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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모택동)

모택동은 위구르혈통인가?

by 중은우시 2012. 7. 8.

글: 양기창(楊其昌)

 

서역 Vighur는 고대 중국인들이 "회호(回胡)"(이 두 글자는 고대나 오늘날 남중국방언에서는 모두 Wei Wu-웨이우-라고 읽는다)라고 불렀다. 이 글자의 근원은 몽골어계의 "실위(室韋)", "호랍이(呼拉爾)"에서 유래하는데, 그 뜻은 '연맹(聯盟)'이다. '회호'는 고대 중국인들이 보기에 오늘날의 '양인(洋人)', '귀로(鬼佬)'에 해당한다. 지위는 아주 높았다. 중원의 한족들이 서방의 문명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통로였다. 당나라때는 "회흘(回鶻)"이라고 고쳐 불렀고, 청나라때는 "회회(回回)", "회부(回部)", "회강(回疆)"이라고 불러 "몽강(蒙疆)", "장강(藏疆)"과 함께 '삼강(三疆)'으로 불렀다. 중화민국시대에 '회'는 화북방언에서 'Hui'라고 읽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개략 1929년쯤에 새로운 단어, "유오이(維吾爾)"로 그들을 나타냈다. 이것이 바로 "유오이"와 "회회"가 본리된 연원이다.

 

모택동은 여러해동안 한족의 위대한 황제로 칭송되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는 정통적인 회호(回胡) 혈통이다. 그의 시조인 모태화(毛太華)에서 그의 부친 모순생(毛順生)까지 모두 경건한 회호인이다. 완강하게 회호의 신앙과 생활습관을 유지하여 왔다. 그러므로, 모택동은 그루지아 투르크인 출신인 스탈린의 호감을 얻는다. 투르크와 회호는 공동이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 그들은 이슬람 성전의 방식으로 코민테른(공산국제)을 만든다. 소위 동기연리(同氣連理)이다. 우리가 약간만 분석해보면, 이 비밀을 풀 수가 있다.

 

중국인민대학출판사의 <모택동의 수수께끼>등의 책에 따르면, 소산 모씨(韶山 毛氏)의 원적은 강서(江西)이고, 시조인 모태화는 명태조의 개국대장 목영(沐英)을 따라 운남(雲南) 난창(瀾滄)(지금의 운남성 란창 라후자치현내)으로 원정을 가서 현재의 소수민족여자와 결혼하여, 4명의 아들 모청일(毛淸一), 모청이(毛淸二), 모청삼(毛淸三), 모청사(毛淸四)...를 낳는다. 명태조 홍무13년(1380년) 모태화는 장남과 막내를 데리고 호남(湖南) 상향현(湘鄕縣)으로 이주한다. 10년후, 그의 두 아들도 인근의 상담현(湘潭縣) 소산충(韶山沖)으로 이주하는데, 바로 상담, 상향, 영향(寧鄕)이 교차하는 경계지역이다. 모씨종족은 개략 500년간 이 곳에서 황무지를 개발하여 농사를 지었다. 모택동까지 20대가 전해져 내려온다. 소산 모씨가족은 4번 족보를 만드는데, 제1차는 청나라 건륭2년(1737년)이고, 제2차는 광서7년(1881년)이고, 3차는 선통3년(1911년)이고, 4차는 민국30년(1941년)이다. 소산모씨 가족의 제1차 족보로부터 제4차족보까지 기간은 204년이다. 이 기간의 기록은 정확하고 믿을만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러 회호인들이 한족성을 취할 때 "무하마드"에서 M으로 시작하는 성씨를 많이 취했다: 마(馬), 모(毛), 모(茅), 목(穆), 목(沐), 미(米), 미(芈), 막(莫), 묵(墨), 맥(麥)....등등이다. 다른 예로는 합(哈), 백(白), 사(沙), 양(羊, 혹은 楊), 우(牛, 혹은 劉), 담(淡, 斯坦), 회(回), 호(胡), 명(明) 등등이 있다. 이들이 가탁(假托)한 강서 모씨는 한인의 성에 연종(聯宗)한 것이다. 반드시 모씨성의 한족 집안을 찾아야 했다.

 

모태화는 목영을 따라 운남에서 몽골 양왕(梁王)이 이끄는 회호인과 전투를 하면서 전리품인 라후(拉祜)족의 소녀를 얻어 처로 삼는다. 이 라후는 원래 랍호(拉胡)라고 한다. 원나라초기에 몽골왕자 활단(闊端)을 따라 감숙 청해에서 운남까지 온다. 그리고 토번(티벳) 불교로 개종한다. 감숙, 청해에 남아있는 '랍호'는 원래 "살랍(撒拉)'이라고 부른다. '동향(東鄕)', '보안(保安)'등의 족과 함께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회호에 속한다. 1932년이후, 한어의 '회호'는 '유오이'로 바뀐다. 1949년이후 '회호자치구'이외의 회민들은 ''살랍', '보안' '동향'등의 족이 된다. 소위 56개민족은 바로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모태화는 운남에서 4명의 아들을 낳은 후, 왜 다시 두 아들을 데리고 호남으로 이주해갔을까? 왜 강서로 가지 않았을까? 그때 운남은 황무지개간을 위하여 사람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전씨영(翦氏營)'을 따라서 호남으로 가서 명나라에 불복한 무릉만(武陵蠻, 지금의 土家族)을 진압했을 것이다. 당시 회호인 합륵팔사(哈勒八士)는 형양도독(荊襄都督)으로 호남에 주둔했다.

 

청나라때 편찬한 <회부세계원류(回部世係源流)>의 기록에 따르면, "전씨(翦氏)는 원래 성이 합(哈)이다. 그의 선조는 서역 회부 출신이다. 송나라때 서역의 명문거족이었다. 원태조의 서정때, 회부가 투항하여 원태조를 따라 정벌한다. 합륵이라는 자는 태조를 다라 서하부락을 정벌한다....그의 후예 팔십(八十)은 명태조를 보좌하여 정벌하여 사성(賜姓)으로 전(翦)씨를 내린다. 그의 이름을 팔십에서 팔사(八士)로 바꾼다....홍무22년, 군에서 죽는다. 성지를 받아 상덕 관외의 황룡강에 묻힌다. 그가 전씨가 호광으로 이주하여 거주한 시조이다. 팔사에게는 아들이 있는 데 배착(拜着)이라 한다. 원래 형양도독부 총병이었다. 어려서부터 부친을 도와 정벌에 참여하여 전투에 익숙했다. 팔사가 죽고, 배착이 그의 관직을 이어받는다. 홍무18년 여름 사월, 성지를 받아 오개(五開), 조적(曹滴)의 여러 동만(洞蠻)을 토벌하다. 그도 나중에 군에서 죽는다. 성지를 받아 역시 상덕 동관외 황룡강에 묻는다. 조정은 팔사 부자에게 오랑캐를 평정한 공로가 있다고 하고, 그들이 함께 변방에서 죽은 것을 기념하여 자손들에게 상덕위정지휘사의 관직을 이어받도록 한다. 그리고 여전히 '전씨영'의 병사를 이끌고, 상덕 도원에 둔전하고 무릉을 지켰다. 팔사의 부장들도 역시 따르는 자들이 많았는데, 혹은 밭을 갈아 농사를 짓고 혹은 장사를 하였다. 족속을 모아서 거주하였다. 회교를 신봉하였다. 비록 점차 한인의 글과 말을 배웟지만 지금도 한인과 통혼하지 않는다. 용감하고 싸움을 잘하여 선조의 유풍을 여전히 잇고 있다."

 

이 합륵에 대하여, 호남 회호인 역사학자 전백찬의 고증에 따르면, 고창 회호의 장군 합륵이 1209년(징기스칸 4년, 남송 녕종 가정2년) 회호왕 역도호(亦都護)를 따라, 서요에서 고창에 파견하여 주둔시킨 감국을 죽이고, 테무진을 만나서 도독, 절충장군의 직위를 받는다. 그는 징기스칸의 수하중 이슬람군대를 이끌고 남으로 북으로 다니며 싸웠다. 합륵의 후대는 원나라에서 관리로 있었다. 그러나 원나라말기 반원흥명의 대열에 가담한다. 그리하여 형양도독의 직위를 받아, 호남에 주둔한다. 그는 조정에서 파견한 최고군사장관이고, 호남 회호인의 시조이다. 고창 회흘의 창립자인 복고준(僕固俊)의 선조는 당나라의 명장 복고회은(僕固懷恩)이며, 철륵9부의 복고(僕固)에 속한다.

 

<명사.모충전>에 따르면, 모충(毛忠)은 자가 윤성(允誠)이고 아명은 합라(哈喇)로 서수(西陲) 사람이다. 증도부인 합라대(哈喇歺)는 명나라 홍무초기에 귀순하여 군대에서 천호가 되고 전사한다. 조부인 배도(拜都)는 합밀(哈密)의 전투에 참가해서 역시 전사했다; 그의 부친 보(寶)는 욤맹함으로 총기(總旗)를 맡았고, 영창백호(永昌百戶)이다. 모충은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았다. 명성조를 따라서 북정에 자주 참가했고, 선덕제때 변방 바깥으로 출정한다. 관직은 지휘동지에 이른다. 명나라 정통10년(1445년) 변장을 잘 지킨 공로로 황상으로부터 모씨성을 받는다.

 

<명사.모충전>과 <회부세가원류>를 대비해보면, 합륵씨 배착이 바로 합라씨 배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전씨와 모씨의 공동조상이다. 모택동의 조상 모태화는 바로 합라씨가 "목존(穆尊)'으로 고친 모씨이다. 명나라초기, 안휘북부 회호인을 위주로 한 주원장의 오군(吳軍)은 양호의 진우량(陳友凉) 초군(楚軍)을 무찌른다. 그리고 호남호북의 백성을 대거 도살한다. 이리하여 호남호북의 사람이 없는 땅에 퇴역한 회호군인들로 채웠다. 그리하여 호남에는 기괴한 회호부락이 있게 된다.

 

더욱 중요한 정치적 원인도 있다. 1380년, 우승상 호유용이 모살죄로 피살된다. 여기에 연루되어 3만여명이 죽는다; 1390년, 좌승상 한국공 이선장이 피살되며 70명명이 멸족된다; 1392년, 목영이 운남에서 병사한다; 1393년, 일찌기 운남을 정벌하던 총사령관 남옥이 모반죄로 피살되고 삼족을 멸한다, 이에 연루되어 죽은 자가 1만5천명이다. 이렇게 회호족 공신을 대거 도살하는 행동은 필연적으로 남옥, 목영을 따라다니면서 집안을 일으켰던 모태화로 하여금 시비의 땅에서 멀리 떨어지게 만든다. 그리하여, 명태조 홍무13년(1380년), 모태화는 장남과 막내를 데리고 호남 상향현으로 간다. 10년후, 그의 두 아들은 다시 인근의 3개현이 교차하는 경계지역의 사람이 드문 소산충으로 옮겨온다. 두 번의 기괴한 이사는 모두 연좌로 피살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모씨는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는 호남의 산지에 정착한다. 그후에도 성명을 숨기고 농사를 지으며 산다. 회호의 습속을 유지하면서 한족의 습관대로 족보를 만들지도 않고, 유교경전을 읽어 과거에 참가하지도 않는다.

 

명성조(영락제)때, 하서양의 선단을 이끈 태감 정화는 운남에서 포로로 잡혔던 회호이다. 이를 보면 명나라는 한편으로 회호를 잔혹하게 탄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들의 경상과 과학기술방면의 장점을 활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명성조이후의 명나라조정은 쇄국정책을 쓴다. 이리하여 관내의 회호와 경외의 회호가 단절된다. 그러나 오히려 명교가 민간에 전파되게 하여 강대한 반항역량을 형성한다. 그리고, 명나라말기의 이자성 장헌충의 난때, 모두 많은 전투에 능한 '회회영'을 가지고 있었다.

 

모택동과 그의 부친 모순생에 대한 묘사를 보면, 그들은 기괴한 습속을 많이 지니고 있다. 에를 들어, 그의 부친 모순생은 보살에 절한 적이 없다. 근면하게 계산하는 지주 겸 장삿꾼이었다. 모택동이 고향에 돌아가서 조상에 제사지낼 때 향촉을 쓰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그의 회호 유전자로 인한 것이다. 그루지아의 투르크인 스탈린이 그를 특별히 잘 본 것은 아마도 그들이 공동의 투르크 유전자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이슬람 성전이 방식으로 불가일세의 코민테른을 만든다. 장개석과 모택동의 공신을 대한 수법차이를 보면, 장개석은 정통적인 한족의 수법을 썼다. 승리한 후 상대방에게도 살 길을 마련해 주고, 절대로 모조리 죽여버리지 않았다.

 

모택동을 한족 오백년만의 민족영웅으로 만들기 위하여, 모택동의 회호혈통의 비밀을 드러낼 수가 없었다. 중국은 지금까지 무슬림사고와 한민족주의의 사이에서 오갔다. 예를 들면, 초기의 유청양(劉淸楊), 곽륭진(郭隆眞), 마준(馬駿)등등 많은 회호족 인재가 있었다. 홍군시기, 농민들에게 주덕 총사령관은 주원장의 후손이라고 말했다. 건국이후, 유소기는 한고조 유방의 자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많은 역사학자들이 참가한다. 이 모든 것은 모택동의 혈통위기를 조성한다. 문혁때, 박해를 받은 역사학자는 왜 명사(明史)를 연구하던 학자들 뿐이었을까?

 

오함(吳晗): 청화대학 역사학과 주임. <호유용당안고>, <명성조생모고>는 모두 경전이다. 그는 명나라의 회호인 청백리 해서(海瑞)를 연구하여 <해서파관(海瑞罷官)>을 쓰고 문혁의 첫번째 과녁이 된다. 1968년 2월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간다. 1969년 10월 11일 박해를 받아 죽는다. 처인 원진(袁震)도 1969년 3월 18일 박해를 받아 죽는다. 양녀 오소언(吳小彦)은 1976년 9월 23일 옥중에서 자살한다.

 

전백찬(翦伯贊): 북경대학 역사학과 주임. 1960년대 후반에 비판을 받고, 1968년 12월 18일 밤, 부부는 대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