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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사상

남천참묘(南泉斬猫): 당나라때 유명한 선종(禪宗)의 공안(公案)

by 중은우시 2013. 3. 14.

글: 해외습패(海外拾貝) 

 

 

 

역사기록에 따르면, 중국의 선종에는 아주 유명한 공안이 2개 있다. 하나는 남천참묘이고 다른 하나는 조주정리(趙州頂履)이다. 둘은 모두 당나라때 남천산 보원사(普願寺)에서 득도한 고승들의 이야기이다. 개략적인 이야기는 이렇다. 하루는 남천선사가 동,서 양당의 제자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보게 된다. 원래 고양이 한마리를 두고 다툰 것이었다. 남천은 걸어가서 고양이를 내놓으라고 했다. 동시에, 계도(戒刀)를 고양이의 목에 대고 말했다: "너희는 말해봐라. 왜 이 고양이를 가지고 다투느냐. 만일 이치에 맞게 얘기하면 고양이의 목숨을 구해줄 것이다. 만일 이치를 말하지 못하면, 고양이를 죽여버리겠다." 양당의 제자들은 그 말을 듣고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출가인은 애완동물을 기를 수 없다는 것을. 더더구나 애완동물을 두고 다퉈서는 안된다는 것을. 남천의 물음에 양당의 제자들은 어떻게 대답해야할지를 몰랐다. 그래서 남천은 고양이를 죽여버린다. 그날 오후, 남천의 뛰어난 제자인 조주가 절로 돌아왔다. 스승이 고양이를 죽인 것을 알고는 두 말도 하지 않고 즉시 짚신을 벗었다. 그리고 짚신을 머리 위에 올리고 떠나갔다. 남천은 조주가 떠나는 뒷그림자를 보고, 찬탄하며 말한다: "조주가 있었더라면, 이 고양이는 죽지 않았을 것인데..." 그래서, 이 남찬참묘와 조조정리의 당나라 선종의 공안은 선학계와 사학계의 문인아사들이 주목을 끌게 된다. 남천은 왜 고양이를 죽였는가? 조주는 왜 짚신을 머리에 이었는가? 아래에 언급하는 천년의 사평(史評) 중에서 우리는 고인들이 위의 두 선종의 수수께끼에 대하여 어떻게 사고했는지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송나라때의 설두(雪竇)는 시를 지었다: 양당구시두선화(兩堂俱是杜禪和), 발동연진막내하(撥動煙塵莫奈何). 행득남천거득령(幸得南泉擧得令), 일도양단참편파(一刀兩斷斬偏頗).

 

원나라때의 행수(行秀)는 말했다: 만일 고양이를 죽이기 전에 한 사람이라도 남천을 말렸더라면 고양이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죽은 쥐새끼같은 양당의 제자들은 중요할 때 가만히 있었고, 남천은 이미 고양이를 죽이겠다고 일을 벌여서 부득이 고양이를 죽일 수 밖에 없었다.

 

명나라때 백은(白隱)은 이렇게 말했다: 일도양단은 타당하지 않다. 당연히 일도일단(一刀一斷, 가짜죽음)이어야 했다. 조주가 짚신을 머리에 인 것은 바로 선사의 초탈이다.

 

요나라때가 되어서, 어떤 사람은 남천이 살생의 업을 저질렀다고 질책한다.

 

청나라때 계련(契蓮)은 "참묘기용수능위(斬猫機用誰能委), 초리나래비력다(草履拿來費力多), 지향저두서일소(只向低頭舒一笑), 임타기량우소마(任他伎倆又消磨)."라고 하여 고양이를 다투는제 집착하는 여러 스님들에게 본말이 전도되었다고 조롱하였다. 양당의 제자들은 각자 자신의 고집만 피우기때문에 살계를 여는 것만이 그들이 잘못을 확연히 깨닫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근대학자는 이렇게 해석했다: 신발과 고양이는 마찬가지로 인류욕망의 속죄양이다. 고양이는 무고하다. 사물의 존재는 그 자신의 존재이유가 있다. 모든 것은 인류가 스스로 번뇌에 빠진 것이다. 제자인 조주는 남천참묘가 이미 살계를 범했다는 것을 알았다. 다른 사람에 가르침을 주기 위하여 스스로 자신의 수행을 깨트렸다. 이는 내가 지옥에 들어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들어가랴는 당당함이다. 조주정리는 짚신을 모자 삼아서, 여러 스님들이 고양이를 다투는 것을 공격할 뿐아니라, 남천의 살생도 공격했다. 의문의 여지없이 순간적인 분노에 빠진 남천과 싸움을 그치지 않던 여러 스님들은 모두 본말이 전도되었다는 것이다.

 

이상의 당나라때 선종 공안은 이미 1천여년간 다투어져 왔다. 21세기의 인터넷시대에 이르러, 천년간의 논쟁은 거의 컨센서스를 이룬 것같다. 여러 스님들이 고양이를 빼앗으려 한 것도 본말이 전도된 것이고, 남천이 파계한 것도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그래서 조주가 신발을 머리에 인 것은 바로 그 수수께끼를 푼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인터넷상의 '컨센서스'를 살펴보면, 또한 다른 사실도 발견할 수 있다. 밝혀낸 것은 두 개의 수수께끼의 실질이 아니라, 두 개의 수수께끼의 표상이다. 그렇다면 두 개의 수수께끼의 실질은 도대체 무엇일까?

 

사천성 청성산의 한 은거도사는 이렇게 말한다: "생명은 중생들에게 모두 평등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는 것은 생명에 대한 살해라고 봐야 한다. 인류는 고양이를 사랑하고, 쥐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것은 쥐가 인류의 양식을 먹기 때문이고, 인류의 기득이익을 해치기 때문이다.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는 것은 인류의 기득이익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래서 쥐는 적이 되는 것이고, 고양이는 영웅이 되는 것이다. 만일 중생이 모두 평등하다는 각도에서 보자면, 고양이는 더 이상 영웅이 아니고, 흉수이다. 그러므로, 흉수 하나를 죽여서 여러 생명을 구하는 것이라면, 고양이를 죽인 것은 당연히 선행이 되어야 한다. 인류사회에서의 습관은 "흉수를 영웅으로 받든다"는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남천은 일찌감치 이를 갈파하고, 양당제자가 고양이를 두고 다툴 때, 고양이를 죽임으로서 흉수를 제거한것이고, 이는 다시 한번 중생이 평등하다는 이념을 널리 펼친 것이다.

 

남천의 제자인 조주는 스승이 고양이를 죽인 뜻을 알았다. 스승이 참혹한 조치로 세상사람들에게 경고 하려는 것을 알았다: 사물을 볼 때 자신의 기득이익에 의거하여 방향을 정하지 말라. 고양이가 쥐를 잡는 것에 감사할 뿐, 고양이가 살생한 것은 묻지를 말라. 남천이 고양이를 죽인 것과 조주가 짚신을 머리에 인 것은 우리에게 이렇게 알려준다: 고양이모습, 신발모습 이것은 모두 가짜모습이다. 그러나, 인류의 세속편견은 사람들로 하여금 남천참묘와 조주정리의 본뜻을 보기 어렵게 만든다.

 

중국선송사상의 유명한 선사들을 보면, 세속의 편견을 깨트릴 수 있다. 남천, 조주를 제외하면 얼마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남천참묘와 조주정리를  "남천거일(南泉擧一), 조주반삼(趙州反三)"이라고 한 학자들은 조주가 그의 스승 남천보다 오성(悟性)이 있다고 생각하며, 짚신을 머리에 인 행동을 '청출어람승어람"이라고 본다. 이런 것은 모두 공안의 실질을 보지 못한 것이다. 인터넷에는 고수들도 '고양이가 살생했따'는 것이 '중생평등'을 부정한 것이라는 거을 깨닫지 못했다. 기실, 조주화상은 남천보다 고명하지 않다. 그러나 고양이를 죽인 선의를 본말이 전도된 하나의 자태일 뿐이라고 본다면, 진정으로 중생평등사상을 널리 펼칠 수 있고, 기득이익을 감히 공격함으로써 시비곡직의 누습을 타파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일반삼의 조주도 아니고, 감히 일을 벌이는 남천도 아니다.

 

남천이 고양이를 죽인 후 천여년동안, "고양이는 쥐를 잡는 영웅" 및 "쥐는 인류의 적"이라는 개념이 현실에서 변화했다. 인류문명과 과학기술이 진보하면서, 고양이는 인류의 애완동물이 되고, 먹는 양식(고양이음식)은 더 이상 쥐가 아니게 되었다. 쥐는 이미 인류의 근친이 되어, 인류의 모든 약물효과를 검증하는 첫번째 지원자가 되었다. 다만 인류는 기득이익을 가지고 시비곡직을 판단하는 습속을 여전히 버리지 못했다. 당금사회에서 기득이익을 가지고 시비곡직을 판단하는 현상은 수두룩하게 많다. 고양이모습, 신발모습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그러므로, 사람들로 하여금 새롭게 사고하게 하고, 남천참묘와 조주정리의 두 공안의 선기를 깨닫게 하고, 인류사회에서 발생하는 본말이 도치된 현상을 감소시키고 저지시키는데 약간은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