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모택동)

마오쩌둥의 "你辦事我放心" 메모를 둘러싼 수수께끼

중은우시 2012. 4. 29. 00:30

글: 섭영렬(葉永烈)

 

 

화궈펑(華國鋒)이 모택동의 친필 "네가 일을 하면 내가 안심하겠다(你辦事我放心)"메모를 내놓은 후, 신문잡지에서는 대대적으로 이를 "최고지시(最高指示)"라고 선전했다. 마오쩌둥의 이 메모에 쓰인 6자의 휘갈겨쓴 글씨는 마치 마오쩌둥의 "유조(遺詔)"처럼 취급되었고, 화궈펑의 지도자지위의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가장 아쉬운 점은 마오쩌둥이 화궈펑에게 그 여섯 글자를 쓸 때, 촬영기자가 현장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의 사진이 남아있지 않다.

사진이 없으니, 화가들이 상상력을 발휘하기 좋았다.

저명한 화가인 류원시(劉文西)는 친텐젠(秦天健), 션베이신(湛北新), 황나이위안(黃乃源)와 합작하여 1977년 1월, 유화 <니판사, 아방심>을 창작하여 이 공백을 메웠다.

저명한 국화가인 리얜성(李延聲)은 정성을 들여서 중국화 <니판사, 아방심>을 창작하며, 이 그림은 1977년 수천만장 인쇄되어 북경에서는 거의 가가호호 모두 이 그림을 걸어놓았다.

그러나, 25년이 자난 후인 2002년 6월, 상해문회출판사가 출판한 장한즈(章含之)의 <두터운 붉은 대문을 넘어가보다>라는 책에서 '니판사, 아방심'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한다.

장한즈는 챠오관화(喬冠華)의 부인이다. 챠오관화는 중국의 저명한 외교가이다. 1974년 11월에서 1976년 12월까지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장을 지냈다. 장한즈 본인도 1970년대 중국의 외교관중 하나이다. 그녀는 미중수교회담에 참가했고, 닉슨의 방중, 상해코뮤니케협상등 일련의 중요한 활동에 참여한 바 있다.

챠오관화는 마오쩌둥이 화궈펑에게 써준 '니판사, 아방심'의 내용을 아는 사람이다. 장한즈는 그녀의 고록 <두터운 붉은 대문을 넘어가보다>라는 책의 299페이지에서, 그녀가 알고 있는 '니판사, 아방심'의 경위를 얘기했다.

 

1976년 1월 8일 저우언라이 총리가 서거한다. 전체 당은 장춘쟈오(張春橋)가 총리를 이어받을까봐 우려했다. 당중앙이 화궈펑을 대리총리로 임명했을 때, 나는 여전히 기억한다. 쟈오관화와 황쩐(黃鎭)은 임명회에 참가한 후 우리 집으로 함께 돌아왔을 때 흥분해 마지 않았다. 나에게 술을 가져오라고 해서 축하해야겠다고 했다.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화궈펑에게 기대를 걸었던가. 이어진 일은 내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나는 무형의 큰 그물이 소리없이 펼쳐진 것만 안다. 챠오관화와 나는 한걸음 한걸음 거대한 함정으로 빠져들었다.

2월, 이미 평민으로 돌아온 닉슨이 두번째로 중국을 방문한다. 장칭(江靑)은 돌연 이상하리만큼 적극적이었다. 차오관화, 나, 예빈사(禮賓司) 사장인 주촨헨(朱傳賢) 및 황쩐 대사는 그녀의 10호루로 불려가서 각종 분부를 받았고, 함께 극을 구경하고 꽃과 요리를 보냈다. 이 기간동안, 장칭은 마오주석이 그녀에게 말했다고 하였다. 즉 마오주석의 의견이라는 것이다. 비서는 더 이상 우리의 자료를 받지 않았다. 일부 나이든 간부들이 우리 집에서 상의했는데, 모두 어쩔 수가 없다, 그저 이대로 둘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즉 이 짧은 3월에서 5월까지 사이에 장칭이 지나치게 자주 찾은 것이 챠오관화와 나의 비극이었다. 아무도 이것이 마오주석의 지시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아무도 이것이 모두 많은 원로동지들이 상의한 결정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아무도 이것이 당시 챠오관화가 '비등(批鄧)'운동과정에서 많은 외교부의 노간부들을 보호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더더구나 아무도 6월부터, 장칭은 방향을 바꾸어 챠오관화를 대거 질책하며, 그를 외교부장에서 쫓아내겠다고 말한 것을 언급하지 않았다. 당시는 아직 마오주석이 살아있을 때였고, 우리는 묵묵히 여러가지 굴욕과 불공정한 대우를 참아야 했다.

 

챠오관화는 마침내 무너졌다. 그는 먼저 심근경색이 오고, 곧이어 폐암을 앓았다. 아마도 한 가지 일은 챠오관화가 반드시 없애야할 요소였을 것이다. 1976년 4월 30일, 마오주석은 뉴질랜드총리 멀던을 만나고, 화궈펑이 배석했다. 그날, 챠오관화는 집으로 돌아와서 나에게 회견 전에, 화궈펑은 그를 인민대회당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당시 마오주석은 건강상태가 이미 좋지 않았다. 말도 불분명했고 어떤 때는 글로 썼다. 이전에, 이런 상황은 이미 한동안 계속되고 있었다. 마오주석의 곁에 있는 사람들은 그 메모를 주워서 보관했다. 나는 일찌기 챠오관화에게 말한 바 있다. 언젠가 나도 몇장 가져다 달라. 기념으로 보관하고 싶다고 했다. 당시 챠오관화는 말했다. '너는 절대 그 메모를 가지려고 하지 말라. 그 메모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만일 마오주석이 돌아가신 후, 누군가가 그 쪽지를 이용해서 앞뒤말을 자르고 말하려고 하는데, 그게 네 손안에 있다면 네가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그날 챠오관화는 말했다. "주석은 오늘 다시 세 장의 쪽지를 썼다. 외빈이 떠난 후 단독으로 화총리와 국내문제를 얘기할 때 써준 것이다. 그것은 화총리가 챙겨갔다." 그는 말했다. 외빈을 만난 후, 화궈펑 총리는 복건청으로 왔는데, 아주 기뻐하며 챠오관화에게 세 장의 주석이 친필로 쓴 메모를 보여주었다. "과거방침대로 일처리해라" "천천히 해라, 조급해 하지 말라" 그리고 "네가 일을 하면 내가 안심하겠다" 아마도 운명이 정해져서 그런 것인지, 챠오관화는 화궈펑에게 이 "네가 일을 하면 내가 안심하겠다"는 것은 무슨 일인지 물어보았다. 당시 화궈펑은 쓰촨 꾸이저우의 '비등'운동이 깊이있게 진행되지 못하고, 조반파들이 내전을 벌이고 있으니 두 파를 북경으로 불러서 그들에게 '비등'에 집중하도록 하겠다고 보고했다고 말했다.

 

화궈펑은 주석이 피곤하다고 말하면서, 이 메모를 써주고, 나에게 가서 처리하라고 했다고 했다. 그날 저녁, 정치국 회의에서 마오주석이 외빈을 만났을 때의 담화 및 다른 지시를 전달했다. 깊은 밤, 챠오관화는 집으로 돌아와서 나에게 말했다. "일이 아주 이상하다". 화총리가 오후에는 분명히 나에게 세 장의 메모를 보여주었는데, 정치국회의에는 그가 사람들에게 두 장만을 보여주었다. 그 '네가 일을 하면, 내가 안심하겠다'는 쪽지는 내놓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당시 말이 나오는대로 입을 열었다. "너는 이런 앞뒤가 연결되지 않는 메모는 나중에 쉽게 다른 해석으로 쓰일 수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챠오관화는 말했다. 화궈펑 동지는 사람됨이 후덕하니, 내 생각에는 그가 겸손해서 내놓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일을 우리는 점점 잊어 버렸다.

 

5개월후인 10월 6일, 사인방을 분쇄할 때, 챠오관화는 마침 유엔회의에 참석한 후, 이탈리아, 프랑스 양국을 방문했다. 파리에서 소식을 듣는다. 그는 쩡타오(曾濤) 대사와 술을 진탕 마셨다. 그는 당시 궈펑이 이미 외교부 지도자에게 "챠오관화는 아마도 도망칠 것같다. 우리는 비행기를 보내어 그의 부인을 보내주어야할 것같다"라고 말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동시에 그는 세 장의 메모를 전국으로 내보낸다. 특히 '니판사, 아방심'은 마오주석이 그를 후계자로 지정한 근거라고 말했다. 민감한 서방기자는 냄새를 맡았다. 파리에서 챠오관화에게 '당신이 귀국한 후에 골치아플 것이라고 하더라"는 말을 한다. 챠오관화는 앙천대소를 하며 그는 전국인민과 마찬가지로 기분이 좋다. 그건 황당무계한 말이다라고 하였다. 그가 어찌 알았으랴. 이때 화궈펑은 이미 외교부의 당조직에 "챠오관화는 가장 먼저 '니판사, 아방심'이라는 메모를 본 사람이다. 그는 주석의 뜻을 명백히 알고 있으면서도 마오주석의 지시를 제지했고, 외교부 당조직에 이 소식을 봉쇄했다."

 

그래서, 챠오관화는 그가 사랑하는 조국땅을 밟고 전국인민과 승리의 기쁨을 누리려고 준비할 때, 천라지망이 그를 향해 펼쳐져 있었다. '마오주석의 임종지시를 제지하고, 화궈펑이 후계자가 되는 것을 반대하고, 사인방을 도와서 당권을 찬탈하려 했다"는 큰 죄명이 이미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챠오관화는 일개서생이다. 이것은 모두 오해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저 화궈펑 등에게 자세히 설명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누가 알았으랴. 한 외교부장, 중앙위원이 이때 해명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게 될 줄은. 누구도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마지막에 그가 십팔층지옥으로 떨어질 때까지 중앙의 지도자중 그를 찾아서 얘기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지난 일은 돌아보기 가슴아프다. 삼십일년전에 내가 외교부의 대문을 걸어들어갈 때, 나는 정치투쟁을 전혀 몰랐다. 명리를 추구하지 않는 상아탑의 사람이었다. 칠십년대에 인심을 격동시킨 외교와 나와 관화의 사랑은 나에게 황금빛 꿈을 꾸게 해주었다. 그러나 잔혹한 현실은 이 꿈을 일순간으로 만들었다. 그 꿈은 금방 지리멸렬한다. 1983년 9월, 관화가 마지막으로 나를 떠날 때 이 꿈은 이미 찢겨져서 흔적도 없어졌다. 그러나 나는 시종 잔몽과 현실의 사이를 오가며 거기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장한즈는 또한 다음 내용도 썼다. 1978년 1월 22일, 챠오관화는 조사를 받는 기간에, <유감>이라는 시를 한 수 써서, 사람을 시켜 장한즈에게 보낸다. 챠오관화의 시는 이러했다:

 

장야만만불긍면(長夜漫漫不肯眠)

지연비분새심전(只緣悲憤塞心田)

하시득세침원진(何時得洗沉怨盡)

유암화명우일천(柳暗花明又一天)

 

기나긴 밤에 오랫동안 잠이 들지 못하네.

모두 비분이 가슴 속을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누명을 벗고 억울함을 모두 풀 수 있을까

버드나무 우거지고 꽃이 핀 곳에 또 하나의 하늘이 있네

 

장한즈의 회고록은 마치 챠오관화의 누명을 풀어주기 위하여 쓴 것같다.

당연히 장한즈가 한 말 중 마오쩌둥이 '니판사, 아방심'을 쓴 경위는 믿을만할 것이다. 그러나, 장한즈는 챠오관화가 말년에 조사를 받은 것이 모두 '메모사건'때문인 것처럼 적었지만, 이것은 너무나 편파적이다.

마오쩌둥의 기요비서인 장위펑(張玉鳳)의 회고에 따르면, 화궈펑이 마오쩌둥의 메모를 공포하려고 준비할 때, 화궈펑의 열렬한 지지자인 왕동싱(汪東興)이 일찌기 이 메모를 들고 그녀를 찾아와서 메모의 진실성을 증명해달라고 한 적이 있다고 한다.

1976년, 마오쩌둥의 담화기록자는 주로 장위펑, 왕동싱 및 마오위안신의 세 사람이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기록자는 마오주석의 기요비서인 장위펑이었다.

왕동싱이 장위펑에게 말한다: 이것은 정치적 대문제이다. 정치적 입장에 대한 한번의 시험이다.

그러나 장위펑은 당시 말했다: 이 메모에 대하여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나는 기억도 없다.

그러나, 장위펑은 회고한다. 1976년초부터 마오주석의 병이 위중해서 자주 사람들과 얘기하면서 메모를 써서 중요한 뜻을 나타내곤 했다는 것이다. 당시 어떤 사람은 이 메모를 전문적으로 모았다.

마오쩌둥과 화궈펑의 담화때 장위펑은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그래서 장위펑은 '그 메모에 대하여 나는 들어본 적도 없고, 기억도 없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메모상의 마오쩌둥의 글자체를 보면 확실히 마오주석의 친필이다.

여기서 언급해야할 점은 장칭이 재판을 받을 때, 마오쩌둥의 이 메모에 대하여 언급한 바 있고, 세상사람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것은 1980년 12월 3일 오전이다. 최고인민법원 특별법정 제1법정이 개정되어 장칭을 심판했다. 이번 재판은 주로 장칭이 중화인민공화국 류샤오치 주석을 박해한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장칭은 문제에 대답하면서, 주제에서 벗어나, 그 메모를 언급한다: "주석이 그날 저녁 화궈펑에게 써준 '니판사, 아방심'은 그게 전부가 아니다. 뒤에는 또 다른 여섯 글자가 있었다. '유문제, 조강청(有問題, 江靑, 문제가 있으면 장칭을 찾아라)"

장칭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마오쩌둥의 메모에 쓴 글자는 12글자라는 것이다. 즉, '니판사, 아방심. 유문제, 조강청"

장칭의 말을 맏을 수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