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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당)

왜 당나라에서 중화문명의 전성기를 이루었는가

by 중은우시 2012. 3. 29.

글: 정만군(程萬軍)

 

중국문명의 가장 휘황한 역사를 얘기하면, 지구인들은 모두 당왕조를 꼽는다.

의문의 여지없이, 당나라때의 중화문명은 봉건문명의 세계 최고봉에 올랐다. 만일 봉건문명의 최고봉을 꼽는다면 그 어느 국가도 감히 중국의 당왕조의 중화문명을 뛰어넘는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왜 중화문명이 당왕조때 전성기를 이루었고, 다른 왕조가 아니란 말인가?

여러가지 분석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필자가 생각하기로 가장 중요한 점은 역시 당왕조의 "이원체제(二元體制)"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당나라의 체제는 정치에서 문화까지 모두 통일국가를 이룬 중국의 다른 역대왕조와는 달리, '일원체제"가 아니라 '이원체제'를 유지했다.

일본학자인 곡천도웅(谷川道雄)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런 체제는 "호,한이원체제(胡漢二元體制)"이고, 중국학자 진인각의 표현을 빌리자면 "호한분치(胡漢分治)"이다.

 

"이원체제"의 정치적 표현

 

당나라는 "나와 같은 족속이 아니면 그 마음이 반드시 다르다(非我族類, 其心必異)"라는 '내성'적인 전통에서 벗어나 '다원개방식'의 정치를 실행하였다. 당나라조정의 최고지도자는 한족과 외족을 구분하지 않고, 관리로 채용하였다. 심지어 외족 장수를 특별히 중용하기도 했다.

 

당나라는 대거 호인, 사타인, 강족을 정부관리로 임용한다. 그리고 적지 않은 일본, 한국등 '외국인'도 당나라의 과거시험에 참가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진사급제후 당나라에 남아서 관리를 지냈다. 그들은 소속국의 이민족 풍속을 유지했으며, 대당의 관직도 받아들였다. 개방된 정치는 중화문명을 '중망소귀(衆望所歸)'의 대문명의 반열로 끌어올렸다.

 

"이원체제"의 문화적 표현

 

역사적으로 성당은 중국문화가 성숙되고 번영한 시기로 인정된다. 그러나, 무엇때문에 이런 성숙과 번영이 가능했을까? 사람들마다 서로 다르게 이해할 수 있다.

필자가 이해하기로, 성당의 문화번영과 전통은 한문화의 핵심인 유가문화와 물론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이 관계는 역대왕조에서처럼 유가가 "독존(獨尊)"은 아니었다. 오히려 '네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네가 있다'는 융합구조였다.

수당이전의 통일시대중 한나라는 유가문화를 핵심으로 했고, 독존유가를 실현한다. 이렇게 하여 다른 문화의 발전을 억제했고, 동시에 편협성을 드러낸다. 사상이 유가문화와 맞지 않으면, 이경반도(離經叛道)로 취급되어 경멸당하고 말살당했다. 유가이외의 문화는 정체에 빠진다.

사상은 서로 부딛쳐야 불꽃을 발한다. 문화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단지 하나의 문화만 있다면 그 문화가 시대발전에 적합하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것은 낙후된 국면에 빠지고, 더 이상 시대의 발전에 적합하지 않게 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존이부독(尊而不獨)"이 성당때 유가를 대한 공식적인 태도였다. 성당은 유가에 대하여 "존이부독"의 입장을 취하였고, 주류이데올로기측면에서 삼원화 현상이 나타난다. 당나라는 유불도(儒佛道)의 삼가가 병존했다. 유학은 기실 3분의 1에 불과했다. 많은 경우 도교, 불교가 의식형태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를 통하여 도덕과 법률의 부족을 보완했다.

당나라사람들은 불교를 숭상하고, 도교를 신봉했다. 화상, 도사들이 당나라때 지위가 높았다. 유학자에 전혀 못지 않았다. 이것은 객관적으로 성당이 전통에 구애받지 않고, '소요소탈'의 기풍을 형성할 수 있게 한다.

문화적 이원체제는 유가,도가가 병행하고 겸용병포한다. 당나라이 문화정책은 '백가제방'의 국면이었다. 다원이 당문화의 번영을 가져온다. 당나라는 수나라의 과거제도를 승계하고, 유학을 시험내용으로 삼는다. 다만 동시에 제자백가의 내용도 포함시켰고, 시험과목이 팔십여과목에 달하였다.

확실히 문화이원체제는 당나라로 하여금 교조주의적 유학을 버리게 만든다. 유가의 '존왕양이(尊王攘夷)" 교조를 받들지 않고, 사해의 안에는 모두 형제이다라는 생각을 가진다. 당나라사람들은 서역의 풍속을 좋아하고, 열정적이고 분방한 춤을 숭상한다. 자유롭게 애정을 표현하고 실천했다. 당나라의 사회분위기는 활발하고 개방적이었다. 남자들은 변방에서 전쟁을 하는 것을 숭상했지만, 여자들은 대담하고 화려하게 차려입었다. 사람들은 '남녀수수불친'과 같은 말은 따지지 않았다. 당나라공주가 재혼, 삼혼하는 것은 아주 정상적이었다. 여자들이 정치를 하기도 하고, 관직에 오르기도했다. 이런 것들은 원래의 교조주의적 유가에서라면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이원체제"의 군사적 표혐

 

세계의 주도적인 문명대국이 되려면 소프트 파워만을 가지고는 안된다. 예리한 이빨도 가져야 한다.

당나라군대는 세계에서 남들이 가지지 못한 강점을 가졌다. "호한합류의 군사역량"이 그것이다. "호한분류"는 당나라군대를 전통적인 작전모델인 '철기군'을 버리고, 앞에는 '현갑병(玄甲兵)', 뒤에는 '신책군(神策軍)'을 두는 것이다. 백전백승에 천하무적이었다.

군사인재를 보면, 당나라에는 이정, 곽자의와 같은 한족 명장들도 있었지만, 가서한(哥舒翰) 등등의 호인 장수도 있다. 당나라는 한족을 주력으로 하고 각 이민족 사병도 있는 혼합부대였다. 이것이 바로 불가일세의 당군이다. 대외작전에서 거의 백전백승이었다.

 

당나라의 '이원체제'는 이세민이 서거한 후 당현종 시대에 다시 전성기를 한번 더 맞이한다. 그러나, 내전으로 중화문명은 쇠퇴한다. '이원체제'는 갈수록 사라졌다.'이원체제'가 소실되면서, 중국의 정치, 문화체제, 군사체제는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전면적으로 '일원체제'로 쪼그라든다. 그후 중국은 대외침략에 전전긍긍하며 스스로를 지키는데 급급한 나라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