럼 착실하게 이삼십년 공무원으로 일하게 되면 그럴듯한 부동산을 가지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그런데, 많은 고관들은 최고위직에 있으면서도 '가난뱅이'로 살았고, 처자식들을 힘들게 했다.

 

관직이 올라가고 돈을 버는 것은 일부 중국인들이 몽매에도 추구하는 바이다. 그러나 당나라전기부터 개원성세까지 정계에서는 근검절약의 정신이 강조되었다. 당태종때부터 당현종까지 계속하여 '근검절약을 숭상하라'는 조서를 내려보냈다. 일부 고관들은 이에 호응하여 남루하게 살았다.

 

이런 사회배경하에서, 일부 사상적으로 고상한 고관들은 돈을 더 곤란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그들은 돈을 돌처럼 여겼다. 매월 급여를 받으면, 부인에게 가져다 주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먹고 입는 수준의 돈이고, 나머지 돈은 사회의 곤란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이렇게 하여 역사에 길이남을 도덕적 모범이 된다. 당현종시기의 재상인 이원굉(李元紘)은 집도 낡았고, 옷도 검박하게 입었다. 집밖으로 나가 일을 볼 때면 늙은 말 한 마리를 타고 다녔다. 그의 돈은 그보다 더 곤란한 친구들을 도우는데 썼다. 재상인 노회신(盧懷愼)은 가장 유명한 가난뱅이이다. 그의 집에는 문에 가릴 차양이 없고, 고기를 먹지 못했으며, 처자식은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렸다. 그의 봉급은 수시로 더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주는데 썼다. 당의종때의 재상인 유첨(劉瞻)은 "그가 얻은 봉급은 남은 것을 친구들 중 곤란한 자들을 도우는데 썼고, 집안에 남겨두지 않았고, 집도 없었다." 이런 관료들은 죽을 때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다. 후손들에게 남긴 것은 돈이 아니라, 인품이었다. 

 

당나라때는 고관들 사이에 근검절약의 기풍이 유행했다. 이는 집안에 재산이 많은 일부 고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돈이 있는 관리들은 마음에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돈을 놔두고도 쓸 수가 없었다. 그저 보관만 할 뿐이었다. 침대머리의 한 쪽귀퉁이에 쌓아두고는 겉으로는 고기를 못먹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럴 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위징은 일생동안 근검하고 청빈하게 생활하였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도 산해진미가 아니라 일반야채였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한 통계에 따르면, 위징이 당태종으로부터 받은 하사금만 최소 5600필 견에 이르고 상여로 받은 현금과 기타 현물만 약 135만전에 이른다고 한다. 이 하사품만 보더라도 2품관리가 170년간 받을 급여수입에 해당한다. 이렇게 많은 수입을 가지고도 위징은 침대에 그럴 듯한 이불과 요도 갖추지 않고 살았다. 이는 결국 '가난한 척 하기'인 것이다.

 

만일 당시의 환경과 위징의 집안상황을 분석해보면 이런 가난한 척하기는 충분히 이해된다. 그는 당태종을 여러해동안 따라다녔고, 한 일은 대부분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일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샀다. 만일 돈을 쓰는데서 흠을 잡힌다면, 여러 사람들이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위징이 가난한 척한 것은 리스크를 피하기 위한 것이다. 그 외에, 위징의 부인 배씨는 유명한 내조자이다. 생활에서 아주 까다롭게 굴었다. 위징이 돈을 가지고도 쓰지 못한 것은 아마도 부인을 무서워해서일 수도 있다. 위징의 이같은 가난한 척하기로 자신을 지켰을 뿐아니라, 가정도 화목했고, 이름을 역사에 남겼다. 이런 가난한 척하기는 아주 머리좋은 사람만이 해낼 수 있는 것이다.

 

위징처럼 명철보신하기 위하여 가난한 척 한 고관은 당나라때 여러명 있다. 당현종 시대의 재상인 우선객(牛仙客)은 역사서에 '청근불권(淸勤不倦)'이라는 명성을 남겼다. 그는 어려서부터 조심스럽게 생활하며 돈쓰는데는 구두쇠였다. 돈있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 그의 침대머리에 있는 상자에는 당현종이 하사한 재물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를 잘 다스려서 시비에 휘말리지 않았다. 하사받은 물건이 곰팡이가 피더라도 그는 감히 함부로 쓰지 못했고, 그대로 보관해놓을 뿐이었다. 이를 보면 정계에서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가난한 척하는 것은 머리를 많이 써야 한다. 이런 유형의 돈을 보관하기만 하고 쓰지 않는 고관들은 저축을 많이 해둔 것과 같다. 평소 생활은 가난해 보이지만 그들의 예금은 상당한 것이다.

 

어찌되었건, 이상의 세 가지 유형의 가난뱅이들의 부는 모두 정당하게 쌓은 것이다. 조그만치도 불법의 흔적이 없다. 자신의 실력으로 돈을 번 것이다. 그저 보관만 해두고 쓰지 않는 경우이건, 재산을 베풀어 주는 경우이든 모두 잘못한 것은 없다. 경멸할 만한 사람들은 '가난한 척하기'라는 작은 재주를 이용하여 드러낼 수 없는 행위를 감추려는 사람들이다. 노회신 등과 비교하자면, 성당사현상(盛唐四賢相)중의 한 사람인 요숭(姚崇)은 약간 문제가 있다. 그는 비록 개원성세를 위하여 적지 않은 공로를 세웠고, 역사적으로 호평일색이지만, 그도 '가난한 척'하는 재주를 부렸다.

 

그의 집은 편벽된 곳에 있었따. 장안 중심지는 집값이 비싸서 사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출근에 편리를 위하여, 그는 황성주변에 작은 집을 빌렸다. 당현종이 이를 알고는 아주 감동받는다. 그를 위하여 고급의 사방관에 방을 내준다. 그러나 요숭은 감히 거주하지를 못했다. 그의 이런 행적은 후세인들이 존경해마지 않는 일이다.

 

요숭은 삼대에 걸쳐 재산을 지냈고, 급여수입이외에 그는 무측천에게 '백은천냥'을 하사받은 바도 있고, 현종에게 '면백綿帛) 삼백필'을 하사받은 바도 있다. 그의 두 아들은 동도 낙양에서 관직에 있었다. '부친이 재상'이다보니, 청탁을 받아서 다른 사람들이 관직에 나가도록 도와주기도 하면서 적지 않은 돈을 받았다. 나중에 이 일은 권모술수로 잠재워놓는다. 그러나 아들들이 받은 재물은 토해내지 않았다. 개원구년(721년) 구월 요숭이 임종때 전답과 재산을 사전에 나눠주었다. 자식과 조카들이 모두 한 몫씩 받았다. 그리고 박장(薄葬)을 해달라고 유언한다. 생전에는 집을 임차하고, 죽을 때도 박장을 해달라고 하다니, 그는 도대체 무엇을 감추려고 한 것일까? 한 집안에 세 명이나 관직에서 돈을 벌고, 가욋돈까지 벌면서...아마도 아들들의 일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한 지도 모른다. 이런 '가난한 척하기'를 통하여 숨기고자 한 것이다. 이는 그다지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다.

 

위징, 우선객, 요숭과 같은 고관들은 어떤 목적에서이건 '가난한 척' 했고, 이는 지능이 높고 수준이 높은 생동이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만이 자신이 부자인지 아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들이 가난한 줄 알기 때문이다. 이런 '가난한 척하기'는 상당히 정교한 것이다. 당나라때 가장 유치하고 가장 미성숙한 '가난한 척하기'는 당대종때의 어사중승(御史中丞)인 최관(崔寬)이다. 그는 집안이 부자였고, 생활도 사치했다. 황성의 남족에 멋있는 별장을 지어두었다. 경성의 관리들과 백성들은 모두 최관이 부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루는 최관이 보니, 중서령 곽자의가 빈주행영(州行營)의 악사를 4/5 내보내고, 경조윤 여간이 외출 할 때의 말을 백여필에서 열필로 줄인 것을 보았다. 그 사유를 확인해본 후, 최관은 사람들을 시켜서 몰래 자신의 호화주택을 부수게 한다. 그리하여 순식간에 부호에서 가난뱅이가 된 것처럼 한다. 그러나 장안성내에서 최관 자신만 스스로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가 부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나라때 고관들 중 가난뱅이를 분류해보면 5가지 유형으로 나눠볼 수 있다. 최저선을 지키는 청렴형, 베풀기를 좋아하는 보시형, 돈을 모으기만 하고 쓰지를 않는 명철보신형, 오점을 가리려는 권모술수형, 엄이도령의 유치형. 이들 고관들 중 어떤 사람은 진짜 가난하고, 어떤 사람은 가난을 가장했고, 어떤 사람은 가난을 만들었다. 어떤 사람은 남을 위하여 가난하게 살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을 위하여 가난하게 살았다. 어떤 가난은 존경할 만하고, 어떤 가난은 동정할만하고, 어떤 가난은 배꼽잡고 웃게 만든다. 이런 '가난뱅이족'들을 보면 진선미(眞善美)있고, 가악추(假惡醜)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