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문사박람
1955년, 소산현(蕭山縣)에서 모택동주석 전용열차피습사건이 벌어진다. 이는 당시에 "통천대안(通天大案)"으로 불리웠다.
1955년 6월 18일 19시 10분경, 모택동 주석과 중국남방을 방문하던 소련의 부장회의 주석 마린코프를 태운 전용열차는 천천히 항주 기차역을 출발했다. 19시 45분, 열차가 소산현 서문도구(西門道口)를 지날 때, 돌연 "펑"하는 소리가 울렸다. 수행하면서 안전을 책임지고 있던 성공안청의 왕방(王芳) 청장은 깜짝 놀라서 전용열차를 신속히 검사했다. 그는 놀랍게도 여섯번째 차량칸의 진행방향 오른쪽의 유리창에 구멍이 하나 나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구멍의 크기는 엄지손가락 정도였다. 왕방과 경호인원들은 모두 식은 땀을 흘렸다. 열차가 제기현(諸暨縣) 기차역에 정차했을 때, 왕비는 즉시 기차에서 내려 기차역장실로 가서 성공안청 부청장 여검광(呂劍光)과 통화를 하여 전용열차에서 발생한 상황을 알려준다.
전용열차에 앉아 있던 사람은 모택동과 소련의 지도자였다. 사건의 심각성은 이미 하늘끝에 닿을 정도였따. 여검광은 즉시 소산현 공안국의 반진탁(潘振鐸) 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전용열차가 피습된 상황을 알려주고, 소산현 공안국에서 즉시 사건을 해결하도록 지시한다. 전화를 마치고, 여검광은 즉시 밤을 새워 소산까지 간다. 반진탁과 함께 사건을 조사하고, 다시 함께 항주로 가서, 담진림(譚震林)(당시 중공중앙 정치위원, 국무원 부총리 겸 화동국 제1서기)을 모시고 항주에 와 있던 공안부 부부장 허건국(許建國)에게 보고했다.
다음 날 오전, 허군국은 담진림에게 보고한 후, 즉시 제기현 기차역으로 간다. 그리고는 전용열차에 뚫린 구멍을 살펴본다. 허건국은 자세히 조사한 후, 이 구멍은 총격으로 발생한 것은 아니라고 판단한다. 왜냐하면 총격이라면 열차의 다른 쪽 유리체도 구멍이 나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기초로 적이 모주석과 마린코프를 암살하려 했을 가능성은 아주 적다고 보았다. 오히려 현지 민중들이 돌을 던져 전용열차에 잘못 맞아서 발생했을 가능성이 컸다. 허건국은 수사의 중점을 안교향의 조가교촌으로 할 것을 제안하였다. 왜냐하면 이곳의 철로는 마을을 가로질러 지나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건이 아마도 그 곳에서 발생했을 가능성이 컸다.
6월 23일 오후, 소산현 공안국은 여러 수사상황을 종합하여, 촌민 조문생(曹文生)을 혐의자로 중점 조사하게 된다. 이전에 예상했던대로, 그는 조가교촌의 시골 농민이다. 조문생은 공안국으로 잡혀와서 사실을 그대로 실토한다: "18일 저녁, 기차가 오기 전에, 우리 오륙명은 철로 서쪽에 서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손 안에 철로에서 주운 돌을 가지고 놀고 있었는데, 이때 아주 멋있는 열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그냥 돌을 던졌고, 세번째 칸 혹은 네번째 칸의 창문에 맞았다." 조문생이 한 말은 현장에 있던 다른 농민 조배흥의 증언과도 일치했다.
진상이 규명되자, 수사에 참가했던 모든 인원은 큰 짐을 벗은 것같았다. 여검광은 현장에 있던 공안국 인원들에게 말했다: "이 사건이 마침내 해결되었다. 왜 허건국 부부장이 이렇게 중시했고, 친히 현장까지 나와서 살펴봤느냐? 여러분들은 그날 그 전용열차에 누가 타고 있었는지 아느냐. 바로 모주석과 소련부장회의주석 마린코프이다. 이런 열차가 피습받았으니 전국에서 최대의 사건이 아니겠는가?" 그자리에 있던 공안들은 모두 놀라서 혀를 내밀었다.
사건은 해결되었는데, '통천대안'을 저지른 자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소산현 공안국의 공안들은 어떻게 할지를 모르고 있었다. 현공안국은 성공안국으로 사건기록을 보내고, 성공안국은 사건기록을 공안부로 보냈다. 진술녹음자료와 증언진술기록도 모조리 함께 보냈다. 허건국은 보고를 받은 후, "조문생이 철로교통안전을 파괴한 것은 범죄행위이다. 조문생이 빈곤농민인 점을 감안하여 철저히 교육하고 경하게 처리하라. 집행유예면 괜찮겠다." 중앙의 지시는 성으로 내려오고, 왕방은 조문생의 사건기록에 친히 처리의견을 적는다. 조문생은 구금된지 23일후에, 석방되어 가족들과 만난다.
"통천대안"이 발생한 후, 모주석이 지나는 노선은 공안이 노선에 한 명씩 지키게 하여, 만의 하나 있을지 모르는 사태에 대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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