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미상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효과군(驍果軍)"은 우둔위(右屯衛)에 예속되어 있었고, 황상(수문제)의 친위대이다. 개황3년, 수문제는 효위군(驍衛軍)과 과의군(果毅軍)을 합쳐서 효과위(驍果衛)로 만들었고, 군대내의 장병들로 충당했고, 혈응(血鷹, 핏빛 매)를 왼쪽팔에 문신으로 새겼다.
대업9년(613년), 수양제는 군대를 확충하기 위하여 부병(府兵)을 징발하는 외에, 다시 신군을 모집했다. 이 신군은 대부분이 관중 사람이었다. 그들은 신체가 건장하고 용맹하며 전투를 잘 했고, "효과"라 칭했다. 대업12년(616년), 수양제가 강도(江都)로 내려갈 때, 호분랑장(虎賁郞將) 사마덕감(司馬德戡)이 1만여명의 '효과군'을 지휘하여 금위군으로 수행했다. 그리고 강도 동성에 주둔했다. 와강군이 이미 동도 낙양에 가까이 쳐들어왔기 때문에, 수양제는 낙양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효과군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다. 나중에 수양제는 강도의 과부와 시집가지 않은 여자들을 강제로 효과군과 결혼시켜서, 그들이 강도에서 가정을 이루게 하였다. 그러나, 효과군은 여전히 강도에 남아있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왕왕 탈영을 해서 도망쳤고, 양광은 마음대로 탈영한 효과군은 일일이 처결했다.
관핍민반(官逼民反)이라고, 마침내 효과군의 군사정변을 불러온다. 대업14년(618년) 삼월, 사마덕감과 우문화급(宇文化及), 우문지급(宇文智及)등의 계획하에, 효과군은 마침내 군사정변을 일으킨다. 야밤에 궁안으로 쳐들어가서 수양제를 시해한다. 사건발생시 양광은 도대체 누가 주모자인지를 추궁했다. 그러나 대답은 "모두가 같이 원망하고 있다. 어찌 한 사람만이겠는가?"라는 것이었다. 양광은 반란을 일으킨 주모자의 손에 죽지 못하고, 자신의 어림군의 군사정변으로 죽었다. 혼군이 이 정도에 이르렀다면, 실로 이는 사상유례없는 일이다. 양광이 죽자, 우문화급은 효과군 십만명을 이끌고 낙양으로 돌아간다. 이밀(李密)의 점령지는 우문화급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땅이었다. 우문화급은 낙양으로 가고싶어했으므로 이밀과의 일전은 피할 수 없었다.
이 용맹한 부대가 낙양의 동쪽에 있는 활대(滑臺, 지금의 하남성 활현)까지 갔을 때, 군량을 다 먹어버렸다. 그래서 와강군이 점령하고 있던 여양양창(黎陽糧倉)을 향헤 공격을 감행한다. 그리하여 도우러 온 이밀의 대군과 기수(淇水)의 양안에서 전투를 벌이게 된다.
낙양을 지키고 있던 황손(皇孫) 양동(楊侗)은 수양제가 시해된 후, 황제에 즉위하며 연호를 황태(皇泰)로 한다. 황태제는 앉아서 어부지리를 얻기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이밀에게 투항하고 이밀로 하여금 우문화급의 효과군과 전력을 다해서 싸우기를 권했다. 이밀도 낙양의 수나라군대가 배후에서 자신을 협공하는 것이 두려웠다. 그리서 즉시 그 조서를 받고, 동산(童山)에서 효과군과 전투를 벌인다.
이밀은 우문화급군대의 양식이 떨어진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수완을 쓴다. 거짓으로 우문화급과 평화협상을 시작한다. 그리고 양식을 우문화급에게 빌려주겠다고 약속한다. 우문화급은 그 말을 진실로 믿고, 크게 기뻐하며, 부하들에게 먹고 마실 것을 모두 나누어주고 마음껏 먹고 마시게 한다. 아마도 큰 파티같은 것을 열었을 것이다. 그 결과 원래 얼마 남지 않았던 군량이 다 떨어져 버리게 된다. 이밀의 계획은 우문화급이 모든 군량을 다 써버리기를 기다려 약속을 뒤집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부하가 반기를 들고 이밀의 수완을 우문화급에게 밀고한다. 우문화급은 당연히 대노하고, 군량이 남아있지 않았으므로, 전군에게 이밀의 군대를 향하여 진격하게 하였다.
칠월, 쌍방은 동산에서 큰 전투를 벌인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강했던 효과군과 의군인 와강군은 하룻동안 격전을 벌인다. 와강군은 거의 버티지 못할 지경까지 몰렸고, 이밀 본인도 화살에 맞아서 상처를 입는다. 만일 진숙보(秦叔寶)가 죽음을 무릎쓰고 보호해주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우문화급군대에 생포되었을 것이다. 이밀은 전력을 다하였고, 겨우 우문화급의 이번 공격을 물리칠 수 있었다. 비록 동산지전에서 효과군을 궤멸시키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이밀은 승리를 거둔 것이다. 효과군은 이미 군량이 없었기 때문에, 더 이상 와강군과 대치하지 못하고, 동산전투후 얼마 지나지 않아, 효과군은 스스로 붕괴한다. 장수인 진지략(陳智略), 번문초(樊文超, 낙양전투에서 낙양을 지키던 양현감의 대장 번자개의 아들), 장동아(張童兒)등은 속속 이밀에 투항한다. 우문화급은 겨우 이만명을 남겨서 위현(魏縣)으로 물러난다. 나중에 우문화급은 두건덕에 멸망당한다. 정예부대인 효과군은 전쟁터에서 진 것이 아니라, 군량이 없어 실패한다. 이를 보면 전쟁때 물자조달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동산전투는 하루 종일 진행되었고, 우문화급의 가장 강한 적군을 격퇴시켰다. 우문화급은 위군(지금의 안양)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두 군이 죽기를 각오하고 벌인 전투는 거의 양패구상이었다. 와강군의 정예병졸과 군마는 너무나 많이 사상당했다. 효과군은 도중에 내분으로 사마덕감등은 우문화급에게 피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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