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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한)

한선제: 신세내력이 기구한 황제

by 중은우시 2012. 9. 18.

글: 소가노대(蕭家老大)

 

한선제(漢宣帝) 유순(劉詢)은 자가 차경(次卿)이고 일명 병이(病已)라 한다. 그는 황증손(皇曾孫)이라 불리기도 했다. 유순은 서한의 제7대황제이고, 한무제(漢武帝) 유철(劉徹)의 증손자이며, 폐태자 유거(劉據)의 손자이다. 사황손(史皇孫) 유진(劉進)의 아들이다.(사황손 유진과 그의 부친 유거는 무고지란으로 죽었을 때 봉호가 없었다. 유진은 유거의 사(史)씨성의 양제(良娣)소생이다. 그리고 한무제의 손자이므로 사적에서는 모친의 성인 사씨성을 붙여서 '사황손'이라고 부른다). 한무제 정화2년(기원전91년), 사황손 유진의 왕부인이 황증손을 낳은지 몇 달만에, 태자 유거의 일문은 무고지란으로 모조리 해를 입는다. 강보에 쌓여 있던 황증손은 이름조차 지어주기 전에 장안군저의 감옥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사서에서는 그를 '황증손'이라고 부른다.(즉, 한무제 유철의 증손이라는 말이다). 황증손, 유병이, 한선제 유순으로의 호칭변화는 한선제의 굴곡많고 기이한 신세내력을 잘 보여준다.

 

정화2년, 정직하고 강직한 정위속관(廷尉屬官) 병길(丙吉)은 조서를 받들어 군저감옥에서 무고사건을 처리한다. 병길은 태자가 간신 강충에 의해 모함당한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황증손의 처지를 매우 동정했다. 그래서 감옥에 두 명의 착실하고 충후하며 죄행이 가벼운 여자죄수를 골라 돌아가며 황증손에게 젖을 먹이게 해준다. 동시에 황증손을 조용하고 평탄한 곳으로 자리를 정해준다. 자신도 매일 반복해서 오가며 살펴보아주었다. 무고사건이 여러해가 지나도록 해결되지 않다보니, 병길은 계속 군저감옥에 남아 있으면서 사건을 처리했다.

 

감옥에서, 병길은 감옥수승 수여(誰如)에게 얘기한다: "황증손은 감옥에 있어서는 안된다." 동시에 수승은 직접 상사인 경조윤(京兆尹)에게 이를 보고한다. 그리고 황증손의 젖을 먹이던 여죄수와 함께 보낸다. 경조윤은 이를 수리하지 않고, 그들을 다시 돌려보낸다. 죄수인 유모이 형기가 만료되어 출옥하게 되었을 때, 황증손이 유모를 잘 따르는 것을 보자, 병길은 개인적으로 돈을 내서 그녀들을 남겨서 계속 황증손을 돌보게 했다. 감옥관리인이 병길에게 황증손에게 먹을 거리를 주라는 지시가 없었다고 말하자, 병길은 자신의 녹봉에서 매월 고기를 사서 황증손을 먹였다. 황증손이 병에 걸려, 여러 번 않좋은 상태가 되었지만, 병길이 유모에게 약을 먹이고 항, 점차 황증손의 병을 낫게 해준다. 이때 황증손은 아직 이름이 없었으므로 병길은 황증손이 병을 다 나았다는 의미로, 유병이라고 이름지어준다.

 

한무제 후원2년(기원전87년), 황제 유철이 병석에 눕는다. 술사는 장안감옥에 천자의 기운이 있어서, 황제와 부닥친다고 말한다. 그래서 유철이 조서를 내려, 장안감옥의 죄수는 죄질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모조리 죽여버리라고 한다. 사신 내알자령 곽양이 명을 받들어 밤을 새워 군저감옥으로 달려갔을 때, 병길은 감옥의 문을 굳게 걸어잠그고 사신이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황증손이 여기에 있다. 다른 죄없는 사람들까지 모두 죽일 수는 없다. 하물며 여기에 황상의 친증손이 계신다." 곽양은 감옥의 바깥에서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렸지만 들어갈 수가 없었다. 곽양은 궁으로 돌아가서, 한무제에게 병길의 상황을 그대로 보고한다. 한무제는 그제서야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래서 말한다: "이것은 아마도 하늘의 뜻인가보다." 그리하여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린다. 장안감옥의 죄수들은 병길때문에 모두 목숨을 건진다.

 

대사면후, 병길은 사양제의 모친인 정군(貞君) 그리고 오빠인 사공(史恭)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을 알아낸다. 그래서 4살가량된 유병이를 수레에 싣고서 사씨집안에 데려다 준다. 정군은 비록 나이가 많이 들었지만, 이 외롭기 그지없는 증외손을 아주 사랑했고, 친히 그를 길러준다.

 

얼마후 한무제가 조서를 내려, 유병이는 황실의 종적(宗籍)에 이름을 올리고, 액정(掖庭 즉 후궁)에서 기르고 돌보게 한다. 액정령(환관이 맡는다)인 장하(張賀)는 일찌기 태자인 유거를 모신 바 있다. 옛 주인의 은혜를 생각하며 유병이를 아주 잘 돌봐주었다. 아주 공손하게 모셨다. 후궁들이 공급하는 매일의 비용외에 자신의 봉급까지 얹어서 유병이의 입을 거리와 책을 사다 주었다. 유병이가 점점 어른이 되면서, 결혼할 나이가 된다. 장하는 손녀를 그에게 시집보내려고 준비한다. 그러나, 그의 동생인 우장군 장안세(張安世)가 이를 듣고는 매우 기분나빠한다: "유병이는 이미 위태자의 후손이다. 후궁에서 공급하는 음식과 옷을 받고 있는데, 평민으로 생활하면 충분하다. 더 이상 손녀를 시집보내는 얘기는 꺼내지도 말라." 고관직에 있는 형제가 그렇게 말하니 액정령으로서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장하에게는 가까운 친구 허광한(許廣漢)이 있었다. 그는 죄로 인하여 궁형을 받았다. 환관이 되려고 폭실색부(暴室嗇夫, 후궁 직염서 관리인)로 있었다. 허광한에게는 허평군(許平君)이라는 딸이 있는데, 예쁘고 온순했다. 하루는 장하가 주연을 베풀어 허광한을 청한다. 술이 거나하게 되었을 때, 장하가 말한다: 황증손 유병이가 이미 어른이 되었는데, 이후에 관내후가 될 것이니, 너는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면 어떻겠느냐?" 허광한은 그 자리에서 응락한다. 다음 날, 허광한은 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시 중간에 중매인을 넣어서 정식으로 딸을 유병이에게 시집보낸다; 장하는 자신의 돈을 내서 결혼비용으로 하고, 유병이의 혼례를 치러준다.

 

결혼후에 유병이는 허씨형제와 외할아버지 사씨집안의 도움으로, 동해 복중옹(澓中翁)에게서 글을 배운다. 유병이는 총명하고 공부를 잘 했으며 재주가 뛰어났다. 유협장의(遊俠仗義), 투계주마(鬪鷄走馬)를 좋아했다. 널리 돌아다니면서 민간생활의 곤란함과 관리들의 문제점을 모두 목격한다.

 

평원원년(기원전74년), 사월, 한소제 유불릉이 사망한다. 당시 21세로 죽으면서 후사가 없엇다. 고명대신 대장군 곽광은 여러 신하들과 논의하여 창읍왕 유하를 옹립한다. 유하는 덕이 없었고, 즉위하자마자 교만하고 사치했으며, 황음무도했다. 황제에 오른지 27일만에, 곽광, 장안세등의 대신들에 의하여 황위에서 쫓겨난다.

 

여러 신하들이 새 황제를 옹립하는데 대하여 논의하였으나 결론이 나지 않을 대, 광록대부 급사중으로 있던 병길이 건의를 제기한다. 민간에서 길러지고 있는 효무황제의 증손 유병이를 황제로 세워야 한다고. 그리고 유병이는 이미 나이가 18살이 되었으며 덕행과 학문이 뛰어나다고 말한다. 다른 대신들도 유병이에 대하여 좋은 평가가 있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곽광은 대신들과 협의한 후 황태후의 허가를 받는다. 유병이는 평원원년 칠월에 황제위에 오르며, 이름을 '유순'으로 고치니 그가 바로 한선제이다.

 

당초 허평군이 유병이에게 시집간 후 1년되 아들 유석(劉奭, 즉 한원제(漢元帝))을 낳는다. 다시 몇 달이 지나서 유병이가 황제에 오른다. 허씨는 첩여에 봉한다. 그때 황후를 세우는 일은 황제윽위후 가장 큰 일이었다. 대신들은 의론이 분분했다. 그들의 뜻은 곽광의 막내딸 곽성군을 생각했다. 곽광은 조정의 권력을 한 손에 움켜쥐고 있었으며, 새 황제도 그가 올린 것이다. 게다가 그는 황태후의 외조부이다. 대신들의 논의에 유순은 그저 조서를 내려 그가 하천하게 살 때 썼던 검을 찾아오라고 시킨다. 대신들은 새 황제가 옛 것을 잊지 않겠다는 뜻을 알아차린다. 원평원년 십일월, 허평군은 마침내 한나라의 황후가 된다.

 

유순에게 큰 은혜가 있는 병길은 아주 무게있고 깊이있으며 충후한 사람이다. 그리고 조용하게 일처리를 하는 사람이다. 한번도 그 일을 꺼낸 적이 없다. 유순이 즉위한 후 8년째 되던 해, 즉 지절3년(기원전67년), 한 후궁이 글을 써서 올린다. 일찌기 그가 황제를 안아 키운 적이 있으니, 보살펴달라고. 그리하여 유순은 액정령에게 조사를 하라고 시킨다. 그제서야 원래 병길이 그의 구명은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황제는 병길이 옛날에 큰 은혜를 베풀고도 말하지 않은 것을 그제서야 알아다. 그리하여 그를 박양후로 봉한다.

 

유순은 어려서 민간에 흘러다니며 기이한 내력을 지니게 되어, 그는 백성들이 원하는 바를 잘 알았다. 즉위후, 여러번 명을 내려 비용을 줄여, 백성의 부담을 경감시키게 했다. 그리하여 한나라가 중흥을 이룬다. <한서>에는 이렇게 그를 평가한다: "효의의 통치는 신상필벌이다" "관리는 그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고, 백성은 그 업을 편안히 했다."  "신의와 위엄이 북방오랑캐에 미쳐서 선우가 그를 앙모하여 고개를 숙이고 관직을 받는다., 그의 공로는 조상을 빛내고, 그의 업적은 후세에 미친다. 중흥이라고 할 만하다." 유순은 26년간 재위하며, 43세에 사망한다. 그는 업적을 이룬 황제였고, 효선황제의 존호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