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건륭제)

건륭은 왜 해녕진가(海寧陳家)의 아들이라고 소문났을까?

중은우시 2012. 7. 1. 00:59

글: 일명(佚名)

 

건륭제의 성은 애신각라(愛新覺羅)이고 이름은 홍력(弘歷)이다. 청왕조가 중원을 차지한 후 네번째 황제이다. 그는 육십년간 재위하면서 여정도치하여 사람들이 즐겨 언급하는 '강건성세'를 이룩한다. 그런데, 민간에는 건륭제의 신세내력에 대하여 아주 기이한 내용이 전해진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해녕 진가의 자식이라는 것이다.

 

강희50년(1711년) 팔월 십삼일, 옹친왕부는 웃음소리가 넘쳤다. 이날 집안에 자식 하나가 태어난 것이다. 같은 날, 해녕진가에도 아이가 하나 태어난다. 이 해녕진가는 바로 절강성 해녕의 진세관(陳世倌)의 집안이다. 사람들은 그를 진각로(陳閣老)인데, 강희년간에 조정에 들어가 관직을 지낸다. 긜고 당시 황사자(皇四子)인 옹친왕 윤진과 관계가 아주 밀접했다. 당시, 옹친왕비와 진세관의 부인은 모두 임신을 했는데, 얼마후, 양가는 선후로 자식을 낳았다. 옹친왕비는 여자아이를 낳고, 진가에서는 사내아이를 낳았다. 며칠 후, 옹친왕이 진가에 사내아이를 안고 왕부로 오라고 한다. 왕명을 어길 수 없어, 진가는 아이를 왕부로 보낸다. 그런데, 아이가 돌아왔을 때 진가의 사내아이는 계집아이로 바뀌어 있었다. 오랫동안 관료로 있던 진각로는 이 일이 목숨에 관련된 일임을 알았고, 감히 떠들지 못했다. 얼마후 사직하고 온 식구와 함께 고향으로 간다. 그리고 왕부에 바뀌어 들어간 사내아니는 나중에 건륭제가 된ㄴ다.

 

이 전설이 널리 전해지면서, 건륭제가 6번에 걸쳐 남순한 것도 자신의 친부모를 만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해졌다. 그리고 옹정이 바꾼 딸은 자란후 대학사 장정석(蔣廷錫)의 아들인 장부(蔣溥)에게 시집을 간다. 장씨집안은 강소성 상숙의 명문대가이다. 옹정의 딸이 거주하는 건물은 후세인들이 '공주루(公主樓)'라 불렀다.

 

중국에는 역대이래로 통속문화가 엄숙문화를 압도했다. 연의소설이 정사를 매몰시키는 전통이 있다. 건륭이 해녕진가의 아들이라는 소문은 계속하여 문예작품에서 받아들여진다. 1925년, 상해에서 출판된 원앙호접파의 대가인 허소천의 <청궁십삼조연의>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건륭은 원래 해녕 진각로의 아들이다. 옹정이 바꿔치기하였다. 건륭이 자란 후 유모의 입을 통해서 이 일을 알게 된다. 그래서 남순의 명목을 빌어, 해녕으로 가서 친부모를 만난다. 진각로부부는 일찌감치 사망했으므로, 건륭은 진씨부부의 묘 앞에서, 황만(黃幔)으로 가리고 아들로서의 대례를 행한다.

 

최근 들어, 건륭이 해녕진가의 아들이라는 소문은 여전히 계속하여 문예작품에서 그려진다. 그중 가장 영향력이 큰 것은 바로 김용 선생의 <서검은구록>이다. 김용은 절강 해녕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건륭이 해녕진가의 아들이라는 소문을 들어왔다. 그리하여 <서검은구록>에서는 건륭의 신세내력이라는 이 단서를 쫓아 전개된다. 이뿐아니라, 김용은 책에서 진세관의 셋째아들을 허구로 만든다. 즉 건륭의 동생이라는 진가락(陳家洛)이다. 그는 우만정이 죽은 후, 홍화회의 총타주가 되며, 공동으로 한인의 천하를 회복하는 대업을 이룬다. 진가락을 열렬히 사랑하는 향향공주는 자신의 애정을 희생하여, 건륭을 모시고, 진가락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고자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실패하여 자결하고, '향총(香塚)'에 묻힌다.

 

김용선생은 이 소설의 후기에서 솔직하게 독자들에게 말한다. "진가락이라는 인물은 내가 두찬한 것이다." 동시에 그는 성명한다: "역사학자인 맹삼은 고증을 한 바 있는데, 건륭이 해녕진가의 아들이라는 전설은 근거가 없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영향력이 있는 소문이나 이야기는 그것이 아무리 황당무계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합리성과 크던 적든 역사적인 원인이 있다. 그렇다면, 건륭이 해녕진가의 아들이라는 주장은 무슨 근거가 있을까?

 

첫째, 건륭은 재위60년간 6번이나 남순하고, 그중 4번은 해녕에 간다. 그리고 매번 모두 진각로의 고향집인 우원(隅園)에 머문다. 그리고 "우원'을 '안란원(安瀾園)'으로 바꾼다. 둘째, 해녕진가에는 청나라황제가 하사한 황제친필의 당편(堂匾)이 있다: "애일당(愛日堂)"과 "춘휘당(春暉堂)". 애일도 좋고 춘휘도 좋고, 모두 당나라때 시인인 맹교(孟郊)의 <유자음(遊子吟)>이라는 시에 나오는 말이다. 건륭이 만일 진가의 자식이 아니라면 부모에 보답하는 내요의 단어인 춘휘와 같은 말을 쓸 수 있을 것인가? 셋째, 건륭의 부친 윤진이 태자일 때, 자식을 많이 낳지 못했다. 당시 황태자가 두 번이나 폐위되고, 후계자선정은 계속 미루어지고 있었다. 후계자다툼을 위하여, 윤진으로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딸을 아들로 바꿔치기한다. 그래서 나중에는 이런 주장도 나타난다. 옹정이 황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강희가 윤진의 아들 홍력(나중의 건륭)에게 영웅기개가 있고, 일대웅주의 기상이 있는 것을 보고 홍력에게 황제의 자리가 가도록 하기 위하여, 윤진에게 황위를 물려주었다는 말까지 나온다. 넷째, 바꿔치기한 옹정의 딸은 진가를 따라 해녕으로 돌아오고, 나이가 든 후에는 조정중신이자 대학사인 장정석의 아들 장부에게 시집간다. 장부도 황상의 총애를 받아 대학사에까지 오른다. 현지인들은 장씨부인이 거주하는 집을 '공주루'라고 불렀다. 다섯째, 청나라때, 해녕진가는 과거에 많이 합격하고, 재상을 많이 배출한다. 영예가 다른 집안이 따라오기 힘들었다. 일설에는 진숭례가 과거급제한 후 도광제가 그를 접견하면서 그가 진세관의 후손인 것을 알고는 미소지으며 말했다고 한다: "네가 정말 해녕진가이냐?" 얼마후 진숭례는 염운사로 승진한다. 만일 옹정, 건륭과 해녕진가의 이런 관계가 아니라면, 진숭례까 어찌 이런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야사전설에는 건륭은 스스로 자신이 만주족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궁중에서는 자주 한인의 복장을 입고, 곁에 있는 시종들에게 자신이 한인같은지 물어보곤 했다고 한다. 한 노신은 아예 무릎을 꿇고 말했다: "한인에게 있어서 황상은 확실히 한인같습니다. 만주인에 있어서는 한인과 닮지 않았습니다." 건륭은 그 말을 듣고 한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에는 그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이상의 주장은 김용선생이 언급한 그 역사학자 맹삼 선생에 의하여 하나하나 역사적 사실을 인용하여 반박당한다.  

 

첫째, 해녕진씨가족의 역사를 살펴보자. 해녕신씨의 선조는 북방의 발해 고씨(渤海 高氏)이다. 나중에 남으로 이주하여 강남지구에 거주한다. 진가의 진정한 흥성은 명나라 만력연간이다. 그중 진원성(陳元成)의 한 갈래는 전설의 '해녕진가'와 가장 관계가 깊다. 진원성의 손자인 진선(陳詵)은 관직이 형부상서에 이른다. 진선의 아들인 진세관은 옹정당시 순무를 역임하고, 건륭6년 공부상서로 문연각대학사를 제수받는다. 그가 바로 김용이 소설에서 말한 건륭의 생부이다.

 

진세관의 조카인 진용부(陳用敷)는 관직이 순무에 이르지만, 그것은 이미 건륭중기이후의 일이다. 이에 따라, 맹삼선생은 지적한다. 해녕진가의 관직진출이 크게 늘어난 것은 명나라말기부터 시작했고, 강희제와 옹정제때 전성기를 이룬다. 건륭이 즉위하기 전에 진씨집안에서 재상을 지낸 사람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고, 진세관만 세상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건륭제의 특별한 보살핌을 받지는 못했다. 건륭6년(1841) 내각대학사로 승진한 진세관은 얼마후 유지를 초안한 후 삭탈관직된다. 이뿐 아니라, 건륭제는 그의 면전에서, "참찬지능(參贊之能)이 없고, 비쇄지절(卑瑣之節)이 많으므로, 윤비(綸扉, 재상이 일하는 곳)의 중요한 자리에 있는 것은 실로 자격이 되지 않는다." 이처럼 전혀 체면을 봐주지 않고 혼내는 것은 보통의 전조노신에게라도 하기 어려운 일이다. 만일 그가 전설상의 황제의 생부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진씨집안에 남아 있는 '애일당'과 '춘휘당'이라는 두 편액에 관해서 맹삼선생은 그런 일이 있다는 점은 확실하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건륭이 써준 것이 아니라, 그의 조부인 강희제가 써준 것이다. 이 두 개의 편액은 건륭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더더구나 건륭이 진가의 자식이라는 증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건륭이 출생한 시간과 당시의 배경을 보면, 옹정이 급히 성이 다른 자식을 데려와서 자신의 아들로 삼는다는 것은 정리에 맞지 않고 근거도 없다.

 

황실의 족보인 <옥첩>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건륭은 강희50년 팔월에 출생하는데, 당시 옹친왕 윤진의 나이는 34세이다. 이미 홍휘, 홍반, 홍윤, 홍시의 네 아들이 있었다.(그러나 앞의 세 아들은 요절함). 건륭이 출생했을 때 홍시는 이미 8살이었다. 그리고 건륭이 출생한 후 3개월만에 옹친왕은 다시 또 하나의 아들 홍주를 얻는다. 나중에 다시 홍첨등 4명의 아들을 추가로 얻는다. 이런 상황하에서, 옹친왕이 몰래 한인의 아들과 바꿔치기한다는 것은 정리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더라도, 당시 황태자가 2번 폐위되고, 이로부터 황태자의 자리는 공석이었고, 후계자의 자리를 놓고 명쟁암투가 더욱 치열해졌다. 옹친왕의 정명함과 근신하는 성격을 보면, 이런 때 다른 사람에게 약점을 잡힐 리스크를 안고 한인의 자식을 바꿔치기할 리가 없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자신이 대권을 계승할지도 알지 못하고 있고, 진가의 아들이 반드시 고귀하게 될 지도 알지 못한다. 이처럼 한번 삐끗하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미묘한 순간에 옹친왕은 절대로 그런 모험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외에, 한 만주족 기인이 <황실견문록>에 쓴 것을 보면 이런 말이 있다: "옹정왕의 영명함으로 어찌 후궁이 여자아이를 남자아이로 바꿔치기하도록 놔두겠는가?" 왜냐하면 청나라황실의 법도에 따르면, 황손이 탄생할 때, 황자는 즉시 왕부의 태감을 황궁의 내주사처에 보내어 구두로 황상에게 보고하게 해야 한다. 그 후에 종인부에서 서면으로 써서 보고한다. 이렇게 하여 황상이 황손의 이름을 짓도록 하는 것이다. 만일 옹친왕부에 당시 태어난 아이가 여자아이였다면 어떻게 며칠 후에 남자아이로 바꿔치기할 수 있을까? 이것은 이론적으로 보아도 성립될 수가 없다.

 

만일 전설이 진실이라면, 건륭은 옹정이 여자아이를 해녕진가의 사내아이와 바꾼 아이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금지옥엽에 대한 행방도 말을 해야 한다. 이 공주는 나중에 당조의 중신인 대학사 장정석의 아들 장부에게 시집갔다고 한다. 장씨부인이 거주하는 건물을 '공주루'로 불렀다고도 한다. 그러나 현지 역사를 잘 아는 사람들은 모두 '공주루'라는 것을 알지도 못한다. 장씨집안의 후인들도 모두 모른다고 한다. 이를 보면 이 내용은 와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일찌기 청나라군대가 중원에 들어왔을 때, 완강하게 저항하던 강남의 인민들에 대하여 대규모의 도살을 벌였다. 그러므로, 강남지구의 반청정서는 아주 높았다. 강희제때부터, 청나라의 통치자들은 각종방법을 써서, 특히 강남지구의 문인 사대부들을 회유한다. 여기에는 박학홍사과를 설립하고, 명나라유민들을 모아서 명사를 쓰게 하는 등이 그것이다. 해녕진가에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수는 많다. 이것은 다툼없는 사실이다. 이것은 통치자가 과거를 중시하고 극력 남방의 명문세가를 회유한 것과 관련있다. 강소절강일대의 사대부들의 강렬한 반청민족주의의식을 완화시키려는 정책과 관련있다. 그리고 건륭제에 이르러 이런 과거에서의 흥성은 이미 옛날의 국화가 된다. 이것을 가지고 건륭제가 해녕진가를 잘 보살펴주었다는 근거로 삼는 것은 확실히 성립될 수가 없다.

 

이처럼 건륭이 해녕진가의 자식이라는 증거는 하나하나 성립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제 남은 것은 마지막 하나이다. 즉, 가장 중요한 하나이다. 건륭제가 6번이나 남순하고, 그중 4번을 해녕에 가고, 그리고 매번 진씨의 집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때문인가?

 

강희제는 6번 남순했다. 반드시 조부를 본받고 싶어했던 강희제도 6번 남순한다. 그리고 앞의 2번은 그의 조부 강희와 마찬가지로, 절강의 항주를 종점으로 한다. 그리고 소흥의 회계산에 올라 우릉(禹陵)에 제사지내고 돌아간다. 그 뜻은 국력을 자랑하고 강남의 민심을 다독이는 것이다. 3차 남순때부터, 건륭은 연속 4번이나 해녕으로 간다. 주요목적은 거대한 비용을 들인 전당강해당공사를 시찰하기 위함이다.

 

고대의 전당강유역의 해조는 남대문, 중소문과 북대문의 세 개의 문으로 들출입한다. 만일 해조(海潮)가 북대문으로 향하면 해녕일대의 둑에 가장 먼저 부딪친다. 만일 해조가 남대문으로 향하면 소흥일대의 둑이 위험에 처한다. 유일하게 주류가 중소문으로 가야 남북양안은 해조의 피해를 면할 수 있다. 건륭25년부터, 해조가 북으로 자주 가서 해녕일대가 위험해졌다. 일단 해녕일대의 둑이 무너지면, 근처에 있는 소주, 항주, 가흥, 호주등 전국에서 가장 풍요한 지역이 바닷물에 잠기게 된다. 그래서, 건륭은 '바닷물을 막는 둑을 월중의 최고 시급한 일"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하여 건륭27년 제3차남순때 친히 해녕으로 가서 시찰한다.

 

또 다른 측면으로, 해녕지방의 지세와 토질은 모두 아주 좋지 않다. 공사과정에서 여러가지 곤란을 겪는다. 책임지는 관리들은 구체적인 조치를 놓고 의견차이를 보였다. 그리하여, 건륭은 남순때마다 친히 가서 살펴보고 의사결정하는데 도움을 받고자 했다. 이렇게 하여, 건륭제의 감독하에, 해녕일대에는 거액의 돈을 을인 어린석당이 건립된다. 그리고 성공적으로 해조의 침습을 막을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하여 현지 및 부근의 백성, 토지 및 농업생산의 안전을 보호하는데 아주 큰 역할을 한다. 오늘날에도 이백여년의 해수의 공격을 받았지만, 이 석당의 일부구간은 여전히 완벽하고 계속하여 작용을 발휘한다. 김용선생이 어렸을 때, 해녕의 건륭황제가 만든 석당의 가에서 야영하고 놀았다고 한다.

 

이를 보면, 건륭이 4번이나 해녕으로 간 것은 소위 친부모를 만나기 위함이 전혀 아니고, 해녕의 해당공사를 시찰하고 기획하기 위함이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