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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사상

중국고대의 가치관념: 하상주(夏商周)

by 중은우시 2013. 2. 4.

 

글: 허탁운(許倬雲) 

 

중국과 유럽의 고대인류는 각자 서로 다른 선택을 했다: 중국은 정착하여 농업에 종사하는 것을 선택했고, 유럽의 고대인류는 계속 정복과 확장하는 것을 선택했다. 이 출발점에서 우리는 다시 봐야 한다. 그들은 당시의 이런 조건하에서 어떤 사회가치를 발전시켰을까?

 

하: 아마도 부락연맹이었을 것이다.

 

먼저 중국쪽을 보자.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전설은 황제(黃帝)의 전설이다. 그러나 전설의 내용은 확실히 후대에 덧붙여진 것이다. 황제의 연대는 현재로부터 오천여년이나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렇게 완비한 제도가 갖추어졌을리가 없다. 그가 발명했다고 하는 많은 사물은 그 당시에 나타난 것이 아니다.

 

나는 하우(夏禹)의 전설부터 얘기하고자 한다. 하나라의 기원에 대한 전설은 요, 순, 우 삼대의 선양(禪讓)으로부터 시작한다. 요, 순의 시간은 모두 짧고, 그다지 큰 구체적인 사적이 없다. 우(禹)의 전설은 아주 중요하다. 한 가지는 왕위의 선양이고 다른 한부분은 바로 중원치수(中原治水)의 이야기이다. 그의 아들이 승계하였으므로 소위 "조대(朝代)"의 부자승계가 나타나고 제도화된 국가조직이 있게 된다.

 

오늘날 고고학적 성과를 보면, 하남(河南)의 이리두(二里頭) 일대가 아마도 하나라사람들이 활동하던 곳일 것이다. 이곳에서, 신석기시대의 농업발전과 취락의 형태가 이미 일부 근거있는 자료에 따를 때, 이 지방에서 농업발전이 이미 어느 정도 성과를 나타내고, 취락의 규모도 상당히 컸다. 하남 동부는 바로 황하 삼각주의 선형지대의 끝부분이다. 고대 황하는 비록 '현하(懸河)'가 되지는 않았지만, 제방이 지면보다 높으므로, 황하가 지나가는 곳은 평탄한 황토지대여서 항상 범람의 문제가 있었다.

 

중국북방의 고대농업은 소미(小米) 재배였다. 너무 많은 물은 곤란했다. 홍수가 나면 소미는 한톨도 거두지 못한다. 그러므로, 대우치수의 전설 배후에 반영되는 역사는 바로 농지경작에는 반드시 도랑을 파서 물을 대는 관개시스템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소(疏)와 관(灌)의 두 가지 일은 반드시 동시에 진행해야 했다. 대우치수의 규모는 전설처럼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체 중국하천을 모두 그가 소통시켰다는 것은 과장된 전설이다. 만일 전설의 핵심으로 돌아가보면, 아마도 한 무리의 사람들, 대우와 동시대의 사람들이 업무를 나누고 협력하여 하류를 소도(疏導), 개통(開通)시키기 위하여 노력했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홍수가 범람하여 수재로 되지 않도록 하고, 농지에 물을 대려 했다. 이런 규모가 비교적 큰 수리업무는 하나의 마을, 하나의 취락에 있는 인민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게 아니다. 반드시 상류, 하류의 사람들이 함께 진행해야 한다.이런 협력은 반드시 집권전제정권이 통일적으로 조정하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당시의 수리관개시스템은 어쨌든 크지 않고 약간의 인근촌락이 협력하면 모두 관개소도의 이익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하에서 고대전설에 따르면, 대우는 일찌기 여러 국가를 소집한다. "만국"이라고 불렀다. 같이 모여서 "천하"의 일을 논의했다. "만국"과 "천하"는 모두 과장된 말이다. 아마도 대우 혹은 대우의 한 무리 사람들이 황하 중하류 부근의 수십, 백여개 취락의 주민을 모아서 모두 함께 협력해서 홍수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자고 했을 것이다. 이런 일은 당연히 상호협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상당한 정도의 조직이 필요하다. 그래야 수천명, 수만명이 업무를 나누어 할 수 있고, 이 임무를 완성할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대우는 사심없이 투입하고 일하는 동안에 세번이나 집앞을 지나면서도 집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능력있는 조수들을 끌어모았는데, 이들 인물들의 이름을 보면, 그들은 서로 다른 지역에서 왔음을 알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대우가 사망한 후, 모두 다음 지도자를 선택하는데, 그들은 원래 요, 순을 본떠서 추천의 방식으로 새로운 지도자를 선택하고자 했다. 그러나 전해지는 바로는 대우에 대한 감격에 그들은 하우의 아들을 선택하고, 이때부터 대대로 전승되는 왕국제도가 건립된다.

 

전설에 나오는 "하후(夏后)"라는 칭호는 왕이 아니고, 여러 사람의 우두머리이다. 그러므로, 이 하나라의 정치단체 혹은 사회단체는 아마도 왕국이 아닐 것이다. 많은 취락의 연맹일 것이다. 그들의 영수는 전제권력을 지닌 왕이 아니다. 전설에 ㄸ르면, 하나라 중엽에 권신이 왕위를 찬탈한 일이 벌어진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당시에는 무슨 '권신(權臣)'의 개념이 없었다. 하나라집단의 영수는 반드시 대우의 자손일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하나라가 중단되고 다른 사람이 지도자가 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이 전설을 새로 살펴보면, 우리는 아마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시에 생활의 필요에 의해 그들은 반드시 새로운 조직형태를 발전시켜야 했다. 작은 지역을 초월하는 조직을 발전시켜야 했다. 대형조직하에서 반드시 일정한 사회가치관념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협상 및 협상이후의 복종이다. 공동으로 취득한 합의를 통하여 사람들은 반드시 협력해야 했다. 장기간 협력을 통하여 수십만인민의 대지구는 상당히 견고한 새로운 단위가 되고, 촌락과 부락을 초월하여 국가의 원형이 형성된다. 원형국가가 나타나면서 공과 사의 사이에 상호대립 보완하는 두 가지 가치가 건립된다. 공과 사는 대립하지만 보완하는 관점도 있다. 하후는 영수의 위치를 지니고 있고, 전설에 따르면 전승된다. 하나의 가족이 수백년동안 영수로 지내는 것은 가족조직의 공고해서 이리 하나의 제도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상: 가족관념, 조상숭배, 지식존중의 세가지 가치관을 발전시키다.

 

상나라는 하나라의 뒤를 이어 중원의 주인이 된다. 상인은 원래 중원지구 동쪽에 있던 주변민족이었다. 아마도 그들에게 뛰어난 지도자가 있어서인지 아니면 그들이 위치한 곳이 황하동부여서 북방에서 제공하는 마필과 청동기주조능력을 가져서인지, 은상민족의 무장역량은 중원의 농경취락들보다 강대했다. 상나라가 건립한 왕국은 확실히 하나라보다 강대했다. 그러므로, 은상의 영수는 "왕"이라고 칭한다. 하후처럼 "후"라고 하지 않는다.

 

고고학적으로, 상나라때 남겨진 갑골문이 복사(卜辭)를 보면 상당히 분명한 사료를 적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상나라 전반기의 수도는 안양(安陽)에 있지 않았다. 우리는 역사를 재구성할 많은 사료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후반기의 역사를 보면 상나라는 왕실의 조상에 대하여 아주 존경했음을 알 수 있다. 상나라대의 주요임무는 모두 종교활동을 통하여 그들의 선공(先公), 선왕(先王)을 매개로 하여, 산, 하, 풍, 우같이 인간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주는 자연역량에 보우를 기도하고, 재해를 면하기를 기도했다. 선공, 선왕은 인간과 신간의 교류매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는 일종이 조상숭배이다. 조상의 사후에도 거대한 영혼의 위력을 지녔다고 믿는다. 이미 죽은 조상은 신비한 통로를 통하여, 자손의 생활에 일정한 영향을 미친다고 믿었다.

 

중국고대의 조상숭배는 사령숭배(死靈崇拜)에서 발전되어 온 것이다. 이 전환은 반드시 가족혈연에 대한 인지와 관념이 있어야 가족계통을 통하여 거꾸로 조상에게 우리의 보우를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가족개념이 존재한다는 것은 반드시 안정적인 전승이 있어야 한다. 농업촌락, 특히 수리를 장악하는 능력을 확보한 후에는 새로운 전답을 개발할 필요는 별로 없었다. 그리하여 장기적이고 안정적으로 작은 지역에 정착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안정가운데, 한 가족의 장기적인 전승도 가능했던 것이다.

 

조상숭배가 있게 되면서 전통을 숭배하는 것이 생긴다. 그리고, 종족과 혼인관계에서 퍼져나간 네트워크가 연결, 합작시시틈으로 된다. 그리하여 가족윤리와 전통존중의 두가지 관념이 수천년동안 중국인의 행위에 영향을 주는 가치관으로 된다.

 

상왕의 원시신분은 아마도 그저 신과 통하는 인간의 제사장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세속과 신성지도자의 두 가지 신분을 모두 지니게 되었다. 상왕은 반드시 축(祝), 종(宗), 복(卜), 사(史)의 전문인력에 의존하여, 신명과 조상과의 의사소통업무를 담당했다. 이런 사람들이 있어서, 고인들은 전례에 따라 일부 원칙을 정하고, 신의 뜻을 해석한다. 이것은 전문적으로 지식업무에 종사하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고 첫번째 지식분자이다. 그들의 업무는 사회대중을 위하여 여러 사람의 복지를 위하여 가장 유리한 방안을 찾아내는 것이다. 지식분자의 지위는 혹은 종교인사의 지위는 서로 다른 지역의 인류역사상 모두 있어왔다. 농업민족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상나라때의 이런 사람들은 강신(降神)에 반드시 의존할 필요는 없었고, 축적된 지식에서 계시를 얻었으므로 이러한 이성화된 성분은 다른 무당들과는 많이 달랐다. 이런 특징으로 상나라문화의 지식분자는 지식과 이성에 대한 사고를 어느 정도 존중했다.

 

상나라때의 고고학과 고대데이타를 보면, 상나라사람은 이미 3가지 가치관을 발전시켰다. 첫째는 친척조직의 중시, 둘째는 전통의 중시, 셋째는 지식에 대한 중시이다.

 

주(周): '천명(天命)'의 개념

 

기원전16세기이후, 은상의 강역은 확장되고, 왕권도 상당히 확대되었다. 상왕은 "하제(下帝)"라는 칭호가 있었는데, 하늘의 상제(上帝)와 대등한 지위를 가졌다. 이 발전은 후대 "천명"의 남상이다. 왕의 위치는 하늘과 동열이다. 서주가 흥기하면서 왕과 하늘간에는 새로운 관계가 정립된다. 왕은 천명을 받은 통치자이지 하늘이 아니라는 것이다.

 

서주는 상을 대체하여 고대의 중요한 왕조가 된다. 서주는 원래 상왕국의 서쪽에 있는 부속소국에 불과했다. 서주 자신의 역사전설에 따르면, 그들은 일찌기 "융적(戎狄)"에 속했고, 농업문화권에 속하지 않았는데 나중에 농경을 회복했다고 한다. 그들 자신의 조상인 후직(後稷)은 바로 농업의 신이다. 어쨌던 그들은 먼저 농민이었다가 나중에 목민이 되었는가? 아니면 원래 목양(牧羊)문화에서 점차 농경으로 변화해왔는가? 어쨌든 주나라사람들의 맹우인 강족(姜族)은 아마도 목양인일 것이다. 여기서는 이에 대하여 논의하지는 않겠다.

 

현재 우리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 스스로 농업민족이라고 자처하는 서쪽의 부용소국이 강대한 '대읍상(大邑商)"을 무너뜨린다는 것이다. 은상은 전성기때, 예동(豫東, 하남 동부)을 중심지로 하여 강역이 황하 중, 하류에 걸쳐 있고, 세력범위는 하북의 중부에서 장강강가, 동쪽의 산동, 강소북부에 미치고, 서쪽의 화산일대에 미쳤다. 이런 방대한 왕국은 황하, 회하 및 한수의 광대한 지역을 포함했다. 관중에 거주하는 '소방주(小邦周)"가 은상을 무너뜨리고 이를 대체하여 중국고대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필자 개인의 생각으로 그들은 무장역량에서 상당히 우세했을 것이다. 그들은 관중에서 서북의 초원과 맞닿아 있어 좋은 말을 얻을 수 있었다. 주나라사람의 무기중에서 흑색의 장검이 있다. 아마도 이미 주철(鑄鐵)지식을 획득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철기로 병기를 주조할 수 있었고, 청동과(靑銅戈)를 사용하는 상나라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찌되었건 서주의 흥성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은 특수한 지위를 지니고 있고 천신의 보우를 받는다고 깨닫게 만들었다.만일 서주가 목양문화에서 농업문화로 전환되었다면, 그들이 거주하는 곳은 확실히 목양문화의 서북초원과 아주 가깝다.그들이 목축업에서 농업으로 전환한 역사가 초원부근에서 이루어졌다면 그들은 분명히 초원문화로부터 하늘을 숭배하는 신앙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늘이 주나라사람을 돌본다. 그래서 주나라는 작은 나라이지만 상왕국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이같은 기적을 그들은설명해야했다. 왜 그들은 하늘이 선택한 대상인가? 이런 해석은 두 가지방향으로 발전했을 가능성이 있다. 첫째는 주나라사람이 선민(選民)이다. 둘째는 주왕이 새로운 왕으로 선택된 것은 천명을 받아서 신질서를 만들고 천하를 통치하는 중요업무를 맡았기 때문이다.

 

서주가 승리를 거둔 후, 이 위대한 업적에 대하여 주나라의 지도자층은 확실히 논쟁을 벌인 바 있다: 일파에서는 하늘이 주나라사람을 돌보는 것이다. 주나라사람은 이스라엘사람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상제의 선민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변론의 결과 그들이 선택한 것은 이렇다. 주왕이 하늘의 보살핌을 받고 천명을 받아 왕위를 얻었다. 그래서 주나라사람이 건립한 신질서는 "천자"가 명을 받아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다. 주왕은 천명을 받은 지도자이다. 이런 상황하에서 상왕이 스스로를 하제라고 생각하던 관념은 천명의 관념으로 변화한다.

 

주나라사람들은 반드시 해명해야 했다. 왜 전조의 통치자는 천명을 받지 못했을까? 그들은 이렇게 해석했다: 주나라의 선왕들만이 상나라보다 더욱 도덕에 부합했다; 주나라사람들은 성실하고 경건한 민족이다. 말기의 상나라귀족처럼 술을 즐기고 인명을 함부로 살상하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주나라사람은 도덕관념을 정권의 합법성에 주입시킨다. 천명은 백성을 사랑하는 왕에게 내려진다. 이 중요한 문화유전자는 국가의 지도자는 반드시 도덕적수양과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천명무상(天命無常), 유덕시친(唯德是親)"의 관념은 이때부터 중국이 국가를 조직할 때 지도자에게 기대하는 것이 된다.

 

주나라사람이 동방을 통치하면서 친척자제에게 분봉(分封)하여 사상유례없는 봉건계통을 건립한다. 제후는 주왕을 통하여 천명을 받는다. 이런 안배하에, 주나라의 권력은 "하늘" 숭배와 조상숭배가 하나로 합쳐진다. 주나라천자는 가장이며 군주이다. 종통(宗統)과 정통(政統)은 하나로 합쳐진다.

 

주나라의 제후는 각각 중요한 지방에 기지를 건립한다. 그러나 그들은 반드시 현지원주민과 원래의 지도자들과 협력해야 한다. 청동기의 명문과 역사의 문헌기록을 보면, 자주 제후를 분봉하는 지령이 기록되어 있다: 반드시 현지의 원래 풍속습관과 법렬제도를 존중하고, 반드시 현지의 지도자들과 친척관게를 맺어라. 장기간 통합되는 매커니즘에서 이 거대한 봉건네트워크는 실제로 주나라사람 자신과 현지의 지역미녹이 장기간 융합하는 매커니즘이다. 이 장기융합의 매커니즘가운데, 각지역의 지방문화는 점차 주문화에 포함된다. 그리하여 주나라사람들의 봉건은 통치매커니즘만이 아니라, 장기간의 역사상 장기간 통합된 네트워크의 특색을 지닌다. 주나라사람들이 이상으로 삼은 "왕도"는 이 사회는 반드시 다른 사람을 존중하여야 하고, 다른 사람을 용납해야만 조화와 협력이 중시되는 새로운 질서를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고학적으로 보면, 계속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주나라때의 봉국유적지의 고고자료에서도 여러민족이 융합된 현상을 많이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하, 상, 주의 삼대는 중국문화시스템이 일련의 사회가치관념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반영한다. 이들 사회가치관념은 중국문화전통에서 천년이상 남아있다. 그후 중국의 역대왕조는 모두 천자의 명호를 사용했고, "봉천승운(奉天承運)"이라고 말했다. 중국은 또한 스스로를 천하라고 여기고 열국의 하나라고 여기지 않았다. 나중에 일부 사상가, 공자, 노자등을 거쳐, 이들 중요한 사회관념은 중국사상계통으로 정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