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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문화

중국문화의 빛과 그림자 - "빛"

by 중은우시 2010. 9. 24.

: 주유광(周有光)

 

중국문화는 연원이 길다. 갑골문부터 계산하면 3300년이상의 문자기록이 있다. 원시적인 복무(卜巫, 점과 무술)문화이후, 춘추시대부터 청나라말기까지의 2500년간 유학을 주축으로 하여, 4차례의 변화를 겪었다: 선진(先秦) 백가쟁명(百家爭鳴), 한나라의 독존유술(獨尊儒術), 당나라의 유불병중(儒佛幷重), 송나라 명나라의 이학(理學). 청나라말기이전까지 중국문화는 제왕을 위하여 봉사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경제기초는 농업과 수공업이며, 상부구조는 주로 봉건제도였다.

 

춘추전국시대때 학자는 189()(한서.예문지)이고, 학파는 ‘유, , , , , 음양, 종횡, , 잡”등의 () 있었다(사기). 여러 학설들이 나와서 백가쟁명을 이루었고, 유가는 중의 하나였다.

 

유학의 기초를 닦은 사람은 공자(기원전551-기원전479)이다. 그는 ,, 3대의 전적을 정리하여 ‘인()’을 중심사상으로 하고, “예()”를 행동준칙으로 하는 무실학설을 창립한다. ‘인’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하게 하고, 자신이 되고 싶은 것을 다른 사람이 되게 하라’; ‘자신이 하기 싫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말라”이다. ‘예’는 전장제도와 윤리도덕이다. 공자는 가르치는데 대상을 가리지 않았고(有敎無類), 사람들을 가르치는데 싫증을 내지 않았다(誨人不倦). 인재를 기르고,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를 하여 예의의 나라를 건립하고자 했다.

 

맹자는 유학을 발전시킨다. 그는 사람의 마음이 선하다고 보았고, ‘측은, 수오, 사양, 시비’의 마음이 있어, 도덕행위를 판별하고 선택할 있다고 보았다. 공자와 맹자는 사방을 주유하며, 인의를 퍼트렸고, 백성을 나라의 기본으로 하며, 폭정에 반대했다. 맹자는 생산을 중시하여, 경작, 보어(保漁), 가축, 잠사, 호림(護林) 제창했다.

 

진시황은 형법과 폭정으로 천하를 통일한다. 분서갱유를 일으키고, 진이세가 되어 망한다. 한무제는 동중서의 건의를 받아 ‘파출백가, 독존유술’을 확립한다. 유학은 조정의 공식학문이 되고, 배움이 뛰어난 자가 벼슬을 했다. 유생은 관리로 선발되는 주요 원천이었다.

 

공맹학설은 실사구시하고 박질무화(朴質無華)하다. 동중서는 현허(玄虛) ‘음양오행’을 유학에 끌어들이며, ‘천인합일, 음양관통’의 우주관을 내세운다. 사람간의 관계를 삼강(군신,부자,부부)’과 오륜(인의예지신)으로 정리한다. 유학이 교조화 현허화한다.

 

선진시대에는 여러 나라가 병립하여, 백가쟁명했다. 한나라가 통일한 안정되자, 유술이 독존의 지위를 차지한다. 국가는 분리되었다가 통일되고, 치국의 학설도 분리되었다가 통일된다. 이것은 역사의 정상적인 과정이다. 이때 유학은 가의 학설중 유용한 성분을 받아들여, 유학의 내용이 더욱 풍부해진다. 한나라는 중국문화가 종합되고 상승되는 시기였다.

 

중국문화는 오랫동안 중국의 봉건제도를 유지보호해왔다. 농업과 수공업이 안정적으로 발전하였다. 오곡을 기르고, 양잠을 하고 옷감을 만들며, 찻잎을 기르고 볶고, 자기를 제조하며, 종이를 발명했다. 이러한 중대한 창조는 인민을 행복하게 해주고, 이웃나라에도 혜택을 미쳤다. 근대이전까지 서구, 서아시아, 남아시아의 문화와 비교하자면, 동아시아의 중국문화는 전혀 손색이 없을 뿐아니라, 오히려 한단계 발전한 상황이었다.

 

불교는 동한때 인도에서 전래된다. 위진남북조의 400년에 걸친 전파를 통하여, 당나라때는 이미 민간에까지 깊이 파고든다. 유가는 불교와의 대항에서 실패한 , 불교를 배우기 시작한다. 이리하여 불교중국화와 유가종교화가 촉진된다.

 

유학은 속세철학이다. 귀신을 논하지 않는다. “공자는 괴력난신을 얘기하지 않는다” “사는 것도 모르는데, 죽는 것을 있겠는가? “귀신은 공경하되 멀리하라” 이는 중국최초의 무신론이다. 불교는 내세(피안) 중시하고, 죽음(열반) 중시하며, 귀신을 중시한다. 사람의 생사는 신들이 관리한다. 중국문화는 내세의 현학이 결핍되어 있었는데, 불교가 틈을 메워주었다.

 

황제와 친인척들은 살아서 부귀영화를 누리므로, 가장 두려운 것이 죽고나서 죄를 받는 것이었다. 일반백성은 이번 생에서 고난을 겪었으므로, 내세의 행복을 추구했다.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가 모두 종교를 필요로 한다. 중화문화는 ‘사람’의 일원문화에서 ‘사람과 귀신’의 이원문화로 변모해간다.

 

중국민간의 원시종교는 원래 교주도 없고, 경전도 없었다. 노자와 <<도덕경>> 빌려왔다. 교의는 복잡했으며, 장생불사설은 입증된 바가 없었다. 백성들은 신을 보면 절을 하고, 불교와 도교를 구분하지 않았다. ‘유불도’는 서로 영향을 준다. ‘공석노’의 삼성은 같은 사당에 모셔지기도 한다. 효경, 심경, 도덕경은 같은 곳에서 읽혀진다. ‘삼교합일’은 세계에서 보기 드문 문화겸용이다.

 

불교는 단순한 보살상 하나가 아니다. 인도의 건축술, 천문학, 수학, 의학, 어문학, 인명학이 있고, 사람들이 듣고 보기 좋은 음악, , 문자가 있다. 강은 작은 시냇물을 가리지 않고 받는다. 당나라의 다원문화는 동아시아에 광명을 뿌린다. 한나라이래 점차 형성된 동아시아유학문화권을 형성한다. 여기에는 월남, 한국과 일본이 포함된다.

 

중화문화는 강력한 동화력을 지녔다. 염황자손을 핵심으로 하여, 계속 사방의 민족들을 동화시킨다. 그리하여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한족이 형성되는 것이다. 송나라때부터 계산하면, ,금이 중국절반을 337년간 통치한다; 몽고와 만주족이 전체 중국을 457년이나 통치한다. 외족이 무력으로 한족을 점령하고, 한족문화는 외족을 동화시킨다. 한족과 외족은 형제민족이 되고, 힘을 합하여 중국문화를 추진했다.

 

유학은 송나라 명나라에 이르러, ‘송명이학’으로 변화발전한다. 불교도교의 영향을 받아, 이학은 유학의 간판을 걸고, 실제로는 유교와 불교 내지 도교를 혼합한 것이다. 이학의 철학범주는 “이, . , , 태극’, “이일분수, 체용일원(理一分殊, 體用一源), “의리. 기질, 심신성명”등등이다. 모두 농후한 불교도교의 색채를 띈다. 유학은 고유의 기운을 잃고, 이론의 공동, 행위의 소극으로 빠져들었다. 이리하여 공자,맹자의 무실정신에서 갈수록 멀어졌다. 유가의 강상명교는 신성한 천리의 고도로 높이 받들어진다. 결과적으로 민중에게서 유리되고, 사회발전을 촉진시키는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 중화문화는 번성에서 쇠퇴로 돌아서고, 노쇠시기로 접어든다.

 

청나라때의 고증학은 이학의 부용(附庸)이다. 문자옥 공포 속에서, 문인학사들은 명철보신하다보니 그저 고증의 옛날 책무더기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중국을 천년간 배워왔는데, 청나라에 접어들어 일본은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여긴다. 중화문화는 봉건문화를 보호하는 역사의 임무를 마친 것이다. 서세동점의 조류 속에서 시대의 전환이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