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모택동)

모택동의 임종유언의 역사진상

중은우시 2012. 4. 23. 20:37

글: 학길림(郝吉林)

 

1976년 9월에서 10월, 중국정계는 한 마디 말을 둘러싸고 경심동백(驚心動魄)할 투쟁을 전개한다: 그것은 "기정방침에 따라 처리한다(按旣定方針辦)"는 말이다. 이 말의 영향력은 아주 크고 깊어서, 지금 생각하면 탄식이 나온다. 그리고 온갖 생각이 떠오른다.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사인방'을 체포한 중요한 근거의 하나는 모주석의 '임종유언'을 위조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글이 있다. 한 편은 1976년 9월 16일의 "양보일간(兩報一刊, <인민일보>, <해방군보> 및 <홍기>를 가리킴)"의 사론 <모주석은 영원히 우리의 마음 속에 살아계신다>이고, 다른 한편은 10월 4일 <광명일보>에 발표한 양효(梁效)의 <영원히 모주석의 기정방침에 따라 처리하자>이다.

 

<모주석은 영원히 우리의 마음 속에 살아계신다>는 것은 공개적으로 '모주석의 유언'을 발표했다 -- '기정방침에 따라 처리한다'. '기정방침에 따라 처리한다'는 말은 흑체자(黑體字)로 인쇄했는데, 이것은 모주석의 원화(原話)라는 뜻이다. 당시에는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 모택동의 원화만이 이런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이 사론이 발표된 후, '사인방'은 방송국, 신문잡지를 조종하여 연속으로 '기정방침에 따라 처리한다'는 것을 선전한다. ,영원히 모주석의 기정방침에 따라 처리하자>는 것은 그중 가장 영향이 컸던 글이다.

 

만일 '사인방'이 모주석의 '임종유언'을 위조했다면, <모주석은 영원히 우리의 마음 속에 살아계신다>는 것이 바로 '위조'의 근원이다.

 

그러나, 문제는 첫째, '기정방침에 따라 처리한다'는 것이 요문원(姚文元)의 '위조'인가? 둘째, '기정방침에 따라 처리한다'는 것이 모주석의 '임종유언'이라고 보는 것은 근거가 확실한 것인가?

 

비록 <모주석은 영원히 우리의 마음 속에 살아계신다>가 '양보일간'의 사론이지만, 초안에 참여한 사람은 인민일보사와 홍기잡지사 두 곳이다. 홍기잡지사의 1명이 영도기구의 '6인소조'에 참가했고, 소집인을 맡는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작성소조의 구성원(이하 각각 '소집인'과 '구성원'이라 칭한다)이 된다. '구성원'은 요문원이 친히 상해에서 홍기잡지사로 부른 사람이고, 그는 사론초안의 전과정에 참가한다. '소집인'과 '구성원'은 나중에 회고한 내용이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그저 개별적인 부분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들의 서술은 이를 증명한다: 요문원은 '기정방침에 따라 처리한다'는 말의 발명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론 기초자들도 '기정방침에 따라 처리한다'는 말의 발명자가 아니다. 그들은 다른 곳에서 인용했다.

 

사론초안자들의 회고를 종합하면, 그들이 '기정방침에 따라 처리한다'는 것을 쓴데는 세 가지 근거가 있다: 첫째는 당중앙의 6월 전보에서 모택동의 두 가지 최신지시를 언급했는데, '국내문제를 주의하라(國內問題要注意)"와 "기정방침에 따라 처리하라"이다. 둘째는 인민일보사, 홍기잡지사는 모두 7,8월간의 전국계획공작좌담회에 참석했는데, 회의상에서 곡목(谷牧)이 전달하는 "기정방침에 따라 처리한다"는 말을 들었다. 셋째는 신화사의 8월 혹은 9월의 <내부참고>에 자료가 하나 있는데, 흑체자로 "기정방침에 따라 처리한다"는 말이 인용되어 있었다.

 

알수 있는 것은 사론 기초자들이 당시에 <내부참고>를 이용하여 "기정방침에 따라 처리한다"는 말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내부참고>에 "기정방침에 따라 처리한다"는 것도 소스문제가 있다. 시간적으로 추측해보면, 아마도 전국계획공작좌담회일 것이다.

 

전국계획공작좌담회는 1976년 7월 6일 부터 8월 1일까지 북경에서 개최된다. 곡목이 회의를 주재했다. 화국봉은 7월 30일 회의대표를 접견하고 강화를 한다. '소집인'과 '구성원'은 여러번 이번 회의와 '기정방침에 따라 처리한다'의 관계를 얘기했다.

 

'소집인', '구성원'은 "기정방침에 따라 처리한다"는 말이 계획공작좌담회에서 나온 말이라고 했고, 다른 사람의 확인도 거쳤다. 예를 들어, 전 감숙성위 제1서기인 승항한(冼恒漢)도 이 일을 언급했다.

 

이치대로라면, "기정방침에 따라 처리한다"는 말의 유래는 계획공작좌담회가 아니어야 한다. 모택동이어야 한다. 모택동이 언제 어느 상황에서 이 말을 한 것인가? 원화는 도대체 무엇인가?

 

1976년 12월 17일의 인민일보 편집부의 글을 보자: "4월 30일, 모주석이 외빈을 접견한 후, 화국봉 동지가 모주서게게 국내의 전체 형세가 좋으나, 몇개 성에서는 그다지 좋지 않은 상황이 있다고 보고했다. 모주석은 그 자리에서 화국봉 동지에게 친필로 써주었다: "천천히 해라. 조급해 하지 말라(慢慢來, 不要招急)" "과거 방침에 따라 처리해라(按過去方針辦)", "네가 일처리하면, 나는 안심이 된다(你辦事, 我放心)".....화국봉 동지는 당시 모주석의 '천천히 해라. 조급해 하지 말라'와 '과거 방침에 따라 처리해라'의 지시를 중공중앙 정치국에 전달한다. '사인방'은 그 자리에 있었다. 그중 왕홍문, 강청이 필기를 했다. 이것은 기록으로 남아서 조사할 수 있다. 요문원은 모주석의 친필원본을 직접 보았다."

 

의문의 여지없이, 모택동이 1976년 4월 30일에 한 원화는 "과거 방침에 따라 처리해라"였다. 여기에서 회피할 수 없는 모순이 생긴다: 모택동이 분명히 '과거 방침에 따라 처리해라"라고 했는데, 화국봉 혹은 곡목은 왜 "기정방침에 따라 처리해라"고 전달한 것일까? 설마 화국봉이나 곡목이 모택동의 지시를 고쳤단 말인가?

 

염장귀, 장강의 <소위 모택동 임종유언이 진상>이라는 글에서 문제의 답안을 내놓고 있다: '기정방침에 따라 처리해라'는 것은 회의기록자의 기록상의 실수로 인해 생긴 것이라는 것이다.

 

"...1950년대부터 20여년간 국가계획위원회 판공청에서 업무하고, 당조회의의 기록에 참가하거나 책임자의 강화와 유관문건등을 기초했다.

 

한번은 담화중에, 진비장(陳斐章)이 나에게 말했다. 모주석이 서거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한 마디가 있다. 죽, '기정방침에 따라 처리하라'는 것이다. 이 말이 나타난 것은 그가 기록할 때의 실수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세부사항을 얘기했다. 우리는 그의 말을 들은 후 깜짝 놀랐다. 우리는 역사에 책임을 져야 한다. 역사의 원래 진면목을 되돌려 놓아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거의 알지 못하는 이 상황을 세상사람들에게 얘기할 필요가 있었다...

 

1976년 7월에서 8월까지 중공중앙은 전국계획공작좌담회를 소집개최한다. '사인방'의 파괴와 교란으로 인하여 투쟁은 아주 치열했다. 거기에 백년만의 당산대지진을 맞이하여 회의장은 시끄러웠다. 하루는 화국봉이 진비장등이 초안한 원고를 들고 읽었다. 중간에 원고에 없는 몇 마디 말을 했다. 내용은 모택동의 지시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화국봉은 말했다. 모주석이 말씀하셨다: '서두르지 말라' '과거 방침에 따라 처리해라'.

 

화국봉이 잠시 쉬었을 때, 왕홍문이 돌연 끼어든다. 그리고 '네가 일처리하면 내가 안심하겠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라고. 이어서 화국봉은 다시 '네가 일처리하면, 내가 안심하겠다'는 말도 추가한다.

 

사람은 많고 잘 들리지 않아서, 기록을 담당한 진비장은 겨우 '서두르지 말라'와 그리고 무슨 '방침에 따라 처리해라'는 말만 들었다. 분명히 듣지를 못했다. 조급한 마음에 진비장은 그 뜻을 헤아려 "기정방침에 따라 처리해라"로 쓴다. 회의 후, 진비장은 화국봉이 강화원고를 정리하면서 기록과 원화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당시의 상사 즉, 이번 좌담회를 조직하고 담당했던 계획위원회의 한 부주석이 확인을 요청한다. 그러나 그가 확인하기도 전에 글을 발표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