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서태후)

서태후와 영록(榮祿)

중은우시 2011. 4. 6. 19:22

 

: 장영구(張永久)

 

 

 

서태후에 관한 야사와 소문들 중에서 가장 대담하고 가장 향염(香艶)한 것은 서태후와 영록의 신비한 관계에 대한 것이다.

 

최근 들어, 덕령공주(德齡公主)라는 청나라말기 여자가 쓴 일련의 청나라궁중 및 서태후에 대한 야사저작이 항간에서 유행하고 있다. 덕령은 청나라말기의 외교관 유경(裕庚)의 딸로 만주정백기 사람이며, 모친은 프랑스인이다. 덕령은 외교관인 부친을 따라 국외에서 여러해동안 생활했고, 나중에 부친의 임기가 만료되면서 북경으로 돌아온다. 이때 서태후는 새로운 유행을 쫓아서, 자주 외국사절의 부인들과 자리를 가졌다. 덕령은 외국어에도 능하고 서방의 예의에도 밝아서, 서태후가 곁에 두고 통역으로 썼다. 그러다보니 궁중의 총아로 떠오른다.

 

덕령의 저술 중에서 <노불야>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은 서태후에 관한 숨은 이야기들을 담았다. 처음에는 영어로 썼는데, 미국인들의 엽기심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영합한 측면이 있다. 나중에 중국어로 번역되어, <어원난형기>라고 이름붙인다. 이 책에서 덕령은 첫부분에 아주 눈길을 끄는 제목을 붙인다: “화원 속의 한 쌍의 연인여기의 한 쌍의 연인은 바로 서태후와 영록을 말한다.

 

<어원난형기>에서는 이렇게 묘사한다: “그는 그녀의 섬섬옥수를 잡았다. 이 두 사람은 그림 속의 사람들과 같았다. 난꾸냥(서태후)은 분홍색의 옷을 입었고, 영록은 화려한 금의군통령의 군복을 입었다. 서로 누가 아름다운지를 겨루는 것같았다. 이때는 그들 둘 뿐이었다. 이것은 완전히 당시의 예의범절에 어긋난 행동이다. 만주인인 꾸냥은 단독으로 공자와 만나서는 안된다. 그녀가 몰래 그와 만나고, 그로 하여금 그녀의 손을 잡게 하고, 그를 향해서 사랑스러운 미소를 보내는 것은 모두 예의에 어긋난다. 그러나, 난꾸냥은 왔다. 그리고 건장한 영록으로 하여금 그녀의 손을 잡게 했다. 더 이상 꽉 쥘 수 없을 정도로. 그리고 둘은 서로의 눈을 사랑을 가득담고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한 쌍의 연인은 궁중에서 돌연 날아든 성지로 인하여 헤어지게 된다.

 

최고의 권위를 나타내는 노란색종이에 쓴 성지를 받고서, 난꾸냥은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고, 눈에서는 눈물을 흘렸다. 오매불망 잊지 못하는 것은 화원에서 밀회를 즐겼던 연인 영록이다. 궁중에 들어간 순간, 그녀가 뒤돌아보는 눈에서는 평생 잊기 힘든 유원(幽怨)이 담겨 있었다.

 

덕령의 이 <어원난형기>를 발단으로 하여 서태후와 영록간의 사랑이야기는 삼월에 미친듯이 자라오르는 들풀처럼 사방에서 만연했다. 각종 버전의 서태후애정이야기가 나오고, 항간에서 유행하게 된다. 심지어 정식 역사가들조차 그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한 두가지 사랑이야기를 쓰곤 했다.

 

고양은 그의 거작 <자희전전>에서 서태후와 영록을 언급한다.

 

고양의 붓끝에서, 이 사랑이야기는 더욱 기이하게 변모한다. 여러해전, 서태후는 큰 병을 앓은 적이 있다. 어의가 진맥을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조정에서 조서를 내려 각 성의 명의를 추천받는다. 증국번과 이홍장은 당시에 가장 권세가 있던 대신들이다. 이들이 각각 명의를 추천하는데 왕수정(汪守正)과 설복진(薛福辰)이다. , 설 두 명의는 진맥을 한 후에 서태후가 앓는 병이 골증(骨蒸)’이라고 진단하고, 한동안 치료를 해서, 병세는 호전된다. 역대의 법도에 따르면, 황제와 황후태후가 병이 드는 경우, 모든 진맥자료와 약방은 내주사로 보내어지고, 대신들이 살펴보게 된다. 대신들이 약방을 보고 난 후에 대경실색을 했다. 서태후가 앓고 있던 것은 골증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병, 소산혈붕(小産血崩, 유산으로 인한 대량실혈)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서태후가 무측천이라면 누가 연화육랑인가? 대신들은 사방에 알아보았고, 추리했다. 마지막으로 얻은 결론은 바로 영준한 영록에게 혐의가 가장 크다는 것이었다.

 

영록이 과연 서태후의 애인이었을까? 이것은 의문이다. 그러나 영록이 서태후의 충신이라는 것은 아무런 의문의 여지가 없다.

 

영록(1836-1903)의 자는 중화이고 호는 약원이다. 과얼자씨로 만주 정백기 사람이다. 그는 청나라조정에서 함풍, 동치, 광서의 세 황제를 모셨고, 청나라말기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마지막황제인 부의는 영록의 외손자이다. 부의의 회고에 따르면, “나의 외조부인 영록은 과얼자씨로 만주정백기 사람이다. 함풍연간에 호부은고원외랑을 지냈는데, 부정부패로 숙순에게 거의 죽을 뻔했다. 그가 무슨 방법을 써서 이 위기를 벗어났는지는 모르겠다. 그리도 다시 돈을 써서 후보도원의 관직을 얻었다.” 동치초년, 순친왕 혁현(부의의 조부)은 황궁에 신기영을 설피하는데, 영록은 군영에서 자리를 차지하여, 익장과 총병이 된다. 여러 번 승진을 거쳐 대학사 문상의 추천으로 공부시랑의 관직을 받는다, 나중에 내무부대신까지 된다. 광서초년, 공부상서로 승진하여 정부의 고관이 된다.

 

승진이 순조로울 때, 영록은 다시 한번 위기를 맞는다. 누군가가 그를 부정부패로 고발한 것이다. 영록은 다시 한번 삭탈관직되어 북경에서 쫓겨난다. 관직에서 두 번이나 강등을 당했던 것이다. 이는 모두 돈문제였다. 영록은 이에 대하여 고민하다가 냉정하게 생각한 후 결정을 내린다: 관직에 계속 있으려면, 절대로 돈문제를 잘못 처리해서는 안되겠다. 그후 영록은 다시는 전철을 밟지 않는다. 돈으로 사람을 끌어내리는데 능숙했던 원세개도 경친왕 혁광을 뇌물로 매수했다는 것으로 한동안 시끄러웠지만, 원세개의 직속상관인 영록이 원세개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얘기는 터져나오지 않았다. 영록처럼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 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를 보면, 한 사람이 정치적인 욕심이 다른 탐욕을 모두 이겨버려야, 비로소 관료사회에서 성공을 거두게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두번 잘못을 범하면서 영록은 학비를 낸 셈이다. 그후 영록은 한걸음 한걸음 전진하며 새로이 상층권력핵심부로 다가간다. 청일전쟁이 나는 해에 공친왕 혁흔이 군무로 외출나가고 영록이 북경으로 가서 서태후에게 생일축하를 하는 기회에, 공친왕의 뒷발을 잡아 혁현의 칭찬을 듣는다. 얼마후 그는 공부상서로 승진한다. 여러해동안의 노력을 거쳐, 영록은 정치적으로 이전보다 성숙해진다. 더 이상 자잘한 이익을 탐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돈으로 사람을 무너뜨릴 줄도 알았다. 그는 한 가지 이치를 깨달은 것이다: 관료사회에서 돈을 많이 뿌리면 뿌릴수록 얻는 것이 더욱 많아진다.

 

서태후의 주변에서 총애를 받는 환관 이연영은 영록이 돈을 뿌리는 주요목표중 하나였다. 이연영과의 관계를 이용하여, 영록은 다시 한번 서태후에 접근한다. 그리고 다시 서태후의 호감을 산다. 부의는 <나의 전반생>에서 이런 일을 적은 바 있다: 영록이 북경으로 돌아온 다음 해, 임무를 하나 맡는데, 명을 받아 서태후능침공사의 손괴상황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이 공사는 일찍이 다른 대신이 조사한 적이 있는데, 수선비로 은자 30만냥이 든다고 보고했던 건이다. 공사는 원래 순친왕 혁현이 생전에 감독하여 만든 것이다. 이 대신은 공사품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여, 손괴상황이 그다지 심각하지 않다고 보고, 은자 30만냥이면 가능하다고 보고했던 것이다. 영록이 이 일을 맡은 후, 손괴상황을 몇배로 부풀렸다. 수선비로 150만냥이 든다고 보고한 것이다. 영록이 전설상의 서태후의 첫 애인이기 때문인지, 서태후의 마음을 잘 읽었다. 그는 여기서 서태후의 순친왕에 대한 약간의 의심하는 태도를 읽어내고, 150만냥의 금액을 내놓은 것이다. 이는 능침공사의 품질이 좋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므로 순친왕이 힘을 다하여 능침공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은근히 공격하는 것이다. 서태후에게 있어서 순친왕의 충성도는 크게 감쇄된다. 그 외에 수선비를 높게 보고하자, 서태후의 자존심도 크게 만족시켜준다. 과연 영록의 이러한 조치는 서태후의 환심을 산다. 그녀는 이전에 조사했던 대신들을 혼내고, 영록에게는 큰 상을 내렸다.

 

영록이 진정으로 총애를 받게 된 것은 무술정변 이후이다. 황제당과 태후당의 생사를 건 다툼이 벌어질 때, 그는 굳건히 서태후의 편에 섰다. 그가 소문에서처럼 서태후와 애매한 관계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가 정백기의 일원이라는 것만으로도 서태후의 편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영록의 신분은 직예총독 겸 북양대신이었다. 청나라조정의 실권파이다. 그가 보호해주면 서태후는 난관을 돌파할 수 있었다. 청나라조정이라는 배는 다시 한번 출항하여 암초가 가득한 바다를 지나야 했다. 서태후는 금방 지나왔던 험악한 바다를 되돌아보면서, 영록에게 그지없는 감격을 느꼈을 것이다.

 

경자년의 귄비의 난(의화단의 난)때 의화단을 탄압할 것인지 지원할 것인지는 서태후에게 던져진 난제였다. 재의, 강의등 완고파들은 지원을 주장했다. 먼저 의화단을 이용하여 황제폐립에 간섭하려는 서양인들을 쫓아내고 보자는 것이다. 병부상서 서용의, 호부상서 입산, 내각학사 연원등은 탄압을 주장했다. 의화단을 이용하여 서양인에 대항하는 것은 큰 화를 불러올 것이라는 것이다. 서태후가 결정을 못내리고 있을 때, 확인되지 않은 긴급정보 때문에 서태후는 결심을 굳히게 된다. 이 정보는 서양인들이 각지에서 폭력행사를 하는 것을 서태후에게 광서제에게 권력을 돌려주라는 신호로 받아들인 것이다. 서태후는 대노하여 적시 의화단을 선무(宣撫)하여 동교민항의 외국대사관으로 진격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결심을 표시하기 위하여, 서태후는 탄압을 주장하던 서용의, 입산, 연원등의 목을 자른다. 나중에 동교민항에 대한 공격이 실패하고, 대고포대와 천진성이 차례로 함락되고, 팔국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하자, 서태후는 양궁의 사람을 데리고 서쪽으로 도망친다. 서안까지 가서 화를 피한다. 그리고 서양인들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를 나타내기 위하여, 서태후는 원래 지원을 주장했던 재의, 강의등 대신들을 죽이도록 명령한다.

 

이 황당한 정치게임에서, 영록은 노련한 태도를 보인다. 그는 관료로서의 기교를 충분히 드러낸다. 그의 외손자인 부의는 이번 정치게임을 이렇게 평가했다: “이번 비구름을 몰아오는 대변혁에서, 영록은 자신이 그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도록 최대한 애를 썼다. 그는 서태후의 뜻에 따라서만 행동했다. 서태후의 뜻을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동시에 그는 서태후에게 퇴로를 마련해주었다. 그는 의지를 받들어 군대를 보내 동교민항을 공격하도록 하면서, 군대에 포탄을 배급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암중으로 외국병영에는 과일을 보내주어 위문했다.”

 

청나라조정이 서양인들과의 담판에 실패하자, 영록은 한가지 원칙을 세운다: 서태후의 책임을 추궁하지 않고, 서태후로 하여금 광서제에게 권력을 넘기라고만 하지 않는다면, 모든 조건을 받아들인다. 이렇게 하여, 배상금과 이자가 근 10억냥에 이르고, 외국군대가 북경성에 진주하도록 허용하는 신축조약에 서명하게 되는 것이다. <청사고>에 따르면, 영록이 이 일을 처리하고 서안으로 갔는데, “총애와 선물을 더욱 많이 받았다. 황마괘, 쌍안화령, 자소를 받았고, 어가를 모시고 북경으로 돌아왔다. 태자태보를 받고, 문화전대학사가 된다.”

 

영록의 일생을 되돌아보면, 그는 청왕조에 충성한 일생이었다. 더욱 정확히 말한다면 서태후에 충성한 일생이었다. 그는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하여, 애인이 아닌 충신으로 남았다. 두번이나 낙마했다가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풍운이 변화하는 청나라말기의 정계에서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