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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분석

누란고성(樓蘭古城)이 사라진 이유는?

by 중은우시 2013. 4. 13.

글: 문재봉(文裁縫) 

 

 

 

1900년 3월 27일, 저녁 타클라마칸사막. 한 백인노인은 몇 명의 가이드와 몇 마리의 낙타를 타고 천천히 가고 있었다. 석양의 아래, 그들의 그림자는 길고도 길게 늘어졌다. 고탑리목하의 강물을 따라, 그들은 행방이 묘연한 로프노르(Lop Nor, 羅布泊)호수를 찾고 있었다. 태양이 떨어질 때 마침내 그들은 한 흙언덕에 도착한다. 이때 곤란한 일이 발생한다. 백인노인은 낙타의 물주머니에서 물이 새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남은 물이 얼마되지 않았다. 화불단행이라고 가이드는 그들이 자리를 잡을 때 쓰는 쇠삽을 잃어버렸다. 노인은 결정한다. 모든 인원은 즉시 그 자리에서 정돈하고, 향도는 혼자 돌아가서 쇠삽을 찾는다.

 

행진하는 중에, 혼자서 길을 가던 가이드는 의외로 한 고성의 성벽, 길거리, 건물 심지어 봉화대까지 발견한다. 가이드는 자신이 환각을 본다고 생각해서 눈을 비볐지만 이 모든 것은 환각이 아니었다. 그는 즉시 돌아와서 이 발견을 노인에게 알려준다. 노인은 흥분했고, 그들은 가이드가 일러주는 길을 따라 다시 그 고성으로 간다. 물이 없으므로 급히 살펴본 후 그들은 떠나갔다. 다음 해, 그들은 원래의 길을 따라 이 곳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대량의 발굴을 한다. 노인은 현지에서 출토한 거로문간독 Kroraina라는 단어를 가지고 이 고성이 "누란"이라고 추정한다. 그후, 누란이라는 이름은 1세기동안 세계인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가장 먼저 누란고성을 발견한 위구르족 가이드의 이름은 아이얼디커이고, 그 백인노인은 바로 유명한 탐험가인 스웨덴인 스벤 헤딘(Sven Anders Hedin)이었다.

 

스벤 헤딘은 이곳에서 대량의 문물을 발굴한다. 화폐, 사직품, 양식, 도기, 36장의 한자 종이조각, 120편의 죽간 그리고 몇 개의 붓. 이 스벤 헤딘이 '사막의 폼페이성'이라고 부르는 고성은 세계를 뒤흔들어놓았다. 그 후, 많은 국가의 고고학자, 지리지질학자, 탐험대가 이곳으로 온다...

1905년 미국의 헌팅턴 탐험대;

1906년 영국의 스타인 탐험대;

1908-1909년 일본의 오오타니 탐험대;

1910-1911년 일본의 오오타니 제2차 탐험다.

 

각국 탐험대가 누란고성 및 로프노르지구에서 발굴한 문화재의 수량이 풍부하고 가치가 커서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든다. 이곳에서는 각 시대의 석기, 목기, 도기, 동기, 유리제품, 고화폐등등이 발견되었다. 품종도 아주 많았고, 역사도 오래 되었다. 각종 출토문물 중에서, 누란고성에서 출토된 한금(漢錦) 및 진(晋)나라때에 손으로 쓴 <전국책>은 가장 진귀하다. 한금은 개략 1-2세기때 만든 것으로 정교하고 색채가 현란하며 문자가 새겨져 있다. "연년익수" "창락광명", "연년익수의자손"등 길상의 글자였다. 이곳에서 발굴된 진나라때의 필사본종이는 유럽인이 최초로 종이를 사용한 것보다 6백여년이 앞섰다. 출토된 문물 중에는 서진시기 서역장사 이백이 언기왕에게 보낸 서신도 있었다. 즉, "이백문서"라고 부르는 것이다. 스벤 헤딘을 대표로 하는 탐험가들은 누란이 인멸된 '사막중의 보물"이라고 성찬했다. 역사의 귀퉁이에 남겨진 '박물관'이고 '동방의 폼페이시'라고 했다.

 

수천년간 지속된 문명, 수천년의 기억을 덮고 있었는데, 이제 신비의 면사를 천천히 걷어내고 있었다. 누란고성은 모랫바람과 황연가운데 점점 드러난다.

 

고고전무가는 누란고성 부근의 유적지에서 출토된 고묘간시(古墓干屍)를 보고 추론한다. 지금으로부터 4천여년전에, 누란지구에서 생활하던 유목을 위주로 하는 살마들은 금발벽안으로 고구라파인종이다. 아마도 그들은 물과 풀을 찾아서 사냥을 하였을 것이고, 몇 구의 마른 시신만을 남기고 신비롭게 소실되었다.

 

그후 2천여년, 이 지역의 역사는 단층이 나타난다. 고고발굴과 문헌기록에서 모두 누란의 흔적을 전혀 발견할 수 없다. 당시, 누란지구의 자연환경은 지금처럼 열악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목과 농업에 아주 적합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역사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되었다.

 

서한시기, 누란은 서역36국중 하나이다. 장건이 서역과 교통한 후, 누란은 동서방교통의 요지가 된다. <사기.대완열전>의 기록에 따르면, "우전의 서쪽에 물이 모두 서쪽으로 흘러 서해로 들어간다; 그 동쪽의 물은 동쪽으로 흘러서 염택으로 들어간다. 염택은 지하로 흘러간다. 남하는 하원에서 나온다. 옥석이 많고, 강은 중국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누란, 고사읍에는 성곽이 있고, 염택에 붙어 있다." 사마천시대에 "누란"이라는 이름은 이미 한인들에게 알려져 있다. 이들 기록은 장건이 서역에 사신으로 갔을 때 들고 온 것이다.

 

위진시기, 중앙정부는 서역장사라는 직책을 둔다. 치소는 누란에 있었다. 누란은 이로 인하여 서역의 정치, 군사,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된다. 장안에서 출발하여, 옛 비단길을 따라 서쪽응로 가면 누란에 도달하고 난 후에 남북의 두 길로 갈라진다. 누란은 유라시아대륙의 심장에 위치하고 있어 교통의 중심지였다. 동서방문화교류에서 중요한 작용을 한다. 강대한 한제국, 흉노와 주위의 많은 유목민족국가에 끼어있던 누란은 항상 생존위기에 시달렸다. 각국도 누란을 쟁탈하기 위하여 대규모 전쟁을 벌였다.

 

진나라이후 누란은 돌연 다시 소실된다. 일찌기 번화했던 서역의 도시는 그후 1500여년동안 다시 사라져 버린다.

 

기원전176년에 첫기록이 보이고, 기원전 77년에는 "선선"으로 이름을 바꾸어 한때 흥성한다. 다시 4세기가량 돌연 소실된다. 누란이 문헌에 나오는 역사는 아주 짧다. 그리고 여러가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남겼다. 누란이 언제 건국되었고, 어떤 정치제도를 실행하였고, 어떤 사회경제생활을 했고, 어떤 종교를 신앙하였고, 어떤 민족인지 등등은 모두 고증할 도리가 없다. 문헌에 가장 많이 기록된 것은 그저 기원전 1세기때 한제국이 흉노와 격렬한 투쟁을 하는 중에 누란이 "소국으로서 대국의 사이에서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노력하였다는 것뿐이다. 서역사의 명가인 풍승균은 이렇게 탄식한다: 서역고국의 지금위치를 고증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복잡한 문제로 바뀐다. 누란이 바로 그러한 예이다. 누란의 강역은 얼마나 큰다. 도성은 어디인가? 현재 가정은 여러 설이 있지만 아직 정설은 없다."

 

누란이 비록 신속하게 소멸하여 역사무대에서 사라졌지만, 그러나 "긴장된 세계사의 기념비"는 남겼다. 1700년후의 지금, 황량한 옛길의 누란은 여전히 끝날 때의 자태를 지니고 있다. 남은 벽과 건물은 먼지에 덮인 기억을 보여주고 있고, 역사가 마치 어제 발생한 것처럼 느끼며, 이백의 <새하곡>의 유명한 구절: '원장요하검(願將腰下劍), 직위참누란(直爲斬樓蘭)". 여전히 역사의 풍진을 느낄 수 있다. 누란은 왜 사람이 가지않는 사막으로 바뀌었는가? 여러해동안 이것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첫째 견해는 누란이 글로벌 기후변화로 망했다는 것이다. 개략 1만년전부터, 지구환경은 3번의 큰 단계적 변화를 거쳤다. 지금으로부터 1만년전에서 8천년전까지는 승온기이고, 지금으로부터 8천년전에서 3천년전은 고온기, 지금으로부터 3천년전부터 지금까지는 강온기이다. 3번의 단계적인 변화는 인류의 활동범위와 방식을 결정했다. 누란고성의 소멸은 개락 기원전후에서 4세기까지이다. 이는 바로 사막화가 진행되는 시기이다. 이 사막화과정에서 누란고성이 소멸했을 뿐아니라, 사막의 확대로 니아, 미란성, 가라돈, 가한성, 통만성, 니양성등 국가와 도시도 소멸한다. 누란고성은 유라시아대륙의 핵심지역에 있고, 메마른 내륙에 위치하고 있다. 지구기후가 사막화된 대배경하에서 소멸을 불가피했다.

 

둘째 견해는 누란이 청장고원의 융기로 망했다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7만 내지 8만년전에 청장고원이 신속히 융기한다. 이것은 유라시아대륙 중부지구의 기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태평양과 인도양의 온난다습기류가 다시는 이곳까지 올 수 없게 된다. 전체 중앙아시아지구는 건조와 사막화, 고비화의 추세를 겪는다. 수원과 수목은 황량한 벌탄위의 오아시스에서만 살 수 있게 된다. 누란고성은 수계가 발달한 공작하 하류의 삼각주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기간동안 인류활동의 가속화 및 수계의 변화로 원래 취약한 생태환경이 더욱 악화된다. 누란은 일찌기 지금까지 발견된 세계에서 가장 최초의 환경보호법률을 반포한 바 있다. 다만 수원은 여전히 신속히 위축되고, 결국은 소멸한다. 도시도 더 이상 존속할 수 없게 된다.

 

셋째 견해는 누란이 전쟁으로 망했다는 것이다. 5세기경 누란왕국은 쇠약해지고, 북방의 강국이 침입한여 누란성이 함락되고 나중에 버려졌다는 것이다.

 

넷째 견해는 누란의 소실은 비단길 북로의 개척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누란이 흥기한 중요한 원인은 바로 초기 고비단길이 이곳을 지나갔기 때문이다. 나중에 하미, 투루판의 비단길북로가 개통된 후, 누란을 지나는 비단길 사막통로는 버려지게 되었다. 누란도 이로 인하여 과거의 영광을 잃는다.

 

다섯째 견해는 누란이 전염병, 질병으로 망했다는 것이다. 외지에서 전해온 전염병으로 누란성내의 대부분 주민의 생명을 잃고, 다행히 살아남은 사람들은 누란을 버리고 타향으로 멀리 피했으며, 이로 인하여 누란은 망했다는 것이다.

 

여섯재 견해는 누란이 생물침입으로 망했다는 것이다. 전문가의 고증에 따르면, 양하유역에서 전해져온 곤충 루고(螻, 땅강아지)가 누란에 치명적인 재난을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 이런 누고는 흙속에서 생활하며 그들은 백고니토에서 산다. 무리를 이루어 주민의 토지, 건물로 들어간다. 누란에는 천적이 없어서 사람들이 이를 없앨 수 없게 된다. 할 수 없이 성을 버리고 갈 수밖에 없었다.

 

어찌되었건, 누란의 멸망은 충분히 설명해준다. 사람과 자연이 조화롭게 살아야만 인류 자신이 더욱 잘 발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누란은 일찌기 주요도로를 장악하고, 좌우의 동서교통으로 번영을 누린다. 일찌기 엄청난 부를 쌓고, 사방의 이웃나라를 복속시킨 장거도 있었다. 그러나, 자연환경의 변화, 수계의 변화, 인류활동의 가속화 및 전쟁의 파괴로 원래 취약했던 생태환경이 더욱 악화된다. 결국 누란은 오아시스에서 황량한 사막으로 된다. 성세에서 황무지로 바뀐다. 옛날의 새외 오아시스는 오늘날 황사무더기가 된다. 흥망성쇠간의 낙차는 후세인들에게 많은 생각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