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누르하치)

누르하치는 왜 장남을 죽였는가?

중은우시 2007. 8. 6. 13:15

 

추잉(褚英)은 누르하치의 첫번째 대푸진(大福金, 청나라는 부인을 푸진이라고 함. 나중에 한자식으로 元妃라고 함)인 퉁가씨(佟佳氏) 소생의 장남이다. 용감하고 지혜가 있었으며, 전투에 능했고, 경험이 많았으며, 전공을 많이 세웠다. 명나라만력26년(1598년) 정월, 누르하치는 막내동생인 바야라(巴雅喇), 추잉과 가가이(噶蓋), 페이잉동(費英東)으로 하여금 1천의 병사를 거느리고, 동해여진 안추라쿠루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이때, 추잉은 겨우 17살이었다. 그러나 그는 험한 역경도 두려워하지 않고 갑옷을 입고 전장터에 나서 병사를 이끌고 재빠르게 전진했다. 밤낮을 달려 둔채 20곳을 취하니, 나머지 둔채들도 항복하였다. 이 전투에서 얻은 사람과 가축이 만여를 헤아렸고, 대승을 거두고 귀환했다. 누르하치는 이 미성년인 장남에게 "홍바투루(洪巴圖魯, 바투루는 만주어의 baturu로서 용사라는 의미이다)"라는 칭호를 내렸다.

 

이번 출정은 누르하치의 건국과정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이정표였다. 거병한 초기에는 주로 누르하치가 직접 병사를 이끌고 전투에 참전했다. 둘째 동생인 무르하치(穆爾哈齊), 셋째 동생인 수르하치(舒爾哈齊)와 함께 전투에 참전했고,일부 친족들도 가담했다. 어이두(額亦都), 안페이양구(安費揚古)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만력16년(1588년) 허허리(何和禮), 베이잉동, 후르한(扈爾漢)등 세명의 부장이 무리를 이끌고 가담했으며, 이들 오대신(五大臣)은 전투에 참전한 주요한 장수들이었다. 만력26년(1598년) 안추라쿠루를 정벌한 때로부터, 누르하치의 아들과 보카들인 뻬이러(貝勒), 타이지(台吉)등이 직접 사방으로 전투에 참전하는 국면이 형성된다. 비록 오대신등 개국원로들이 여전히 주요한 장수이기는 하였지만, 군사통수권은 대부분 뻬이러, 타이지등이 직접 장악했다. 이것은 누르하치의 지위를 높여주고, 그의 통치권력을 강화시키며, 종실귀족을 형성시키는데 중요한 작용을 한다.

 

만력35년(1607년) 2월, 수르하치, 추잉, 다이샨(代善, 누르하치의 둘째아들), 베이잉동, 후르한, 양구리(揚古利)등은 병사 3천을 이끌고, 비우성(蜚優城)이 여진에 귀순하는 것을 접수하러 가는데, 도중에 우라(烏拉)의 만명의 병사들과 만나 교전을 벌이게 된다. 이때, 수르하치, 추잉, 다이산은 각각 병사 5백씩을 이끌고, 후르한, 베이잉동의 두 대장이 각각 3백씩을 이끌고, 나치부샤(納齊布蝦)와 샹수(常書)가 각각 1백씩을 이끌고(양구리의 병력수는 미상임) 싸웠다. 누르하치의 흥망성쇠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이 전투에서, 세명의 뻬이러가 �느 병사는 전군총수의 1/2을 차지했다. 이것만 보더라도, 그들이 전투에서 차지한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누르하치는 추잉이 "용감하게 선봉에 섰다"는 이유로 "아르하투투먼(阿爾哈圖圖門)"이라는 칭호를 내린다. 아이하투투먼은 만주어로 아이하는 aiga로 계책, 계모가 있다는 말이고, 투먼(tumen)은 만(萬)이라는 뜻이므로 직역하면 "만가지 계책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청나라 사람들은 추잉을 광략패륵(廣略貝勒)이라고 불렀다. 이것으로서도 추잉이 용감하면서도 계책이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명만력41년(1613년)이후 전공이 혁혁했던 누르하치의 "황장자(皇長子)" 추잉은 돌연 사라졌다. <<청태조실록>>에서 다시는 그의 이름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가 직위를 가졌는지 아닌지, 어떤 공을 세우고 과오를 저질렀는지, 언제 죽었는지, 병사인지 전사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로 죽었는지에 대하여 아무런 기재가 없다.

 

35년이 흐른 이후, <<청세조실록>> 제37권에 비로소 처음으로 그가 언급된다. "태조의 장자로 일찌기 패란(悖亂)을 일으켜, 국법에 처해졌다". 그리고 다시 60년이 흘러, 강희제가 "예전에 우리 태조고황제때, 여러 패륵, 대신이 알고(訐告)한 사건으로 인하여, 아르하투투먼 뻬이러 추잉이 법에 처벌을 받았다"고 지적했다. 이후, <<청사열전>>의 권3 <<추잉전>>에 비로소 간략히 이렇게 기재된다: "을묘(1615)윤8월, 추잉은 죄를 받아 주살되었고, 작위가 박탈되었다"

 

그런데, 도대체 패란은 무엇을 가르키고, 알고는 무엇을 몰래 고변했는지, 어떤 죄를 범했는지는 자세히 적고 있지 않다. <<만문노당(만주어 옛기록)>>을 보면, 이 사건의 진상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추잉의 일생을 기록한 진귀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아래에 그 내용을 소개하기로 한다. <<만문노당. 태조>> 권3에 이렇게 기재되어 있다:

 

총예공경한(聰睿恭敬汗, 누르하치를 가리킴)은 하늘의 도움을 받아 큰 나라를 만들었고, 정권을 장악했다. 총예공경한은 생각하여 말하기를 "만일 여러 아들이 없었다면 내가 어찌했겠는가. 나는 이제 여러 아들로 하여금 정치를 하게 하고자 한다. 만일 장남이 정권을 잡으면, 장남은 어려서부터 편협하여, 넓과 다른 사람을 포용하는 마음이 없다. 만일 동생에게 넘겨주면, 동생은 형을 돌보지 않을 것이고, 권한을 넘으려 할 것이니, 어찌 동생에게 권력을 넘기겠는가. 만일 내가 장남을 거용하면, 대권을 장악한 후, 편협한 마음을 버리고, 마음을 공명정대하게 가지지 않겠는가. 그래서 장남 아르하투투먼에게 정권을 장악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장남은 전혀 공평하게 한부(汗父, 누르하치)가 위임한 국가대사를 처리하지 않고, 한부가 친히 등용하여 길러온 오대신을 이간시켜서, 한부를 고뇌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총예공경한이 아끼는 네 아들을 괴롭히며 말하기를, "여러 동생들, 만일 이 형의 말을 거역하지 않으려면, 내가 한 모든 말을 부친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맹세해라"라고 하면서 밤중에 맹서를 키셨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한부가 일찌기 너희들에게 좋은 비단과 말을 내렸는데, 한부가 만일 죽으면 너희에게 비단과 말을 내릴 수 있겠는가?" 그리고 또 말하기를: "내가 한위에 즉위하면, 나와 관계가 나빴던 여러 동생과 대신들은 죽여버리겠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괴롭혀도, 네 동생과 다섯 대신의 괴로움을 총예공경한은 모르고 있었다. 네 동생, 다섯 대신은 서로 상의한 후, "한께서는 우리가 이처럼 고난을 겪는 것을 모르고 계신다. 만일 한에게 고하면, 권력을 잡은 아르하투투먼이 두렵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자를 두려워해서 고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살아있는 의미가 무엇이냐. 그는 한이 만일 죽으면 우리를 돌보지 않겠다고 하니, 우리의 생계가 끊어지는 것이니 곧 죽는 것이다. 이 고민을 한에게 고하자"라고 하였다.

 

네 동생과 다섯 대신이 상의한 후에 한에게 고하였다. 한이 말하기를 "너희가 이렇게 말로 고하면 내가 어찌 다 기억하겠는가. 글로 써서 달라"고 하였다. 네 동생, 다섯 대신은 각자 글로써 자신이 고통겪은 바를 기재해서 한에게 올렸다. 한은 이 글을 가지고, 장남에게 이르기를 "이것은 너의 네 동생과 다섯 대신이 네가 잘못한 점을 글로 써서 올린 것이다. 네가 읽어보아라. 너에게 무슨 할 말이 있으면 너도 글로 적어서 반박해 보아라"라고 한다. 장남은 "저는 변명할 말이 없습니다"라고 한다.

 

총예공경한이 이르기를: "너에게 변명할 말이 없다면, 네가 확실히 잘못한 것이다. 내가 늙고 전쟁에 참여할 수 없고, 국가대사를 결정할 수 없어서 너에게 정치를 맡긴 것이 아니다. 나의 뜻은, 내 곁에서 같이 자란 여러 아들이 공동으로 정치를 하는 것이고, 여러 사람의 중의를 쫓아 따르는 것이다. 부친으로서 간섭할 수는 없지만, 여러 아들이 같이 정치를 한다면, 반드시 네 말을 들을 것이다. 국가정치를 담당하는 한, 패륵은 마음이 넓어야 하고, 공평하게 사람을 대해야 한다. 만일 이처럼 부친이 낳은 네 동생과 부친이 기용한 다섯 대신을 이간질시키면, 내가 어떻게 너에게 정치를 맡기겠는가? 생각을 한 후에 이르기를: 너의 동모소생 형제 두명에 각각 5천호, 8백가축, 은만냥, 칙서80도를 주고, 나의 다른 애첩소생의 여러 아들들에게는 무리와 칙서를 모두 조금만 주었다. 네가 이처럼 편협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네가 가진 무리와 가축등 물품을 가지고 여러 동생들과 동등하게 나누어라.

 

가을에 우라를 정벌할 때, 장남이 편협한 것을 알고, 믿을 수가 없어, 동모소생의 동생인 구잉바투루(古英巴圖魯)를 남겨서 성을 지키게 하였다. 봄에 다시 우라를 정벌할 때도 역시 장남을 믿지 못하고, 망구얼타이(莽古爾泰) 타이지와 사패륵 둘째동생을 남겼다. 두번 우라를 정벌하면서, 모두 장남을 데려가지 않았고, 집안에 남겨진후, 장남은 심복인 네명의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나의 무리를 동생들과 동등하게 나눈다면, 나는 살 수가 없다. 나는 죽고자 하니, 너희들도 나와 함께 죽겠는가?" 그러자 네 신하는 말했다: "패륵, 당신이 만일 죽으면, 우리도 당신을 따라 죽겠습니다." 나중에 한이 우라를 정벌하러 떠난 후, 장남은 한부가 이처럼 큰 나라를 치러 갔는데도 승패여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로지 글을 써서 부친과 여러 동생 및 오대신을 저주했고, 하늘과 땅에 고한 후 불태웠다. 이어서 심복들과 신하들에게 "우리 병사가 출전했는데, 우라에게 패하기를 바란다. 전쟁에서 패하면, 나는 부친과 동생들이 입성하지 못하도록 하겠다" ...(신하가 이 일을 누르하치에게 고했다). 총예공경한은 장남을 죽이면 나중에 여러 아들들에게 나쁜 선례가 될 것같아서, 죽이지 않았다. 장남 아르하투투먼이 34세가 되었을 때, 계축년 3월 26일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집에 연금되었다. 2년후, 전혀 회개하지 아니하여 주살되었다.

 

이상의 자료를 분석하면, 추잉의 일생에 대한 기본적인 상황은 알 수 있게 된다. 전공이 혁혁했고, 후계자로 세워졌었고, 국정을 담당했었고, 한의 권력을 다투었고, 부친에 대하여 불만이 있었고, 결국은 부친에게 참살당했다.

 

첫째, 추잉은 여진국의 창립과 발전에 공헌을 세운다. 기록은 처음에 바로 누르하치가 "여러 아들이없었다면" 큰 나라를 만들 수 없었을 것이라고 회고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이것은 명백하게 누르하치가 나라를 세우고 발전시키는데, 여러 아들들의 공로가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추잉은 가장 먼저 참전하고, 여러번 적을 무찔러서 공헌이 특출났다.

 

둘째, 추잉은 후계자로 세워졌었고, 부친을 도와 정사를 담당했다. <<청태종실록>>등의 책에서도 모두 이렇게 말한다. "태조는 초기에 제업을 이루겠다는 마음이 반드시 있었던 것도 아니고, 후계자를 두겠다는 논의를 한 것도 아니었다" 이것은 청태종(홍타이시)가 게승한 것에 대하여 복선을 깔아놓은 것이다. 그러나, 만주어옛기록은 분명히 <<청태종실록>>의 이 내용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준다. 누르하치는 분명히 후계자문제를 생각했고, 추잉으로 하여금 정권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볼 때, 추잉은 확실히 누르하치의 후계자로 확정되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셋째, 추잉은 누르하치와 네 동생들과의 사이에 격렬하게 통치권력을 놓고 다투었다. 만주어옛기록에는 추잉이 성격이 편협하고 네 동생과 다섯 대신을 학대한 것으로 나와 있다. 사실, 이것은 마음이 편협한 것과 관련한 문제는 아니다. 추잉과 누르하치, 네 동생간에 국가대권을 놓고 다툰 것으로 보아야 한다. 네 동생 즉 다이산, 아민, 망구얼타이와 홍타이시는 모두 권세가 있는 패륵들이다. 그들의 수하에도 많은 장수가 있었고, 여러번 출정했으며, 누르하치의 총애를 받았다. 누르하치가 동생인 수르하치를 제거한 이후 각 기(旗)와 우록은 아들과 조카에게 배분했으므로 이들은 모두 각 기를 거느린 주인이었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최고권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는 아들과 조카들에게 하사할 수도 있었고, 바꿀 수도 있었고, 회수할 수도 있었다. 누르하치 즉 총예공경한이 바로 각기의 주인이고, 각 패륵과 타이지를 승격시키거나 징치할 수 있는 권력이 있었다. 추잉의 경우는 좀 달랐다. 권력이 부친만큼 크지도 않았고, 그저 부친의 명을 받아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었다. 원래 대푸진이 낳은 "황장자"의 신분과 후계자의 신분으로 친히 5천호를 관장하고, 여러번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여 전공을 세웠다. 그가 네 동생을 괴롭힌 것은 원래 네 동생과 그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우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가 후계자가 되었으니 위엄을 세워야 했다. 그러나, 네 동생은 모두 누르하치의 총애를 받는 아들들이었으므로, 그가 다루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위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동생과 대신들에게 자기가 한위에 오르면 재물을 나눠주지 않을 것이고, 죽여버릴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이것은 바로 아직까지는 그가 후계자이고 정사를 맡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재물을 나눠줄 권한이나, 죽일 권한은 없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바로 이런 국면에서 추잉은 비록 동생들을 괴롭히지만, 동생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공동으로 누르하치에게 밀고하게 되는 것이다. 추잉의 입장에서는 세력이 강대한 네 동생이 있고, 누르하치가 친히 기용한 다섯 대신이 있다면 추잉의 자리는 한위를 승계하더라도 공고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의 통치권력은 크게 제한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가 한위를 확실히 승계하려면 네 동생과 다섯 대신에게 타격을 가해야 했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 네 동생과 다섯 대신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추잉의 편협과 학대 그리고 네 동생과 다섯 대신의 밀고는 실제로 추잉과 누르하치간의 권력다툼이고, 추잉과 네동생간의 권력다툼에 다름아닌 것이다.

 

넷째, 추잉은 불만을 품고 있었고, 결국 부친에게 참살당한다. 네 동생, 다섯 대신이 누르하치에 밀고하였다. 누르하치는 만력11년(1587년)에 13개의 갑옷을 가지고 기병한 후 30년을 싸워왔고, 정치풍상을 겪으면서 어렵게 강대한 나라를 만들었다. 그는 창업이 어려움을 잘 알고 있으면서, 더더구나 권력을 향한 투쟁이 잔혹하고 무정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30여세된 추인이 이렇게 행동하고 마음 쓰는 것을 어찌 노련한 누르하치가 모를 리 있겠는가? 누르하치는 매우 화를 냈고, 그를 혼내고, 방비했다. 추잉은 한위를 계승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자, 분노가 폭발했고, 죽겠다는 마음을 가진다. 그리고 부친과 네동생, 다섯대신을 저주하기까지 한다. 이 일이 부친에 발각되면서 연금되고 참살당한다. 나이 36세의 광략패륵은 이렇게 세상을 떠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