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조세룡(趙世龍)
정신계인비교자(精神界人非驕子)
윤락감가이우사(淪落坎坷以憂死)
섭감노(聶紺弩)의 이 싯구는 1949년이후 지식인들의 처지를 잘 보여준다. 신문계의 사람은 정신세계중 가장 민감하고 가장 정치사회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그들이 난감한 처지에 빠지고, 걸핏하면 잘못을 저질렀다고 질책을 받아 다른 직업군과는 차이가 있다. 서주성(徐鑄成), 범장강(范長江), 등탁(鄧拓), 운일군(惲逸群), 왕약수(王若水), 흠본립(欽本立) 이런 이름들을 들으면 정말 옥수조상(玉樹凋傷)의 탄식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양기(楊奇) 선생은 '윤락감가'의 중국신문계에서 특이한 사례이다. 그는 1940년대에 홍콩에서 <정보(正報)>를 창간하고, 나중에 <화상보(華商報)>의 대리총편집장을 지냈다. 건국초기에는 <남방일보(南方日報)>를 창간하는데 참여했고, 1957년에는 <양성만보(羊城晩報)>를 창간하고 주재했다. 8,9십년대에 이르러서는 다시 홍콩 <대공보(大公報>)를 장악한다. 2008년에 이르러 그는 86세의 고령으로 여전히 신문간행물에 글을 발표하여, '문인이 신문을 만든다'는 말의 핵심을 실천했다. 육십년간, 비록 역경도 겪었지만, 여전히 들은 바를 존중하고 아는 바를 행하며, 초지일관했다. 그가 반세기동안 만든 신문을 살펴보면, '육십여년이 꿈만 같다'는 탄식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양기선생의 경력은 광동홍콩 두지역 신문사의 중요한 내용이다. 그 심층적인 가치는 더욱 발굴해야 한다. 그를 단서로 하여, 세상에 감추어져 있던 신문유파를 추적해보기로 하자. 이 유파는 각자 독특한 가치관과 신문풍격을 지니고 있다. 이에 대하여 다시 한번 살펴보는 것은 후세인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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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색신문역사상 양대유파가 있다. 신문의 풍격상 두 개의 봉우리가 대치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고, 강물이 둘로 나뉘어 흐른다고 할 수도 있다.
중공서북국, 화북국(전신 북방국도 포함)이 영도한 연안의 <해방일보(解放日報)>, 진찰기변구의 <진찰기일보(晋察冀日報)>를 기지로 하는 것을 우리는 북방유파(北方流派)라고 부른다. 중요인물은 육정일(陸定一), 호교목(胡喬木), 등탁, 오냉서(吳冷西), 호적위(胡績偉), 범근(范瑾), 안강(安崗), 목흔(穆欣), 장춘교(張春橋)등을 디표로 한다.
중궁남방국이 영도한 중경의 <신화일보(新華日報)>, 계림의 <구망일보(救亡日報)>, 홍콩의 <화상보>를 기지로 하는 것을 우리는 남방유파(南方流派)라고 부른다. 중요인물은 하연(夏衍), 범장강, 호유지(胡愈之), 호중지(胡仲持), 소종한(邵宗漢), 운일군, 김중화(金仲華), 요말사(廖沫沙), 유사모(劉思慕), 양기, 황문유(黃文兪), 이자송(李子誦), 이협문(李俠文) 그리고 흠본립등을 대표로 한다.
북방유파의 신문은 공산당이 집권한 지구에서 발행되었고, 주로 기관보의 형식으로 나타났다. 남방유파의 신문발행은 비공산당통치지구에서 발간되었고, 좌익의 '재야파신문'의 형식으로 나타났다. 이것이 양자의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북방유파의 신문은 1930년대말에 나타난다. 그러나 진정 성숙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은 '연안정풍(延安整風)' 특히 1942년 4월의 <해방일보>의 개판(改版)으로 육정일이 신문을 주도한 것을 표지로 한다. 이렇게 하여 북방유파의 신문은 확립된다: "신문은 당의 목과 혀(喉舌)이다"(1942년 9월 22일 <해방일보> 사론 <당과 당보>). 당시 이것은 전당에 모택동사상의 영도적지위와 관계있다. '북방유파'의 중요성과 당내의 정통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남방유파의 활동은 비공산당통치지구에서 있었다. 신문창간은 당의 '통일전선공작'과 표리의 관계에 있다. 그들은 재야파의 면목으로 나타난다. '문인판보(文人辦報)'의 기치를 높이 들고, 지식분자의 정치논의방식으로 '백구(白區)'의 사회에 영향을 미친다. 소위 '문인판보'는 청나라말기 왕도(王韜), 양계초(梁啓超)등에서 기원한다. 그들은 바로 신문출판의 방식으로 구식선비들이 현대적 지식인으로 변신하였다. 그들은 옥립된 입장에서 날카롭게 비판하여, 당시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다. 여기서 말하는 '문인'은 일반적의미에서의 문인이 아닏다. 공공지식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나중에 '문인판보'의 전통은 <신보(申報)>, <대공보>에서 계승된다. 중공남방지구의 신문은 전통적이고 자연발전적인 지역에서 발간되었으므로, 그들은 많은 경우 사량재(史量才)의 <신보>, 장계란(張季鸞), 호정지(胡政之)가 운영하는 <대공보>등을 본받았다. 그들중 일부 사람은 혁명에 참가하기 전에 <신보> <대공보>에서 일을 한 바 있었다. 그래서 그 영향을 깊이 받았다. '북방유파'는 비교적 일찌감치 소련의 <프라우다>의 옇양을 받는다. 이것은 남북양파의 '근원'상의 차이점이다.
남방유파는 홍콩에서 신문을 운영한 경험이 있다. 이들 홍색신문인들에게 더욱 깊은 '남방'의 인상을 직게 된다. '2차대전'후 영국인이 통치하던 홍콩은 신문검열을 폐지한다. 중국공산당의 영도하의 <화상보>는 이같이 민주는 없으나, 법치, 개방, 자유가 있는 환경하에서 신문을 만들었고, 아주 좋은 선전플랫폼을 찾아낸다. 첫째, 이 '법치사회'에서 그들은 법률무기를 충분히 이용하여 합법적인 신문의 신분으로 이치에 맞고, 유리하고, 절개있는 여론공세를 펼친다. 둘째, 이 '개방사회'는 발달되고 다원적인 정보를 이용하여 국제적인 시야를 전개한다. 셋째, 이 '자유사회'는 홍색신문인들의 민중의 알 권리에 대한 천연적인 존중을 양성한다. 이 세 가지는 남방유파가 북방유파와 스타일에서 다른 점이다.
인원의 성분으로 보면, '북방유파'는 비교적 순수하다. 기본적으로 청일색의 당의 선전전선간부들이다. '남방유파'는 통일전선임무를 겸비하여, 명백한 '계단식'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하연, 요말사, 양기등은 공산당원이었다. 김중화, 소종한은 비밀당원이었다. 유사모는 당의 외곡조직인 볼세비키였다. 이들은 많은 좌익, 중간의 신문인과 문화인과 단결했다. 이 전선은 1948년말, 1949년초에 최전성기를 이룬다. 이때 홍콩에는 <화상보>와 <대공보> <문회보>가 대연합을 하는 국면이 형성된다. 교관화(喬冠華)는 신화사홍콩분사를 대표하고, 하연, 유사모는 <화상보>를 대표하고, 왕운생(王芸生), 이순청(李純靑)은 <대공보>를 대표하며, 서주성, 양배신(楊培新)은 <문회보>를 대표하여, 정기적으로 만나서 회합을 가지고 여론을 주도하며 국내외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신중국의 성립과 더불어 이 전선은 홍콩에서 국내로 들어와서 분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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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방유파'는 '북방유파'와 상대적으로 말해서 더욱 현대신문의 '정종'에 가깝다. 그러나, 당내에서 특히 '백구'의 배경을 지니고 있어, 또 다른 '재야'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1937년말, 주은래(周恩來)는 태원(太原)으로 가서, 중공북방국서기 유소기(劉少奇)와 협의한다. "주은래가 무한(武漢)으로 가서 <신화일보>의 화북판을 발간한다. 이 일에 대하여 모택동(毛澤東)은 불쾌하게 생각했다. 연안(延安)에도 신문을 만들 수 있는데, 왜 화북판을 내놓지 못하는가? 그저 <신화일보>의 화북판으로 발간하는가? 나중에 사실이 증명한다. 북방신문은 남방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 뿐아니라, 자신의 정통지위를 건립한다. 모택동의 이 몇 마디 말은 일정한 의미에서 중국공산당신문의 남분구분과 정(正)과 편(偏)을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신화일보>는 원래 모택동에 의하여 과장된 언어로 칭찬받은 바 있다: "팔로군, 신사군과 마찬가지로 당이 영도하는 또 하나의 방면군이다." 그러나 실제로 신임을 받지는 못했다. '연안정풍'때, <신화일보>는 강생(康生)에 의하여 '완전히 국민당의 신문이 되었다. 많은 반공언론이 포함되어 있다."고 비난받는다. <신화일보>는 비판받았고, 당시에 '교조파'의 대표로 취급되던 왕명(王明), 박고(博古), '경험파'의 대표인 주은래와 깊은 연원이 있다.
'남방유파'의 신문은 중앙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통일전선역량을 뛰어나나, 공작지도능력은 약했다. 그래서 그의 주도적 지위는 '북방유파'만 못했다.
1949년 인민해방군이 남하하면서, 공산당이 전국을 통치하게 된다. 북경에서 범장강이 중공중앙기관보 <인민일보>의 사장이 된다. 호유지, 소종한은 차례로 <광명일보>를 주관한다. 상해에서 하연이 시위 선전부장이 되고, 운일군이 상해 <해방일보>를 주관한다. 김중화, 유사모는 <신문일보>를 주관하고, 서주성은 <문회보>를 주관한다. 광주에서, 양기, 황문유는 차례로 <남방일보>를 주관한다. 1949년말에서 1950년초, '남방유파' 는 전국신문계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들 "남방홍색신문인"들이 혁명승리후, 금방 '승리후의 불안감'과 '집권후의 부적(不適應)'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하여, '남방유파'의 대표인물인 하연은 <난심구몽록>의 마지막 편에서 2,3십페이지의 지면을 할애하여 이 단계의 '부적응'에 대하여 적었다. 거기에는 해방후 신문의 '비습관'이 포함된다. 그는 신문규율위반에 대한 불안을 가졌는데 기실 이것은 그가 집권환경에서 자아상실의 불안이었다. 문인들이 정치를 논하기 어렵다는 불안이었다. 하연은 <장강의 도로>라는 글에서 그와 범장강의 대화를 기록하고 있다. 후설(喉舌)이 인민을 위하여 말하지 않으면, 그게 무슨 후설인가? 범장강은 대답한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우리는 사회주의국가이다. 소련과 같다.
기실 범장강 본인이 최대의 '부적응자'였다. 범장강은 1952년 신문계에서 물러난다. 이는 '남방유파'가 소퇴(消退)되는 중요한 표지이다. 나중에 하연은 이에 대하여 명확하게 분석한다. 해방이후 범장강의 재능과 역할을 발휘할 수 있느냐 없느냐. 이것은 소련모델 혹으 스탈린모델이 조성한 현상이다.
'남방유파'의 소퇴는 1950년대에 집중된다. 대량의 '남방신문인'들은 신문계를 떠나서, 경제계, 외교계로 진입한다. 더 많은 사람들은 각종 원인으로 강제퇴출되고, 북방유파가 대체했다.
북경에서 범장강은 1950년 1월 <인민일보> 사장이 되고, 1952년 물러난다. 등탁이 사장직을 승계한다. <광명일보>는 민맹(民盟)의 기관보이다. '남방유파'의 공산당원인 호유지, 소종한이 차례로 주필권한을 가졌다. 나중에 '북방유파'의 상지청(常芝靑), 목흔이 대체한다. 그동안 '반우파운동'은 또 다른 이슈였다.
상해에서, 1951년 9월, 운일군은 상해 <해방일보> 사장직에서 면직된다. <진찰기일보>출신인 장춘교가 대체한다. 1954년, 하연은 더 이상 시위 선전부장을 맡지 않고, 중앙정부 문화부로 전속된다. 이때부터 신문계에서 완전히 떠나게 된다. 1955년 6월, <인민일보>(화북국기관보) 출신인 위극명(魏克明)이 <신문일보>의 당조직 서기로 온다. "김중화, 유사모의 면모로 간행되던 <신문일보>"는 그 후에 변화한다. 1957년, <문회보>는 반우파운동에서 제일 먼저 타격을 받는다. 서주청은 '양모(陽謀)'에 빠진다. 흠본립은 아주 특별한 이유로 화를 면한다. 1960년, <신문일보>는 정간된다. 그러나, <문회보>, <신민만보>는 여전히 '남방유파'의 신문인들이 운영하고 있었다.
광주에서 양기선생은 건국후 일개 신문인으로 여리박빙하듯 조심스럽게 영남지역에서 생활한다. 비록 한때 '부패'사건에 억울하게 몰린 적이 있으나, 그는 수치심을 무릅쓰고 참으며 마침내 재기한다. 1957년 <양성만보>의 창간에 참여한다. 그리고 '문혁'때 다시 타도된다. 10년간의 호겁(浩劫)이 지난 후, 다시 홍콩으로 가서 중공 홍콩마카오공위 선전부장을 맡아. 6개의 중국계 신문을 관장한다. 이어서 <대공보> 사장을 맡아, 홍콩과도기에 큰 공헌을 한다. '남방유파'의 특색은 양기 선생에게서 명확히 나타난다. 이는 아주 특이한 경우라 아니할 수 없다.
중국신문계는 기본적으로 '북방유파'가 주도한다. '남방유파'의 인원은 지키는 것도 쉽지 않았다. 풍격을 유지하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문혁 10년은 말할 것도 없고, 5,6십년대의 '남방유파' 풍격은 겨우 상해와 광주에만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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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의 통치하에, 평화적 환경에서 신문은 어떻게 만들 것인가? 신문은 사회구조에서 무슨 지위를 차지할 것인가? 이것은 남북 신문인들을 고민하게 한 문제였다.
양기 선생은 '문혁'전에 이렇게 말한다. <양성만보>는 "당과 정부의 이목이자 후설이다. 동시에 인민의 이목이자 후설이다." 이것은 1960년대에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컸다. 이것은 '남방유파'의 초기 호각의 회향이다. 기실 일찌기 1942년 9월 18일 <신화일보> 사론에서 자신에게 "중공당보의 품질과 인민대중 후설의 작용을 충분히 갖추어야 한다." 고 말한 바 있다(이는 <해방일보>가 사론을 통하여 스로의 자리매김을 "당의 후설이다"라고 한 때로부터 4일이 지난 때이다). 1947년 주은래는 <신화일보> 창간 9주년을 축하하는 글을 써보낸다: "인민의 후설이 되고, 인민의 향도가 되라." '인민후설'은 남방유파가 버릴 수 없는 정서이다.
1980년대초, <양성만보> <신민만보>의 복간을 표지로 하여, '남방유파'가 부활한다. 이와 도잇에, '북방유파'의 호적위는 '당성'과 '인민성'의 통일문제를 제기한다. 이는 북방유파에 큰 논쟁을 일으킨다. 호교목등으로부터 강렬한 비판을 받는다. 바로 이 때, '남방유파'가 보기에, '인민성'은 이론 문제가 아니었다. 실천문제였다. 1980년대 중엽, <광주일보>의 개판때, 황문유는 '행존(行尊)'의 신분으로 신문사에 제기한다: "1판은 당위에 제출하고, 나머지는 군중에게 주라." 이 말은 <광주일보>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한다. 전체 광동의 신문계에도 많은 계시를 남겼다. 오유항(吳有恒)이 <양성만보>의 복간을 주재하는데, 사론칼럼을 "가담항의(街談巷議)"라고 명명했다. 여기에 글을 올릴 때는 당정부문을 자주 '당국'이라고 불렀다. 상해에서, 남방유파의 옛 신문인인 흠본립이 <세계경제도보>를 민영신문의 신분으로 세상에 내놓는다. 이들 남방유파의 신문인들은 행사방식이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 내면에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민간으로 돌아가고, 자신은 재야라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혁명당인이다. 모두 일찌기 공산당의 승리를 위하여 고난을 겪었다. 그러나, 그들이 보기에, 집권은 그저 수단이다. 혁명의 목표가 아니다. 공평, 정의, '인간의 전면적 발전'이야말로 그들의 지고무상한 이상이다. 그들의 권력의 이화(異化)에 고도의 경계심을 나타냈다. 정부가 사회의 수야인(守夜人)이지만, 신문은 권력의 수야인이 되어야 했다. 그들의 마음은 집권당을 향해 있지만, 그들의 눈은 민간에 돌아가 있다. 기한의 만료가 없는 집권당에 유일하게 '재야의 시선으로 보는' 존재이며, 공산당의 자성역량의 존재이다. 유마힐은 중생의 병을 자신의 병으로 여겼다. 그들은 민가의 고통을 권력이 아픔을 느끼도록 전화했다 .그들은 일방적으로 편드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이렇게 권력의 신경을 고통에 민감하게 유지하도록 하는 것은 소위 '제2종 충성'이 아니라, 초기의 혁명이상에 대한 제1의 충성이다.
"문인판보" "인민후설"에서 '집권의 불안'으로 다시 "민간으로 돌아와 재야임을 자각"하는 것이 '남방유파'의 논리변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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