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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분석

한본위(漢本位): 중국의 국세가 날로 쇠락한 근본원인

by 중은우시 2013. 2. 4.

글: 곽상학(郭翔鶴)

 

오늘의 중국을 보면, 중국인의 두뇌는 이미 서양인들에게 심각하게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한본위의 각도에서 문제를 보기 어렵다. 그러므로, 이 글을 시작하면서 성경에 나오는 바벨탑이야기를 인용하고, 민족차이가 인류사회를 발전시키는 근본동력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바벨탑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상고시대이다. 인류가 하나의 높다란 바벨탑을 건설해서, 하느님에 가까워지고자 했다. 하느님이 놀라서, 공동으로 이 탑을 만들던 인류에게 서로 다른 언어가 나타나게 만들었다. 이들은 서로 교류할 수 없게 되어 계속 일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로 흩어져 버린다. 이 바벨탑은 결국 완공되지 못한다.

 

이것은 중국 서쪽에 있는 종교민족의 상고전설이다. 고대인들의 민족차이에 대한 소박한 근원탐구이다. 그러나, 사실은 인류에 민족차이가 존재하고, 언어차이가 존재하는 것은 지역적으로 격리된 영향이외에 민족간에 경쟁, 도태, 융합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현대국가의 강역은 기본적으로 이런 민족간의 경쟁, 도태, 융합의 역사에 영향을 받아서 최종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이것은 즉, 하나의 주체민족의 민족본위가 없으면 하나의 국가가 존재할 기초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이론은 이미 현대언어학, 분자인류학의 연구소에서 확인되었다(유엔 인류유전자프로젝트의 참여기관의 연구성과를 보라). 21세기초이래 과학게에서 공인된 연구성과는 인류의 조상이 아프리카대륙에서 나온 후, 서로 다른 경로를 거쳐 넓은 유라시아대륙과 미주대륙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문명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많은 경쟁, 도태, 융합의 역사가 있었다. 언어, 혈통에 따른 주체민족본위에 따라 세력범위를 확립했다. 오늘날의 국가강역은 선사민족이주, 전쟁, 변화의 결과일 뿐이다. 이 과정에서, 군사, 경제, 문화가 강대한 민족이 계속하여 약소민족을 병합하고 도태시켰다. 그리고 대민족간에는 전쟁, 무역, 문화침투등을 통하여 서로 소멸, 영향, 융합하였다. 인류의 신체형태와 지적수준에서 모두 분화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전체수준은 함게 상승하나. 이는 일종의 동류내부의 혈통최적화라고 할 수 있다. 민족간의 경쟁, 제고가 없었으면, 오늘날의 산업문명도 없었을 것이다. 노신이 말한 혈전전행(血戰前行)의 역사가 바로 이러하다. 문명시기에 들어선 후, 민족국가는 한편으로 자신의 언어, 문화와 고유강역을 지키면서, 다른 한편으로 다른 민족과 영향과 충돌이 발생한다. 십자군의 정벌이전에, 유라시아대륙의 동서방은 교류가 아주 적었다. 인류의 생산력이 아직은 동서방의 대규모교류를 받아들일만하지 못했다. 그저 장건이 서역과 통하고, 아틸라가 서유럽을 정벌한 것과 같이 소규모, 저확율의 교류가 발생했을 뿐이다. 다만 이들 민족간의 충돌사건의 효과는 분명하다. 한민족과 흉노의 충돌은 최종적으로 한민족의 승리로 끝난다. 아시아에서 축출된 흉노는 오늘날의 동유럽으로 쫓겨간다. 거기서 고트족의 국가를 멸망시키고, 대이주가 시작된다. 결국은 고대로마문명을 멸망시킨다.프랑크왕국과 그의 후게자들은 오늘날 유럽대륙의 독일,프랑스, 이탈리아의 원시경계를 결정한다. 그후 동서방교류는 다시 한번 500년의 침묵기로 접어든다. 십자군정벌로 새로운 문화, 언어, 물자의 교류가 시작된다. 수백년의 전쟁을 거쳐, 비록 예루살렘이 몇번이나 주인을 바꾸었지만, 전쟁은 관련국가의 경ㅈ를 심각하게 파괴시킨다. 그러나 서방인과 아랍인은 상호 상대방에게서 선진적인 문명성과를 취득하고, 최종적으로 유럽의 암흑중세기의 종말을 가져온다. 그리고 광명의 르네상스의 길로 들어선다. 컬럼버스의 항해는 서방으로 하여금 광대한 미주대륙의 부를 차지하게 만들었고 자신의 발전을 가속화한다. 영국은 신대륙이 제공하는 물질적인 지지로 17세기중엽 공업화와 정치개혁을 이루고, 현대화의 길을 걷는다. 유럽대륙에서 온건하게 발전하면서 두 차례의 기회를 얻은 것과 달리, 동방에서 계속 앞서가던 민족국가 한족국가는 두번이나 외족의 침입에 멸망하고, 최종적으로 생산력과 문화가 크게 파괴된다. 국세는 더욱 쇠락한다.

 

한 국가안에, 만일 지나치게 많은 민족, 문화 및 생활방식이 나타나고, 우세자가 없으면, 최종적인 결과는 국가의 와해이다. 기실 이 이치는 미국의 설계자인 헌팅턴이 일찌감치 결론을 낸 바 있다. 즉, 지역과 문화의 차이는 분리와 자치운동을 가져온다.

 

원나라이전의 중고시기에 중국은 오랫동안 인류문명의 선구자지위를 가졌다. 특히 당나라때는 동시대를 횡적으로 비교할 때, 당나라는 세계제일대국이었다, GDP에서 우세를 점했던 송나라와 비교하면 당나라는 군사, 문화, 경제등 분야에서 모두 우세를 점했다. 이런 상황은 안사의 난까지 지속된다. 이때부터 중국은 국세가 내리막길을 걷는다. 특히 군사분야에서, 지금까지도 한,당시대의 수준을 되찾지 못했다. 이런 쇠락의 근본원인은 국가통치자들이 주체민족의 생활방식, 언어습관, 최고지위를 중심으로하는 국가구조를 견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당왕실의 혈통은 위진남북조이래 한족에 융합된 선비족의 성분을 지니고 있다. 기실, 선비족은 한본위를 받아들인 하나의 민족이다. 북위 효문제가 한화의 복장, 문화, 저장제도개혁을 받아들인 이래, 이씨대가정의 혈족으로 들어왔다. 기실 이미 한화된 소수민족의 지파이다. 이런 지파는 상고의 회이(淮夷), 오월(吳越), 백월(百越) 혈통이 한족에 가입한 것과 이곡동공(異曲同工)이다. 그러나, 이당황실은 자신의 혈통을 잘못 읽어, 한본위를 견지하지 못했고 최종적으로 패망한 근본원인이 된다. 한나라황제는 일찌기 말한 바 있다. "이적(夷狄)이 의리없게 된 것이 이미 오래되었다." 같은 족속이 아닌 외래족속으로서, 한본위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면, 일반적으로 한족을 대체하는데 대하여 환상을 가진다. 당현종이전과 이후에 한민족의 중앙통치자는 소수민족에 대한 정책이 조심스러웠다. 예를 들어 방현령의 손자는 일찌기 호족여인을 취하여 파면되었다. 고려, 서역등지에서 한으로 들어온 소수민족이 만일 한본위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관직등에서 차별을 받았다. 예를 들어, 고선지는 일찌기 한족장수의 배척을 받았다. 다만 당현종때, 안록산등 호인들이 양귀비의 환심을 얻어, 현종은 호인들이 군대를 장악하고 조정요직을 장악하는데 대한 경계심이 부족했다. 결국 전국에서 가장 중요한 삼진군대를 안록산에게 넘겨서 관장하게 한다. 안록산의 반란은 중천에 뜬 해와 같았던 당나라의 태평성대를 일거에 일락천장하게 만든다. 이 국면을 되돌리기 위하여, 당왕실은 부득이 음짐지갈(飮鴆止渴)의 절도자세조를 선택한다. 이 제도는 비록 소수민족정권을 탄압했지만, 당나라중기이후 군벌혼전을 가져오고, 결국은 멸망하게 만든다.

 

안사의 난이후, 당나라는 북방대초원과 하서주랑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서역과의 교역로도 단절된다. 이는 오늘날 중앙아시아와 신강지역의 종교, 강역국면을 가져온다. 오대의 변란이후, 조광윤이 접수한 것은 말생산지를 잃고, 군왕을 죽여 영화를 꿈꾸는 관례를 지닌 찌꺼기국가였다. 북송일대에 문화, 경제분야에서 더욱 앞선 한족왕조이지만 당나라의 호란이 남긴 변방의 지연, 자원곤경을 받아왔다. 예를 들어 북방부락의 굴기, 서남지역의 통제상실은 북송으로 하여금 자주 앞뒤로 적을 맞이하는 난국에 처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토번과 서하가 전후로 점령한 하황(河湟)은 중요한 말생산지이다. 북송은 대량의 부세와 군비를 들여 이 지구를 수복하고자 했다. 비록 서하에 대한 전쟁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취득하였지만, 요, 금의 압력으로 북송은 최종적으로 서역으로 통하는 길을 열지 못하고 만다. 한족의 서역에서의 세력은 당송이래로 게속 줄어든다. 오아시아정권, 돈황전권이 차례로 멸망하고 서역은 완전히 탈중국화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당나라는 안사의 난으로 북방초원지대를 상실했고, 이는 송,명이래 중국문명의 난원(亂源)이 된다. 몽골의 굴기는 세계에서 경제,문화가 첫손꼽히던 송을 멸망시킨다. 이 일찌기 이슬람의 선지자인 모하메드가 지식왕국의 시대라고 생각했고, 유럽인들이 비단, 도자기, 황금의 나라라고 생각했던 국가가 결국은 멸망한 것이다. 그리고 화하문명은 정원(正源)을 벗어난다. 이미 야철, 방직의 전성기가 나타나고 부유한 공장주와 지폐가 나타났던 송나라는 비장한 방식으로 끝이 난다. 원나라이후, 중국은 정치제도, 사대부 민주방면에서 이백여년의 암흑기를 거친다. 유목민족의 야만스러운 순장제도가 명나라에 계승되고 명영종때가 되어서야 폐지된다. 송나라이래 이미 해결되었던 환관난정문제가 다시금 출현한다. 백성과 사대부에 대한 특무체계가 건립된다. 이것들은 모두 화하문명에 없던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인구에 회자되는 "애산지후무중국(崖山之後無中國)"(애산은 남송의 마지막 황제가 원나라군대에 쫓겨 최후의 전투를 벌이다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한 곳)이다.

 

명나라는 한본위문명의 마지막 발현이었다. 그리고, 항해, 방직, 천문, 농학, 의학등 분야에서 선도적인 성취를 이룬다. 명나라때, 중국의 경제발전수준은 세계제일이었다. 화기개발로 부대의 주요한 무기가 된다. 다만, 다시한번 출현한 소빙하기 및 북방민족자치정권의 반란은 명나라를 비장한 멸망으로 이끈다. 조선, 일본, 월남등 화하문명전통의 번국은 분리된다. 이때부터 중국은 만겁불복(萬劫不復)의 심연에 빠진다. 지금까지 이들 역사문제가 남긴 영향을 받고 있다. 지금도 전성기의 세계지위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신해혁명은 민족주의를 근본으로 한다. 삼민주의의 제1조는 바로 민족주의이다. 다만 공산주의가 제창한 계급연합이 민족족차별을 대체한다는 이상화치국이념이 나타나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은 건국이래 소련이 하는대로 따라했다. 인구의 1%를 차지하던 소수민족이 이제는 이미 10%까지 올라갔다. 한본위는 탄압되고, 한민족 자체의 더욱 선진적인 전통문명이 단절되고, 소수민족의 문화가 크게 유행한다. 이것들은 모두 민국이래 이미 한화를 진행했던 서역, 몽골등지에서 다시한번 문제가 나타나게 만든다. 심지어 만주족처럼 이미 한화한 민족이 민족자각과 분리운동을 일으키려는 지경에 이르렀다. 노르만문명의 중국에 대한 전면적인 칩입은 문화, 음악, 어법, 군사, 종교, 음식, 철학, 도덕, 법률, 이데올로기등 방면에서 영향을 미쳤고, 단기간내에 제거하기 어렵다. 백년이후의 중국은 민족문제의 영향하에서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인가. 이미 아무도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가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