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한)

노관(盧綰): 유방의 가장 친한 친구인 그는 왜 배신하는가

중은우시 2013. 2. 4. 19:07

글: 진사황(秦四晃) 

 

깡패 유방이 일개 포의에서 천하를 가진 황제가 되기까지, 그 자신의 다모선단(多謀善斷)이외에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은 그가 창업한 때부터 시작하여 여러 사람들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후세에 서한을 얘기할 때면, 반드시 "한초삼걸(漢初三傑)" - 소하, 장량, 한신을 얘기한다. 기실 유방의 황제꿈을 도와준 사람은 이 세 사람만이 아니다. 조참, 주발, 번쾌, 하후영등등이 모두 일찌감치 유방을 따라다니며 유방이 하라는대로 했던 그의 심복부하들이다. 이들은 모두 한나라의 건립에 큰 공로를 세운다. 한고조 유방과의 교분도 소하, 장량, 한신의 세 사람보다 못하지 않다. 유방의 성공은 시정에서 하는 "일개호한삼개방(一個好漢三個幇)"을 가장 잘 입증한다.

 

유방의 곁에 모여있던 여러 사람들 중에서 정말 개인적인 교분으로 따져서 가장 뿌리가 깊고, 가장 신뢰하고, 가장 잘지내던 사람을 꼽으라면 노관이다. 이 두 사람의 교분은 다른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이다.

 

첫째는 동향(同鄕)이다. 노관과 유방의 두 집은 모두 한 마을이다. 패현 풍읍 중양리 김류채촌이다. 말그대로 고향사람이다. 비록 넓은 의미에서 말하자면, 주발, 번쾌도 한고조와 같은 패현이지만, 노관과 비교하면 그래도 거리가 있다.

 

둘째는 동령(同齡)이다. 노관과 유방은 같은 마을에서 태어났을 뿐아니라, 두 사람은 신기하게도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 출생했다. 하나의 마을에서 같은 날 두 사내아이가 태어난 것이다. 그리하여 전체 마을 사람들이 기뻐했다. "마을에서는 양과 술을 들고 두 집을 찾아가서 축하했다"(사기.한신노관열전)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마을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는 와중에 태어난 두 사내아이의 운명은 자연히 하나로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셋째는 동학(同學)이다. "고조(유방)와 노관이 자라자 모두 글을 공부했고, 서로 아꼈다."(사기. 한신노관열정).두 사람은 글을 읽을 나이가 되자 같이 손을 잡고 현지의 마공서원에서 공부한다. 학당을 오가면서 두 사람은 계속 붙어다녔고 아주 잘 지냈다. 고향사람들은 같은 나이의 두 사내아이가 자라서도 서로 잘 지내는 것을 보고는 다시 두 집안에 양과 술을 들고가서 축하해주었다.

 

넷째는 동지(同志)이다. 이 둘은 어려서부터 마음이 잘 맞았다. 둘 다 공부는 싫어하고 장난을 좋아했으며 서당에서 도망쳐 사건을 일으키곤 했다. "고조가 포의로 있을 때, 싸움을 한 일로 관청에서 찾아서 도망다닌 적이 있는데, 노관이 항상 같이 따라다녔다." 그리고 "고조가 패에서 의거를 일으킬 때, 노관이 따랐다."(사기. 한신노관열전).

 

두 사람은 천연적인 고향관계에 어려서 아침저녁으로 함께하고 서로 돕고 아꼈다. 노관은 유방에 있어서 나중에 참가한 많은 문신무장들이 따라오기 힘든 개인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바로 이런 원인으로 유방이 창업하고 강산을 얻을 때까지 노관을 아주 가까이 두고, 특별히 신임하고 특별히 은총을 내린다.

 

"한중에 들어가서 장군, 상시중이 된다"(사기. 한신노관열전). 유방이 한왕이 되어 한중에 들어가자 노관을 장군에 임명한다. 노관의 이 장군은 일반적인 장군이 아니다. 그의 직책은 유방의 인신안전을 보호하하는 것이다. 즉, 근시(近侍)이고, 보표의 두목이다. 우리는 한신이 유방에게 의탁한 후, 한중에서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비로소 양초를 관장하는 치속도위가 된 것을 알고 있다. 한신은 중용받지 못하여 도망온 것이었다. 소하가 쫓아가서 붙잡고 유방에게 재삼 말하여 유방이 비로소 "나는 그대를 장군으로 삼겠다"고 한다. 소하의 체면을 보아서 한신에게 장군직을 준 것이다. 군사재능으로 보자면 노관은 한신과 비교할 수 없다. 그러나 직위직책의 대우로 보면 가깝고 먼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관료사회에서 친소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헛소리이다.

 

"동으로 항적(항우)를 칠 때, 태위의 직위를 가지고 쫓았다. 침실내를 출입하고, 평상시에 유방의 의복 침구 음식을 하사받았으니 다른 신하들이 감히 바라지 못하는 것이었다. 비록 소하 조참등이라 하더라도 유방은 공적으로 만났다. 개인적인 친분으로 말하면 노관에 미치지 못했다."(사기. 한신노관열전). 이 말을 유방이 노관을 어떻게 특별하게 대우했는지를 잘 말해준다. 초한전쟁때 노관의 직위는 이미 태위였다. 그러나 구체적인 직무는 여전히 유방이 경위업무였고, 그만이 유방의 침실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평상시에는 유방이 입고 덥고 먹던 것을 하사받았으니 다른 사람은 꿈도 꾸지 못하는 일이었다. 소하, 조참과 같이 유방의 신뢰와 총애를 받은 인물들도 그저 공무처리로 만나는 예우를 했다. 개인적인 심복으로서의 총애는 노관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한왕은 논공행상때, 노관을 장안후(長安侯)로 봉한다. 여기서 '장안'은 나중의 한나라도성 장안이 아니라, 옛날 진왕조의 도읍지인 함양을 가리킨다. 생각해보라. 선조의 수도를 신하에게 봉지로 주다니 이는 엄청난 영광이다. 일반인들이 받을 수 없는 것이다. 노관의 이 '장안후'는 회음후, 유후, 강후, 무양후, 곡역후등과는 같은 반열에서 논할 수 없는 것이다.

 

강산을 차지한 후, 유방은 다시 노관에게 더욱 큰 선물을 준다. 한5년(기원전202년) 구월, 연왕(燕王) 장도(臧荼)를 포획한 후, 유방은 다른 사람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이성의 노관을 연왕(燕王)에 봉한다. 오늘날의 북경과 그 주변의 토지를 노관에게 주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어릴때부터 함께 따라와준 친구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다. 사마천도 선망하는 말투로 글을 남긴다 "제후왕의 총애는 연왕만 같지 못하다."

 

유방은 천하의 지존이 되었고 그의 어릴때부터 친구인 노관도  번왕의 영예를 누린다. 한 산골에서 나온 친구들이 이제 각각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안락(安樂)'이라는 두 글자일 것이다. 세상일은 그러나 그렇게 이상하다. 순진했던 우의는 부귀영화를 누리는 기득이익과 날로 바뀌는 황권정치의 앞에서 틈이 생기게 된다. 결국 나중에는 각자 다른 생각을 품고 반목하며 서로 칼을 겨누는 상황이 오게 된다.

 

한11년(기원전196년), 한나라장수 진희가 대군(지금의 산서,하북)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한고조 유방은 군대를 이끌고 친히 정벌한다. 연왕 노관에게 동북에서 협력하여 합공하도록 요구한다. 노관은 부하 장승의 말을 듣고, 자신의 세력범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한편으로 유방에게 말로만 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흉노인 및 반장 진희와 몰래 연락하여 전투를 끌고 스스로를 보존하고자 한다. 이 밀모가 유방에게 발각된 후, 노관은 큰 화가 미칠 것을 예상하고 매일을 불안하게 보낸다. 한12년(기원전195년), 번쾌는 명을 받아 반군을 토벌하고, 진희는 참수된다. "고조는 사신을 보내어 노관을 부른다. 그러나 노관은 병을 핑계로 가지 않는다"(사기.한신노관열전).

 

"황상은 다시 벽양후 심이기, 어사대부 조요를 연왕에게 보내어 조사확인케 한다"(사기.한신노관열전). 아마도 유방은 노관이 그를 배반했다는 것을 밎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심이기와 조요의 두 사람을 보내어 확인시킨 것이다. 그것이 오해라는 것을 확인하고 노관을 데리고 오라는 취지였다. 그러나 노관은 잘못한 것이 있으니 유방이 사람을 연나라로 보낸다는 말을 듣고, 놀라서 아예 숨어버린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자신을 위한 변명은 잊지 않았다: 그는 부하에게 이렇게 말한다. "유씨가 아니면서 왕으로 있는 것은 나와 장사왕뿐이다. 지난해 봄에 회음후, 하후를 죽이고, 팽월을 죽였는데 모두 여후의 계책이다. 지금 황상이 병이 들었고 여후가 권력을 장악했는데, 여후는 이성왕과 대공신을 모조리 죽여버리고자 한다.그래서 나는 죽어도 장안으로 갈 수가 없다."

 

유방은 노관이 자신을 배신한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는 병석에서 대노하여, 번쾌에게 토벌하도록 명령한다.

 

조정의 대군이 도착하자 노관은 후회했다. 그는 마음 속으로 우정에 다시한번 기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연왕 노관은 비빈궁녀와 가족, 수천 기병을 데리고 장성의 아래로 잠시 피신하여, 기다린다. 황상의 병이 나으면, 입조하려고 하였다."(사기. 한신노관열전).그는 비빈궁녀 가족과 수천기병을 데리고 잠시 장성으로 피신한다. 이때 노관은 옛날 어렸을 때의 좋은 추억을 생각했을 것이고, 그는 이렇게 결별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는 요행을 기대했다. 그는 초조하게 장성에서 유방의 병이 완쾌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를 기다렸다. 그는 황제가 완쾌되면 자신이 직접 만나서 해명하고 용서를 구하면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늘은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노관에게 들려온 것은 한고조 유방이 붕어했다는 소식이다. 나쁜 소식이 들려오자 노관은 절망한다. 그는 말머리를 남으로 돌려 한참을 탄식하고 눈물을 뿌리며 몸을 북으로 돌려 흉노에게 도망친다. "노관은 오랑캐에게 침탈당하면서, 항상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했다."(사기. 한신노관열전). 도망자의 생활은 굴욕적이다. 대막에서 노관은 항상 고향을 그리워했다. 그가 좋아하던 한고조 유방이 죽은 다음 해, 유방과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 태어난 노관은 오랑캐의 땅에서 우울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중양리촌에서 가난했던 두 사람은 함께 손을 잡고 부귀영화를 얻었다. 그러나 부귀는 그들의 사이를 갈라놓는다. 각자의 이익을 지키기 위하여 우의를 짓밟고 각자 다른 길을 걷는다. 이것은 잔혹한 현실이다. 우리는 진지한 우정 속에서 안빈낙도할 것인가? 아니면 피비린내나는 싸움속에서 명리를 다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