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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서태후)

서태후가 47년간이나 중국을 통치한 원인은?

by 중은우시 2012. 6. 6.

글: 왕개새(王開璽)

 

1861년 11월, 서태후가 공친왕 혁흔과 연합하여 신유정변을 일으킨 때로부터 3번의 수렴청정을 거쳐 1908년 사망할 때까지, 서태후는 중국을 47년간이나 통치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것은 서태후가 정치권모술수에 능하여, 음험하고 독랄한 독특한 정치수완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기실 이런 것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근본적인 정치원인도 아니다. 청나라말기에 황위계승자가 없었고, 서태후는 특수한 정치적 신분을 지녔고, 특히 서태후가 나라씨가족과 아이신줴뤄가족간의 정치관계를 잘 처리했기 때문에, 그녀는 오랫동안 통치할 수 있었다. 이것이 근본원인이다.

 

황위후계자가 없는 위기

 

서태후가 청나라조정의 최고권력을 수십년이나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먼저 청나라황제후계자가 없었다는 객관적 원인때문이다.

 

청왕조는 천명한 누르하치부터 선통제 부의까지, 모두 12명의 황제이다. 이 12명 황제의 자녀의 다과를 보면, 대청왕조의 흥망성쇠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도광제 및 그 이전의 7명의 황제는 자식이 가장 적었던 옹정제와 가경제도 14명의 자녀를 두었다; '다자옹(多子翁)'이라 불리웠던 강희제는 55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런데, 함풍제에 이르러서는 일생동안 2남1녀만 두었고, 동치제, 광서제, 선통제는 평생동안 자녀 1명도 없었다. 이것은 도광이전에은 각 황제들이 후계자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선택의 폭이 넓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함풍제때부터 3명의 황제는 자식이 적거나 없어서,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황위계승자가 없는 위기가 도래한 것이다.

 

청나라의 마지막 몇몇 황제는 수명이 짧았다. 이것도 위기를 심화시켰다. 도광제 이전의 각 황제는 순치제가 특수한 상황으로 24살까지밖에 살지 못한 것을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모두 5,6십세까지는 살았고, 심지어 8,9십세까지 산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동치제는 19살, 함풍제, 광서제는 수명이 비교적 길었지만 모두 삼십여세를 넘기지 못했다.

 

만일 청나라황제의 수명이 비교적 길면, 아들이 황위를 승계할 때 일반적으로 이미 성인이 되어 있게 된다. 이것은 최소한 연령측면에서 새로운 황제가 즉위한 후 독자적으로 정무를 처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황위와 황권이 순조롭게 승계되는 것이다. 그러나, 황제의 수명이 너무 짧으면, 그 후계자의 연령이 비교적 어리게 되고, 정치지식이나 준비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혹은 판단능력마저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즉위하게 된다. 이런 상황하에서, 새로 즉위한 어린 황제는 조정중신의 힘을 빌리거나, 심복 환관에 의존하거나, 혹은 자신의 모후에 의존해야 한다. 일정기간 황위와 황권의 분리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권신의 독단이나 모후외척의 전횡같은 류의 상황을 불러오는 것이다.

 

도광제이후 각 황제의 수명이 짧고, 후손이 별로 없다보니 대청황통의 위기가 초래된다. 청나라말기의 어사인 호사경은 광서제의 사후에 승계할 자식이 없는 것을 얘기할 때 이렇게 말했다: "국통이 다시 끊어지고, 집안에 아들이 없다. 식자들은 일찌기 혼란이 올 것이라고 알아차렸다." 그가 말한 것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 서태후가 수십년간이나 정치에 간여할 수 있었던 것은 청나라말기의 3명의 황제 특히 그녀의 아들 동치제와 즉위할 때 나이가 너무 어렸다는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특수한 정치신분과 지위

 

서태후가 청나라조정의 최고권력을 수십년간이나 장악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고심막측한 정치재능과 수단을 지니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고, 특수한 정치신분과 지위에 의지하였기 때문이다.

 

함풍제의 사후, 청나라조정내부에서 실행한 것은 비록 "(태후)수렴청정, (팔대신)보정을 겸하는" 권력 매커니즘이었고, 표면적으로는 서태후와 숙순등 팔대신의 권력은 서로 비슷했지만, 실제로 서태후는 신황제의 생모라는 더욱 유리한 지위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팔대신과의 정치투쟁에서 패배하지 않을 수 있었다. 조정의 일부 대신들도 "자고이래로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고, 백성에게 두 명의 군주가 있을 수 없다"는 정치이념을 가지고, 대부분은 양궁태후야말로 황권의 진정한 대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후 혁흔은 여러번 좌천되고 타격을 받는다. 서태후는 마찬가지로 이런 정통황권대표자의 정치적 우세를 잘 이용했다. 신유정변이후, 혁흔은 스스로 공로를 내세워 어떤 때는 사람을 기용하고 업무를 처리하는 측면에서 "태후와 상의하지 않고...모두 자신의 뜻대로....독단적으로 실행했다" 서태후는 그에게 화를 내며 말한 바 있다: "너는 일마다 나를 힘들게 하는구나. 너의 직위를 박탈하겠다." 그러나, 혁흔은 서태후를 그다지 안중에 두지 않았다. 고집스럽고 전혀 신경쓰지 안흔다는 듯이 들이박았다: "신은 선황의 여섯째 아들입니다. 당신이 나의 직위를 박탈할 수는 있어도, 황자의 지위는 박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1865년 3월말, 서태후는 황태후의 특수지위와 군신간의 상하존비의 정치윤리를 이용하여 기군망상(欺君罔上)의 죄명으로 혁흔의 직위를 박탈한다. 나중에 그녀는 황태후의 특수정치신분을 이용하여 공친왕의 작위와 직위를 다시 내린다. 이렇게 하여 혁흔은 황자, 친왕의 입장을 취하지 못하고, 신하로서 철저히 굴복하게 된다.

 

2천년간의 봉건시대를 거치면서, "군위신강"등 충군사상이 이미 뿌리깊이 박혀 있었다. 당시의 대청제국을 돌아보면, 황제는 유약하고, 공친왕 혁흔 순친왕 혁현과 같은 귀족들은 아직 서태후와 다툴 수가 없었다. 누가 감히 서태후와 고하를 따지고 존비를 논할 것인가?

 

양대가족의 정치관계를 잘 처리하다

 

외척전횡과 황권독립을 유지하는 것은 물과 불같이 서로 섞일 수 없는 모순이다. 서태후는 나라씨가족과 아이신줴뤄가족의 정치관계를 잘 처리했다. 이것도 그가 청나라최고권력을 수십년간이나 장악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이다. 만일 서태후를 당나라때의 무측천과 비교하면, 이에 대하여 아주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무측천은 먼저 "수렴청정을 하면서 정사는 크고 작은 일을 모조리 들었다" 나중에 정식으로 등극하고 황제를 칭한다. 무씨칠묘(武氏七廟)를 만들었을 뿐아니라, 자신의 오대조까지 모두 황제로 추존한다. 그리고 무씨형제자매를 대거 발탁기용하여 조정내외의 군정대권을 장악한다. 그리고 당나라황실의 이씨 황자, 황손을 죽였다. 이는 이씨가족의 전면적인 반항을 불러왔을 뿐아니라, 여러 당나라중신과 구신들의 강렬한 불만과 반대에 부닥친다.

 

서태후가 청나라조정의 최고권력을 수십년간 장악한 것을 돌아보면, 그녀는 아이신줴뤄가족과 나라씨가족의 관계처리에서 무측천이 훨씬 온건하고 타당하게 처리했다. 조야상하에서 아무도 서태후가 아이신줴뤄가족에 불충한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근본원인은 그녀가 두 가지 문제를 잘 처리하고 적절히 장악했기 때문이다.

 

첫째, 나라씨가족들이 두드러진 중요한 관직을 맡지 않았다. 신유정변후, 서태후의 큰동생 조상(照祥)은 여전히 삼등승은공이었고, 그녀의 부친 혜정, 조부 경서, 증조부 길랑아는 삼등승은공에 추봉된다. 이상의 작위는 모두 청나라조정이 황후 혹은 황태후가족에게 내리는 관례적인 작위이다. 법도를 넘은 특례는 아니었다. 둘째동생 계상(桂祥)은 1888년에 삼등승은공에 봉해졌는데, 이는 그의 딸이 광서제의 황후로 뽑혔으므로, 여전히 외척에게 작위를 내리는 관례에 따른 것이고, 서태후의 개인의지가 반영된 것은 아니다. 서태후가 동생들에게 청나라조정의 실권을 장악할 중임을 맡기지 않은 것은, 동생들의 재능이 부족했던 것 이외에, 서태후가 아이신줴뤄가족과 나라씨가족관계를 특별히 신경썼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공격할 구실을 주지 않으려 한 것이다.

 

서태후는 죽기 전에, 유명으로 순친왕 재풍의 아들 부의로 하여금 황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동시에 명을 내려, "승계후, 군국정사는 모두 섭정왕이 결정한다. 중대사건을 만나서, 반드시 황태후(즉 그녀의 조카딸인 융유태후)의 의지가 필요하면, 섭정왕이 언제든지 대면해서 명을 받아 시행한다." 그녀는 융유태후가 직접 수렴청정하도록 안배하지 않았다. 그녀로 하여금 막후에 물러나 있도록 했다. 서태후의 이런 안배는 개인의 득실과 사견에서 나온 것이지만, 동시에 청나라최고권력을 아이신줴뤄가족에 반환한다는 고려도 한 것이다.

 

둘째, 서태후가 정한 두 명의 어린 황제인 광서제 재첨과 선통제 부의는 모두 아이신줴뤄가족혈통중 가장 황제와 혈통이 가장 가까운 친왕이 후손들이다. 그녀가 독단적으로 전횡하여 황실친왕과 다른 조정신하들의 불만은 불러왔지만, 아무도 서태후가 아이신줴뤄가족에 불충하거나 위협이 된다고 의심하지는 않았다. 서태후가 여러번 어린황제를 세운 것이나 그녀가 공친왕 혁흔, 순친왕 혁현등과 모순과 투쟁이 있었지만, 모두 사람들은 청나라조정내부의 권력투쟁으로 이해했고, 가족내부간의 형수와 시동생 사이의 집안싸움으로 인식했다.

 

이상을 종합하면, 서태후의 주관적인 의도가 어떠하든지 간에, 객관적으로 그녀는 확실히 성공적으로 사람들이 그녀를 아이신줴뤄에 충성한다고 인식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그녀가 순조롭게 청왕조의 최고권력을 수십년간이나 장악할 수 있었던 중요한 원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