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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문화

용(龍)은 어떻게 신격화되었는가?

by 중은우시 2012. 9. 19.

글: 종춘계(宗春啓) 

 

용은 중국 원고(遠古)시대에 아주 신비한 것이었으나, 아직 신격화되지는 않았었다. 동한(東漢)때 사람이 쓴 <설문(說文)>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용은 어둡기도 하며 밝기도 하고, 가늘기도 하고 크기도 하고, 짧기도 하고 길기도 하다. 춘분에 하늘로 올라갔다가 추분에 못에 들어간다" 이때까지 용은 기껏해야 신인이 타는 것이었다. "전욱은 용을 타고 사해를 갔다". 한유의 글에서도 용은 구름을 뿜고 안개를 토하는 외에 신기할 것이 따로 없는 것이었다. 한유는 이렇게 의문을 나타낸다: 고대인들은 구름이 용에서 나온다고 하였는데, 구름이 없으면 용은 날지를 못한다. 도대체 용이 대단한 것인가? 아니면 구름이 대단한 것인가? 나중에, 용은 강하호해(江河湖海)의 주재자가 된다. 심지어 청한우로(晴旱雨, 맑고 가물고, 비오고, 홍수나는 것)를 관장하기 시작하며, 중국농민들이 절을 하며 모시는 신이 된다. 이것은 진당(晋唐)이후의 일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진(晋)나라때 간보(干寶)가 쓴 <수신기(搜神記)>에서 이미 "농부가 용동(龍洞)에 기도하여 비를 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중국의 한(漢)족은 여러 신을 숭배하는 민족이다. 자연숭배의 고대에 강,하,호,해는 자연히 숭배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때 숭배하는 것은 용왕이 아니었다. 해신(海神)은 "약(若)"이라 부르고, 하신(河神)은 "백(伯)"이라 부르고, 강신(江神)은 "기상(奇相)"이라 부르고, 호신(湖神)은 "상군(湘君)"이라 불렀다. 어쨌든 용왕이 아니었다. 중국고대에, 강하호해의 신은 기실 죽은 사람이 맡았다. 용이 언제부터 물의 세계를 주관하는 신이 되었을까? 필자의 생각으로 진(晋)나라보다 앞서지는 않는다.

 

물 속에는 용왕이 있다. 이는 불교의 <화엄경>에 나온다: 다시 무량제대용왕이 있고, 소위 비루박차용왕, 사갈라용왕, 운음묘동용왕...그 수가 무량하고, 열심히 힘쓰지 않는 것이 없으며,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내려서 여러 중생의 번뇌를 소멸시킨다." 이 경문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용왕이 아주 많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용왕의 직책은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는 것(興雲布雨)"이라는 것이다. <화엄경>이 한자로 번역된 것은 제1차가 동진때이고, 제2차는 당나라때이다. 그래서, '용왕'이라는 개념이 나타난 것은 진당이후이다.

 

용왕,용궁의 신화에 관하여,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당나라이다. <태평어람>에 땨르면, 당나라때 사람인 양재언이 쓴 <양사공기>에서 동해용왕과 용녀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이야기에 따르면, 앙무제는 동해용왕의 딸을 만나는 데, 그녀는 진주를 관장했다. 양무제는 용녀에게 그녀가 가장 잘먹는 제비구이를 헌상하니, 용녀가 아주 기뻐했다. 그리고 양무제에게 큰 진주를 많이 보내준다. 그 이후, <유의전서>의 이야기는 당나라때 이조위(李朝威)의 소설에 나온다. 서생 유의가 낙방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경수의 북안을 지날 때, 양을 치는 용녀를 만난다. 원래 그녀는 동정용군(洞庭龍君)의 막내딸이었고, 경하용왕(涇河龍王)의 아들에게 시집갔다. 그러나 모욕을 받았다. 유의는 그녀를 위하여 동정용군에게 편지를 써서 보낸다. 동정용군의 동생인 전당용군(錢塘龍君)은 그 소식을 듣고 분노하여 경하로 간다. 그리고 경하용군의 아들을 먹어버린다. 그리고 용녀를 데리고 동정으로 돌아간다. 나중에, 용녀는 유의의 처가 된다. 이 이야기는 해방후에 월극으로 만들어져 은막에 올라간다.

 

당나라때의 문인은 용녀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만들어낸다. 오랫동안 용녀숭배의 붐을 불러일으킨다. <영응전>, <심이기>, <박이지>등의 책에는 모두 용녀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시인 잠참(岑參)의 <용녀사>는 증명한다. 당나라 중후기, 사천에는 이미 용녀를 모시는 사묘(祠廟)가 있었다. 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용녀하처래(龍女何處來)

내시승풍우(來時乘風雨)

사당청림하(祠堂靑林下)

완완여상어(宛宛如相語)

촉인경기사(蜀人竟祈思)

봉주잉격고(捧酒仍擊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