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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누르하치)

누르하치를 죽게만든 홍이대포(紅夷大砲)

by 중은우시 2007. 6. 7.

 

 

1626년 정월, 누르하치는 군대를 이끌고 요동의 중요군사도시 영원성(寧遠城)을 공격했다. 명나라의 방어장수인 원숭환(袁崇煥)은 "민졸(卒, 민졸은 복건성 출신 병사를 의미함)" 나립(羅立)으로 하여금 3천근에 이르는 홍이대포를 쏘게 하였다. 대포는 순환하며 날아가서 만주의 귀인(貴人)을 죽였다. 현장에서 바로 사망한 것은 누르하치가 아끼던 장수 화호리(火狐狸)와 누르하치의 질손(侄孫)이었다. 그리고 누르하치가 지휘하고 있던 황룡장(黃龍帳)을 명중시켰으며, 이로 인하여 누르하치가 중상을 입고 결국은 죽음에 이르렀다.

 

왜 하필이면 민남(복건)사람이 뛰어난 활약을 보였던 것일까. 다른 성들을 다 제치고 홍이대포의 기술을 확보하고, 영원의 전투에서 누르하치에 이길 수 있었던 것일까.

 

지리위치적으로 보면, 복건성 천주(泉州) 자동항(刺桐港)은 중국동남연해의 중부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금의 대만해협과 마주보고 있다. 원나라때부터, 자동항의 해외무역과 사회경제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1291년 마르코 폴로는 자동항에서 배를 타고 페르시아만까지 이른다. 이후 페르시아의 아랍인들이 계속 들어왔고, 민남사람들과 아랍인들은 결혼하여 후손을 낳았고, 새로운 민남인이 되었다. 마르코폴로의 여행과 분투정신은 새로운 민남인들의 모범이 되었고, 1291년 마르코 폴로가 천주를 떠난 이후, 민남사람들도 그 뒤를 따라, 세계각지로 퍼져가는데, 특히 가까운 동남아각국으로 많이 떠난다.

 

중국의 다른 지역과 비교하여, 민남은 필리핀과 왕래가 비교적 빨랐다. 일찌기 명나라 만력2년(1574년)에 해적 임봉(林鳳)을 토벌하는 사건때 양측의 관리들이 접촉한 바 있었다. 당시 스페인사람들이 먼저 필리핀섬을 점령하였는데, 물자공급은 매년 오던 중국상선에 의지했었다. 그리고 싣고 오는 화물중에는 생활용품외에 화약, 철탄등 군수물자들도 있었고, 동포와 화약을 만드는 원료도 있었다. 당시 마닐라의 민남사람들은 수천에서 3,4만에 이르렀고, 빈번한 왕래는 "여송대동포(呂宋大銅砲, 여송은 필리핀을 의미함)"의 주조법을 중국에 전수시키는 좋은 환경을 조성했다.

 

명나라 만력31년(1603년) 계묘년에 "여송참안"이 발생한 이후, 죽음에서 겨우 도망친 마닐라의 민남사람들은 친히 강철, 문명, 기술의 무서움을 느꼈다. 그것은 큰칼, 긴창보다 훨씬 뛰어났다. 그들은 서양인들의 기술을 배워야만이 이러한 비극을 다시 겪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근면하고 배우기 좋아하며, 지혜로운 민남사람들은 스페인사람들의 화포를 주조하는 기법을 배웠을 뿐아니라, 중국의 선진적인 용철기술과 서양인의 주동기술을 융합시켰다. 교묘하게 동(구리)의 용점(1083도)이 철(1538도)보다 낮다는 물리적인 성질을 이용하여, 철태(鐵胎, 砲管)를 냉각시킨 이후, 다시 니모(泥模) 또는 실랍법제모(失蠟法制模)로 동벽을 주조하여, 철태를 통과시켜 바깥의 동벽이 응고할 때의 수축력을 이용하여, 포신의 압력강도를 강화시켰고, 수천근무게의 동철포관을 가진 신형 홍이대포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러한 신형 "홍이대포"는 중국의 전통적인 구형 화포를 대체했다. 구형화포의 탄약이 적고, 사거리가 짧으며, 빠르지도 곧지도 않은 약점과 미약한 대포입구의 시작속도의 시대를 벗어났고, 천하무적의 신물로 등장했다. 이뿐아니라, 민남사람들은 몰래 스페인들이 화포를 사용하는 기술을 배워, 대포의 거리측정, 조준, 각도조정, 화약장전 및 최후의 발사요령을 익혀서 대대로 전수했다.

 

전쟁은 무기의 위력과 작용에 대한 역사의 증인이다. 사르후전쟁에서 참패한지 7년이 지나서, 영원대전이 일어난다. 민남사람들이 주조한 11문의 홍이대포는 성바깥의 연무장에 설치되었다. 이 11문의 홍이대포를 둘러싸고 누르하치와의 생사대결을 벌일 것인가 말것인가에 대하여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요동전투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을 겁냈고, 대포가 부서지면 아군만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어떤 사람은 홍이대포를 적군이 사용할 수 있으니, 단철로 포의 입구를 메워버리자고 주장했다.

 

"화기파총(火器把總, 파총은 장교의 직위)"인 팽잠고(彭簪古)와 손원화(孫元化)는 북경에서 엄격한 훈련은 받은 자들이었고, 이 홍이대포의 위력에 자신감이 있었다. 그들은 "성을 굳건히 하고, 대포를 사용하면"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나립을 위시한 26명의 민남포병은 팽잠고의 전술을 지지했다. 수비장수인 원숭환은 이 11문의 홍이대포가 포신이 길고, 두터우며, 사거리가 길어서 밀집한 기병을 포격하는데 아주 유용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랑캐는 야전에 뛰어나므로 견고산 성과 대포를 사용하는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급히 성바깥의 11문의 홍의대포를 성내로 옮겨오게 하고, 동, 서, 남, 북의 4곳 성에 설치한다. 동시에 팽잠고에게 동, 북방의 지휘를 맡기고, 나립에게 서, 남방의 지휘를 맡겨 서로 호응하도록 한다.

 

전쟁의 결과는 나립이 조준하여 발사한 3천근무게의 홍의대포가 누르하치의 질손(侄孫)과 애장 화호리를 죽였고, 누르하치 본인도 나립이 발사한 포에 황룡막장이 명중되어 중상을 입고 결국 죽고말았다. 연원대첩은 명나라에서 무순을 함락당한 이래 첫번째의 승리였다. 명나라 희종은 기뻐서 "이 7,8년이래로 가장 뛰어났다. 그동안 막혔던 가슴이 다 뚤린다"고 하였다.

 

천계6년 3월, 최대의 공을 세운 홍이대포는 "안국전군평요정로대장군"에 봉해지고, 팽잠고는 지휘작전의 공로로 도독의 계급을 얻고, 대포를 조종했던 민남병사 나립은 '파총'으로 승진한다.

 

[참고]

 

명천계6년, 명나라군대가 영원성에서 누르하치에게 상처를 입힌 홍이대포는 누가 만들었는가? 그리고 누르하치는 누구에게 포를 맞아 죽었는가? 이 두가지 역사적인 의문은 지금까지도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2005년, 복건 석사자박물관은 민간에서 수집한 명나라 병부상서 황극찬이 그의 당형 황극립을 위하여 쓴 묘지명을 찾았다. 묘지명이라는 물증과 <<명사>>의 관련 사료를 살펴보니 역사의 수수께끼가 드러났고, 이 두가지 역사적 사실이 명확히 확인되었다: 민남사람이 주조한 홍의대포는 누르하치의 군대에 큰 피해를 입혔고, 누르하치는 "복건병사"가 쏜 홍이대포를 맞아 중상을 입고 죽은 것이다.

 

<<황극립묘지명>>은 50센티미터, 30센티미터, 두께 3센티미터의 청초석위에 쓰여 있다. 해서 작을 글씨고 영원대첩에서 전공을 세운 민남사람은 황극찬이 질손 황주환에게 부탁하여 천주 동안에서 모집해온 사람중 한 명이라는 것이다.

 

"나(황극찬)는 병부상서로 있으면서, 누르하치가 요양을 공격하여 경사가 크게 놀랐다. 나는 형의 손자인 황주환으로 하여금 동안(천주부 동안현)에서 여송포(즉, 홍이대포)를 잘 주조하년자 14명을 모아서 북경으로 불렀다. 30문을 주조하여 그중 6개를 요로 보냈고, 원숭환에게 수비하라고 했다. 남경에서 데려온 대포를 사용할 줄 아는 자 30인도 함께 보냈다. 그 중의 한 대포의 무게는 3천근인데, 참장 이병성이 가지고 봉집보를 수비했다.  오랑캐장수 화호리가 2만명을 이끌고 성을 공격할 때, 1발로 적 800명을 죽였고, 2명의 장수를 죽였다. 바로 화호리와 누르하치의 질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