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병광(劉秉光)
황제가 빨리 죽으면서, 자식이 너무 어리거나 자식이 없어서, 승계문제로 정치적인 혼란이 조성되는 경우가 있다. 서한때 발생한 '곽광폐립(霍光廢立)"사건은 그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원평원년(기원전74년), 한소제 유불릉이 사망하고, 그는 후사를 남기지 못했다. 생전에 황위계승자를 정해두지도 않았다. 그래서 권력의 공백상태가 나타나고 정치위기가 발생한다. 권신 곽광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물리치고, 창읍왕 유하를 모셔와서 대통을 승계하게 한다. 그러나, 유하는 황제가 된지 1달도 되지 않아, 곽광에 의하여 쫓겨난다.
유하는 한무제 유철의 손자이다. 그는 "평소에 나라에 있으면서 광종(狂縱)하고, 동작에 절제가 없었다." 심지어 국장기간중에도 "놀이와 사냥을 그치지 않았다."(<자치통감>). 유하의 행적은 정치가로서 곽광이 모를 리가 없다. 곽광이 유하를 옹립한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유하가 유불릉이 조카라는 것이다. 그가 황위를 승계하면 유가의 예법에 맞았다. 그리고 유불릉의 상관황후(곽광의 외손녀)의 지위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둘째, 유하는 먹고 마시고 노는데 열중했고, 정치에는 흥미가 없었다. 곽광이 조정을 마음대로 장악하는데 유리했다.
유하가 즉위한 후, 그의 광종한 정도는 이전보다 훨씬 심했다. "황제가 된 후, 황음무도했다...날로 심해갔다...날로 근신들과 술을 마시고 놀았다." 유하의 황음무도로 그를 옹립한 곽광은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곽광의 각종 음란행위와 비위는 곽광이 참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역대 황제들이 모두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하가 정치적으로 하는 여러가지 행위는 곽광이 참을래야 참을 수가 없었다. 유하는 등극한 후, 옛날의 부하들을 파격적으로 발탁하였다. "창읍이 관리들은 모두 장안으로 왔고, 왕왕 파격적인 관직을 받았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정무를 처리했다. "옥새를 받은 이래 27일동안 일을 시키는 사람들이 복잡하게 얽혔고, 각 관서에 보내는 건들만 1127건에 이르렀다." 이렇게 하여 정치는 모두 곽광이 처리하던 국면이 철저히 타파된다.
곽광은 유철이 친히 정한 고명대신이다. 유불릉은 13년간이나 보좌해왔다. 조정에 그의 심복들이 많았다. 그리하여 뿌리가 아주 깊어서 지금까지 혼자서 모든 업무를 처리해왔고 그가 하는 말은 그대로 집행되었다. 곽광이 유하로 하여금 황제에 오르게 해준 것은 자신이 쉽게 조종할 수 있는 괴뢰를 심어놓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게 한 후 자신이 조정을 장악하려 했다. 그러나 유하는 거꾸로 나와 오히려 그를 한쪽에 밀어놓았다. 이와 동시에 유하는 근신들과 곽광을 제거하려는 모의를 한다. 자신의 정치적 걸림돌을 제거하려는 것이다. 나중에 유하는 근신들에게 주살될 때 이렇게 소리쳤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내리지 않아서, 오히려 거꾸로 당하게 되었다." 유하는 이미 곽광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유하가 즉위할 때 나이가 겨우 19살이었다. 그는 노는데 열중했고, 정치적인 경험이 부족했다. 그래서 곽광을 상대하기는 어려웠다. 막 등극한 유하가 조정에 13년간 뿌리를 내린 곽광을 상대하는 것은 반드시 패할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과연 유하가 칼을 들기도 전에 곽광이 손을 썼다. 유하가 재위한지 27일째 되는 날, 곽광은 여러 신하들과 힘을 합하여 공개적으로 황제 유하를 탄핵했다. 곧이어 신속히 유하의 200여명의 심복을 제압하고, '황음미혹하며, 제왕의 예의를 잃고 한나라의 제도를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그를 축출한다.
유하가 폐위된 후, 원래의 봉지 창읍으로 쫓아낸다(지금의 산동성 거야현 창읍진). 그는 계속 창읍왕으로 남는다. 그러나 곽광의 일당에 의하여 철저하게 감시당한다. 마치 연금상태와 같았다. 원강3년(기원전 63년), 유하는 다시 강서로 귀양가서 해혼후(海昏侯)로 강등된다. 4년후, 유하는 우울하게 죽어간다. 향년34세이다. 역사에서 한폐제(漢廢帝)로 칭해진다. 유하의 즉위초기 황은을 펼치기도 전에 기반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고, 날개가 아직 튼튼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권력을 놓고 권신과 다투려고 했으며, 조정대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했다. 이는 호랑이에게 가죽을 내놓으라는 것과 같았다.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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