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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주원장)

일본의 회량친왕(懷良親王)과 대명의 주원장(朱元璋)

by 중은우시 2012. 1. 10.

글: 정만군(程萬軍)

 

중국역사를 살펴보면, 중원에 통일국가가 들어서면 항상 사방의 주변국가를 복속시키고자 했다. 주원장도 에외는 아니다. 명나라의 개국이후 개국황제로서 1368년 즉위초에 주원장은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국서를 내린다. 국서에는 2가지 뜻을 담았다. 하나는 그들에게 조공을 바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에게 명나라를 괴롭히는 왜구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국서가 일본에 전해진 후, 일본은 그 말에 따라 조공을 바치지 않았을 뿐아니라, 주원장이 보낸 사신 7명중 5명의 목을 베어버린다.

 

천조대국이 조그마한 섬나라에 치욕을 당한 것이다. 주원장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병력을 동원하여 일본을 정복하겠다고 소리친다.

 

주원장의 전쟁위협에 대하여, 일본의 '섭정왕'인 회량친왕은 전혀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유명한 답신을 보낸다:

 

"신이 듣기로 삼황오제이래로 중화에는 군주가 있었습니다. 오랑캐(夷狄)라고 하여 군주가 없겠습니까. 하늘과 땅은 넓어서 한 주인이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우주는 커서, 여러 나라가 각각 차지하면 됩니다. 천하라는 것은 천하의 천하이지,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닙니다(蓋天下者, 乃天下之天下, 非一人之天下也). 신(臣)은 멀고 약한 왜국, 자그마한 나라에 살고 있어, 성지(城池)가 육십개도 되지 않고, 강역도 삼천에 못미칩니다. 그래도 만족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폐하는 중화의 주인으로 만승지군이며 성지만 천여개를 가지고, 강역이 백만리에 이릅니다. 그런데도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나라를 없애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늘이 살기를 발동하면 별들이 자리를 옮기고, 땅이 살기를 발동하면 용과 뱀이 나타납니다. 사람이 살기를 발동하면 하늘과 땅이 반복됩니다. 옛날에 요임금, 순임금은 덕이 있어 사방에서 찾아오고, 탕왕, 무왕은 인을 베풀어 팔방에서 조공을 바쳤습니다.

 

신이 듣기로, 천조는 전쟁을 일으킬 생각을 하고 있다는데, 작은 나라도 지키는 계획은 있습니다. 문으로 따지자면 공자, 맹자의 도덕에 관한 문장이 있고, 무로 따지자면 손자, 오자의 도략의 병법이 있습니다. 또 듣기로 폐하는 심복장수를 고르고 정예병력을 동원하여 신의 국경을 침범하겠다고 합니다. 물과 못이 있는 땅이고, 산과 바다가 있는 땅으로서 스스로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어찌 길에 무릎을 꿇고 맞이하겠습니까. 따른다고 하여 반드시 사는 것도 아니고, 거스른다고 하여 반드시 죽는 것도 아닙니다(順之未必其生, 逆之未必其死). 하란산의 앞에서 만나기 전에, 게임을 하며 노는 것을 신이 어찌 두려워하겠습니까. 군주가 이기고 신이 지면, 상국의 뜻을 만족시키겠지만, 만일 신이 이기고 군주께서 지면, 오히려 작은 나라를 도와준 꼴이 되지 않겠습니까.

 

자고 이래로 협상으로 평화를 찾는 것(講和)이 상책이고 전투를 그만두는 것(罷戰)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래야 생령이 도탄에 빠지는 것을 막고, 백성들이 고통을 겪는 것을 구해줄 수 있습니다. 이에 사신을 보내서 공경하여 말씀드리오니, 상국에서 고려해주십시오."

 

이 '명서(名書)'는 회량친왕의 탁월한 한문실력을 드러내준다. 글 내용이 비굴하지도 자만하지도 않으며, 솜 속에 바늘을 감추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천조'의 체면을 세워주는 내용이지만, 실제로는 '끝까지 한번 해보자'는 강경함을 나타낸다.

 

자그마한 일본이 어찌 감히 대명의 사신을 죽일 수 있었을까?

 

이것은 먼저 두 번의 역사사건과 관련있다. 하나는 양송의 멸망이고, 다른 하나는 원나라의 일본침공이다.

 

양송이 멸망하기 전에, 중국은 일본의 모범이었다. 양송이 멸망한 이후, 일본은 거국적으로 대송의 멸망을 애도했다. 이를 보면, 일본의 '중국에 대한 감정'은 아주 깊다고 볼 수 있다. 원나라가 건립된 후, 원세조 쿠빌라이는 "왜구의 주인이 조공을 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큰 배 7천척으로 두번에 걸쳐 일본을 정벌한다. 그러나 선박은 태풍에 다 부서진다. 일본인들은 이 바람을 '카미카제(神風)'라고 부른다.

 

배록 백년후에 한족이 다시 나라를 되찾는데 성공하였지만, 일본인들이 보기에 그 뒤를 이은 명왕조도 이미 '정통지위'를 상실한 것이다. 중국은 송나라이후 더 이상 화하문명을 숭상하지 않는다. 이는 일본사학자들의 인식일 뿐아니라, 적지 않은 해외사학자들도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있다. 모두 송나라의 멸망을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중국이 끝났다고 보는 것이다. 즉, "애산이후 중국은 없다(崖山之後, 已無中國)"(애산은 마지막 송나라황제가 죽은 곳).

 

'카미카제'를 빌어, 일본은 두 번에 걸쳐 몽골의 원나라군대를 막아냈다. 원나라에 대한 항거를 통하여, 일본은 아시아 대륙의 군대에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치게 된다. 그리고 중국을 더 이상 숭배하지 않게 된다. 몽골은 송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었지만, 일본은 멸망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주원장은 일본을 눈에 두지 않고 무시했다. 그가 보기에, 일본은 바로 '국왕은 무도하고, 백성은 도적인" 자그마한 몹쓸 나라인 것이다. 그러나, 일본 스스로는 자신이 명나라보더 중화의 정통을 이었다고 자부했다. 그들은 스스로 중화정통, 상고인(上古人)으로 자처한다. 대명황제가 일본을 멸시하자, 일본도 반응을 보인다. 일본학자는 <대명황제의 일본풍속을 묻는데 대한 답시>를 통하여 일본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국비중원국(國比中原國)

인동상고인(人同上古人)

의관당제도(衣冠唐制度)

예악한군신(禮樂漢君臣)

은옹저청주(銀瓮儲淸酒)

금도홰소린(金刀素鱗)

년년이삼월(年年二三月)

도리자양춘(桃李自陽春)

 

당송이 오히려 일본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대명과 일본이 일촉즉발의 전쟁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주원장의 계속된 핍박에도 일본의 집권자는 조그만큼도 양보하지 않는다. 그들의 '배짱'은 위의 두 가지 요인 이외에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버틸 수 있는' 원인이 따로 있는 것일까?

 

역사를 깊이 파헤쳐보면, 일본 집권자들의 '전략'적인 안목이 그 원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아마 일본이 중국에 대항한 '배짱'보다 더욱 비중이 클 것이다.

 

이것은 일본 내부의 변화와 연결시켜 보아야 한다. 당시 일본은 '남북조'시대에 처해있기는 했지만, 남조를 장악한 회량친왕은 '기세가 오르고 있었다' 남조가 강하고 북조가 약한 형국이었으며, 천하통일을 하고 팔방을 집어삼킬 기세를 지니고 있었다. 명나라사신을 죽이고, 한판 붙어보자는 국서를 보낸 것은 회량천왕의 명성을 드높였다. 그후 일본이 명나라에 글을 보낼 때면 자주 회량천왕의 이름을 빌리곤 했다. 회량천왕의 배짱은 첫째, 일본이 원나라에 항거한 카미카제의 믿음에서 오고, 둘째, 그의 전략적인 안목이 뛰어나서,주원장이 감히 정벌하러 오지 못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회량천왕의 판단근거는 중국이 자고이래로, 대륙의 역량이지만, 대외확장에는 한계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까지 섬나라를 정복한 적은 없는 것이다. 송나라이래로 중국은 대외침략을 빈번하게 받는 입장이었다. 해전에서의 승리경험은 없는 편이다.

 

그래서, 일본의 강산 절반을 차지한 그는 비록 일본의 실력이 중국을 이길 정도로 강하지 않다는 것은 알았지만, 대명황제가 감히 몽골원정군처럼 병력을 일으키지는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주원장의 '전쟁위협'은 그저 큰소리치는데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큰소리를 칠 수 있는 것이다. 싸우고 싶으면 말타고 와봐라. 나는 안 무섭다.

 

과연 일본이 생각한대로, 일본이 계속하여 불경한 행동을 보이지만, 주원장은 큰소리만 칠 뿐, 시종 경거망동하지 못했다. 그가 일본 카미카제를 두려워한 것인지 아니면 도광양회를 한 것인지는 모른다. 어쨌든 단순한 왜구로 취급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그 이후, 주원장은 후계자에게 내린 철권단서에서 명확하게 일본을 '부정지국(不征之國)"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일본의 응전서의 글자에서 체면을 차릴 빌미를 찾았다. 일본이 대명을 '천조(天朝)'로 칭하고, 스스로를 '신(臣)'으로 칭했으니, 대범하고 넓은 흉금으로 더 이상 일본사신을 죽이거나 하지 않았다.

 

주원장의 이런 조치는 겉으로 보기에는 대범한 것같지만, 실제로는 어쩔 수 없었던 일이다. 내가 너를 치지 않을테니, 너도 나를 긁지 말라. 대명시절 중국과 일본의 역량이 대등한 것은 아니었다. 대명의 국력이 분명히 일본보다는 컸다. 그러나, '국가간에 대항하는 기세'로 보면 이미 '대등한 기세'를 유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