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오구(吳鉤)
만일 중국역사상 3명의 가장 근정(勤政)한 군주를 꼽으라면, 나는 진시황, 주원장 그리고 옹정제를 꼽겠다.
<한서>에는 진시황의 근정정도를 기록하고 있다: "궁조문묵(躬操文墨), 주단옥(晝斷獄), 야리서(夜理書), 자정결사(自程決事), 일현석지일(日懸石之一)" 진나라때는 아직 종이가 발명되지 않았다. 문서는 통상적으로 죽간(竹簡)에 썼다. 진시황은 밤낮으로 일을 했는데, 매일 검토하는 죽간이 일석(一石)에 달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120근, 즉 60킬로그램이다. 1석의 죽간에는 개략 3만여자가 쓰인다. 이 정도의 결재수준이면 아주 놀라운 정도라 할 수 있다.
주원장의 근정은 진시황에 필적할 만하다. 그는 스스로 말한 바 있다: "짐은 즉위한 이래, 항상 스스로 부지런하도록 독려했다. 해가 뜨기 전에 조정에 가서, 오후5시 이후에 환궁한다. 밤에는 자리에 편안히 있지 못하고 옷을 입고 일어난다. 혹은 하늘의 천상을 보는데, 별 하나가 제 자리에 없으면 걱정을 하게 된다. 혹은 백성의 일을 헤아리는데 급한 일이면 그 자리에서 글로 적어 새벽이 되기를 기다려 내려보낸다." 낮에도 바쁘게 움직이고 밤에도 하늘을 살펴보았던 것이다.
옹정제의 근면함도 위의 두 사람에 뒤지지 않았다. 그는 말했다. "각성 문무관원의 주절이 하루에 2,3십건이 오고 많으면 5,6십건이 된다. 모두 짐이 친히 살펴보고 지시를 내리고 지금까지 지체시키지 않았다. 어느 한 사람도 좌우에서 도와주지 않았다." 일찌기 반란을 획책했던 증정(曾靜)조차도 옹정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에 모든 일을 처리하고 안건 하나하나 친히 처리하고 글자 한자한자 직접 지시를 내리는 것을 보고" 크게 감동을 받는다.
이 세명의 황제의 근정은 정말 탄복할 만하다. 어떤 사람은 크게 찬양할 것이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이것을 군주의 모범이라고 말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깊이 따져보면, 발견할 수 있다. 진시황이건, 주원장이건 옹정제이건, 근정의 표현은 기실 모두 군주독재의 논리적 귀결이다. <사기>에 쓰인 바와 같이, "천하의 일은 대소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황상이 결정한다." "승상과 여러 대신들이 모두 일처리를 할 때면 황상의 판단에 따른다." 그래서 진시황은 밤낮으로 일할 수 밖에 없었고, "휴식을 취할 수 없었다." 사마천조차도 참지 못하고, '후생(侯生)'의 입을 빌어, 그가 "권세를 탐하는게 이와 같았다"고 욕을 했다. 주원장은 재상제도를 폐지하여, 군주의 지위로 정부의 권한을 침탈했다. 그래서 아침일찍 일어나서 밤늦게까지 모든 일을 처리해야 했던 것이다. 황종희는 이렇게 비판했다: "명나라에 좋은 통치가 없었던 것은 고황제(주원장)가 승상을 없앤 것부터 시작이다." 청나라때는 더더구나 황권독재가 더욱 심했다. 소위 "건강독단(乾綱獨斷)은 본조가법(本朝家法)이다", 옹정제 자신도 말했다: "말하기를 여러 부서의 일을 부서에 맡기고, 육부의 일을 육부에 맡기면 황제는 그냥 높은 곳에 앉아있기만 하면 편하지 않느냐고 한다. 그러나 천하의 일을 그렇게 처리할 수 있는 것인가?" 확실히 옹정은 "수공이치(垂拱而治)"의 화하통치전통을 틀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든 일을 친히 처리하고, 모든 권력이 자신에게서 나와야 된다고 생각했다.
이 각도에서 보자면, 군주제하에서, 제왕이 너무 부지런한 것은 황권독재의 표현일 뿐이다. 근정할수록 독재한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근정"은 실재로 황제의 좋은 품성이 아니다. 누군가 반박할지 모르겠다. 황제가 근정하는게 좋지 않다니, 그럼 나태한게 좋단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우량한 통치전통은 "크고 작은 일을 모조리 황상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명나라때의 가정제, 만력제처럼 몇년간 조회에 참석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허군공치(虛君共治)"의 통치구조를 건립하여 합리적인 분권제도에 의존하여 운영하는 것이다.
우리는 또 다른 군주이미지를 보도록 하자: 송나라때의 송인종은 "백사부전(百事不全), 지회주관가(只會做官家)", "일은 크고 작은 것을 따지지 않고 모조리 외정에 맡겨서 논의하게 했다." 당시 심지어 어떤 사람은 송인종이 이처럼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무런 의견도 없는 것을 참지 못하여, "혹은 권하여 말하기를, "폐하는 당연히 권력을 모조리 쥐고 있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인종은 말하기를, '그것도 맞다. 그러나 천하의 일을 처리하는데 짐에게서 나오게 하고 싶지 않다. 만일 짐에게서 나오면 모두 통과된다. 만일 잘못이 있어도 고치기 어렵게 된다. 차라리 공의에 맡겨서 재상들이 행하게 하는 것이 낫다. 행한 후에 천하가 불편하게 느끼면 대간이 그 잘못을 간하고, 고치기도 쉬운 것이다."
송인종은 분명히 깨닫고 있었다. 군주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독재를 하려 해서는 안된다. 당연히 '공의에 맡겨서" 처리해야 한다; 공의에서 통과되면 재상이 집행한다. 집행이 적절한지 아닌지는 대간이 감찰한다. 이것이 바로 송나라때 형성된 '공치'의 체제이다. 군주는 위에 자리하지만 주권의 상징, 도덕의 모범, 예의의 대표로 존재할 뿐이고, 구체적으로 정무를 집행하지는 않는다; 국가의 통치권은 교체될 수 있고, 책임을 추궁할 수 있는 정부(재상)가 처리한다. 동시에 완전히 집권계통과 분리된 대간계통을 두어서, 행정의 감찰, 감사, 문책을 책임진다. 이런 통치구조는 진시황, 주원장, 옹정제의 '근정'보다 합리적이지 않은가?
당연히 송나라의 실제권력운용은 이상적인 '허군공치'에서 멀리 벗어났다. 현대의 군주입헌제와 동일시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황제는 최종의사결정권을 가지고 있었고, 일부 독재경향이 있는 황제는 "위복재기(威福在己)"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분권구조가 이미 건립되기 시작하였고, 송나라때는 설사 정치가 가장 엉망인 때라고 하더라도, 군주의 독단은 청나라때의 소위 '강건성세'보다 훨씬 못미쳤다.
군주의 최대미덕은 권력독점이 아니라, 겸억(謙抑)이다. 정부와 권력을 다투지 않는 것이다. 나아가 말하자면, 정부의 최대미덕은 겸억이 아니던가, 사회, 민간, 시장과 권리를 다투지 않는 것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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