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임휘(林輝)
경극계에 '수생'은 노생(老生, 중년이상이 수염난 남성)을 연기하는 배우를 가리킨다. 1930년대, 저명한 '수생' 여숙암(余叔巖), 고경규(高慶奎), 마련량(馬連良), 언국붕(言菊朋)은 각자 독특한 품격이 있는 예술유파를 창립한고, '사대수생'으로 불리웠다. 그후, 고경규는 목의 질병으로 무대를 점차 은퇴했고, 여숙암과 언국붕은 40년대에 사망한다. "사새수생"의 구성은 그후 변화가 생긴다. 한가지 설은 마련량, 담부영(譚富英), 양보삼(楊寶森), 해소백(奚嘯伯)이라고 하고, 다른 한가지 설은 마련량, 담부영, 양보삼, 주신방(周信芳)이라고 한다. 그들은 각각 특색있는 연기를 펼쳐서 무수한 사람들의 찬탄을 자아냈다.
신중국이 1949년에 건립되면서, 마련량, 담부영, 양보삼, 해소백, 주신방의 운명도 기복이 있게 된다. 그중 비교적 행운아는 양보삼이다. 그는 1958년에 병사하여, 문혁의 참혹함을 거치지 않을 수 있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억울하게 박해당하여 죽거나, 심신에 상처를 입는다.
1965년 모택동의 지시하에, 강청등 문예계, 사학계에는 <해서파관>을 비판하는 운동이 시작된다. 이것은 모택동이 문화대혁명을 발동시킨 도화선이다. 일찌기 경극 <해서파관>의 주연을 맡은 바 있는 마련량도 연루되어, 강청에 의하여 북경경극단을 쫓겨난다. 문혁이 발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마련량은 '한간(漢奸)', "쌍패(雙覇)'로 가산을 몰수당하여, 골동품, 문화재 및 가치있는 물건은 모조리 빼앗긴다. 그후, 그는 북경중화극원의 휴게실에 무대배경으로 칸막이를 한 작은 방에 갇혀 있으면서 수시로 끌려나와 비투(批鬪)을 당한다.
그 제자의 기억에 따르면, 마련량이 격리된 기간동안 하루는 16,7세의 여자 '홍위병'이 손에 채찍을 들고 나타나서, 소위 '흑옥(黑屋)'으로 뛰어들어가서 그 안의 모든 사람을 무릎꿇으라고 명령하고 그들로 하여금 각자 얼마의 돈을 벌었는지를 고백하게 했다. 마련량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백한 후 그 '홍위병'은 큰 소리로 질책했다: "너희는 너무 많ㅇ 벌었다. 한 사랑에게 매월 12위안의 생활비만 지급하겠다". 그리고 한번은 소위 '주자파'를 비투하는 회의를 개최하였을 때, 마련량도 강제로 비판당한다. 그의 쇠약해진 모습은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능욕과 협박으로 마련량은 온 몸이 부어서 식사를 넘길 수 없게 된다. 1966년 12월의 어느 날, 마련량은 식사를 산 후에 미끄러져서 16일에 원한을 품고 서거한다. 향년 66세였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나는 지금도 모르겠다. 내가 뭘 했다고?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모르겠다."
이때 상해에서 경극원원장, 중국희극가협회 부주석에 있던 주신방의 운명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였다. 1965년, 강청을 막기 위하여, 주신방은 상해경극원 당총지부회의에서 강청이 극단에 공연을 중지하라고 하고 오로지 '양판희(樣板戱)'만 일률적으로 공연하게 하는데 인민폐 수십만위안을 쓰는 것을 '노민상재(勞民傷財)'이고, "배우의 청춘을 낭비한다"고 비판했다. 얼마 후, 상해 <문회보>에 연속으로 주신방이 공연한 <해서상소>를 비판하는 글이 실린다. 그 이유는 '반당, 반사회주의'라는 것이다. 문혁이 발발한 후, 주신방과 아들 주소린(周少麟)은 경극원에 억류되어 문제를 자백하게 한다. 홍위병은 주신방의 집으로 쳐들어가서, 벽돌로 집에서 기르는 경견을 죽이고, 군용혁대로 며느리 민정(敏禎)을 때리고 손녀 매매(玫玫)는 얼굴을 손으로 잡아 사람들 앞에서 귀신얼굴을 만들었다. 이로 인하여 민정은 혼절하고, 매매는 미쳐버린다.
<주신방전>에 따르면, 1967년초, 주신방이 고가전선수리차에 갇혀서 길거리를 행진한다. 그는 등뒤로 두 손을 묶인 상태에서 목에 패를 걸고 군중들 앞에 섰다. 콧 속, 입가에 모두 피가 흘렀다. 머리카락은 붙잡혀 있고, 얼굴에는 멍이 이곳저곳 들어 있었다. 주신방의 부인인 구려림(裘麗琳)은 조반파에 의하여 붙잡혀가서 얻어맞아 살이 터지고, 결국 침대에 누워서 일어나지 못했다.
1968년, 장춘교는 친히 주신방을 체포하도록 승인한다. 이어 주신방의 집을 몰수한다. 그리고 주소린을 체포한다. 1969년 주씨부자는 석방된다. 그러나, 주신방의 부인은 이미 박해를 받아 죽었다. 부부, 모자는 마지막 모습도 보지 못했다. 1970년, 주소린은 강청이 바로 영화배우 남평(藍苹)이라는 말을 해서 유기징역 6년의 형을 받고는 안휘 노동개조소로 끌려간다. 1974년, 주신방은 정식으로 '반혁명'의 죄명을 쓰고 군중의 감독에 들어간다. 1975년 3월 8일, 주신방은 원한을 품고 서거한다. 향년 80세이다.
석가장경극단의 해소백은 문혁대 역시 '반동예술권위'와 '역사반혁명'이라는 모자를 뒤집어쓴다. 그는 각양각색의 비투와 체벌을 받은 외에, 청소를 하고, 불을 피우고, 화로재를 거르고, 석탄지꺼기를 줍는다. 매월 50위안의 생활비를 지급했다. 나중에는 15위안으로 줄인다. 생활수준이 하락하면서, 정신압력도 증가한다. 그는 거의 무너질 지경이었고, 급성폐염을 앓으며 나중에는 중풍으로 부분마비까지 온다.
1976년 5월, 해소백은 그를 만나러 온 제자 구양중석(歐陽中石)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와 비교적 가까운 사람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나를 신경쓰지 말라. 나는 오래된 우파이니 어쨌든 갈 수 없다. 너희들까지 연루될 수 있다. 버틸 수 없으면, 무슨 일이든 나에게 미루면 된다.' 그러나 이렇게 해도 난관을 지나갈 수 없었다. 그들(조반파)가 나에게 무엇을 물으면 나는 모조리 인정했다. 그들의 뜻에 따라 인정했다. 그러나 내가 말한 것과 다른 사람이 말한 것이 들어맞지 않았다. 그래서 나보고 솔직하지 않다고 또 뭐라고 말했다."
1977년 12월 10일, 해소백은 돌연 사망한다. 죽을 때, 남은 재산도 없었다. 그는 아들에게 낡은 모포 한 장과 장목상자 하나 그리고 못이룬 심원(心願)만 남긴다.
또 다른, 북경경극단의 부단장인 담부영은 원래부터 마음이 중국공산당을 향해 있었다. 그리하여 1959년 공산당원이 된다. 그런데, 사람들로부터 욕을 얻어먹게 된 것은 문혁때 동료들을 비판할 때 그는 온갖 말을 하 한다. 그리하여 전통적인 사람됨의 충서(忠恕)표준을 잃었다. 그후 그는 강청등에 의하여 강제로 당에서 쫓겨나고, 박해를 약간 받는다. 1977년에 담부영은 병사한다.
일대의 저명한 수생은 이렇게 그들의 예술적인 생명을 끝냈다. 만일 지하에서 이를 안다면, 그들은 누가 그들의 삶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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