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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건륭제)

건륭(乾隆)은 왜 자질이 평범한 가경(嘉慶)을 후계자로 정했을까?

by 중은우시 2012. 6. 30.

글: 유계흥(劉繼興), 유병광(劉秉光)

 

청나라 초기에는 사해가 신복(臣服)하고 국위를 떨치는 강성한 국면을 이룬다. 그리하여 130여년에 이르는 "강건성세(康乾盛世)"가 나타났다. 여기에는 집권자들이 하나같이 사직을 보전하고,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는 걸출한 재능을 지녔다는 것 이외에도, 그들이 모두 우수한 후계자를 선택했다는데 있다. 웅재대략(雄才大略)의 강희, 여정도치(勵政圖治)의 옹정, 예의진취(銳意進取)의 건륭, 이들은 모두 전임황제가 생전에 고르고 골라서 뽑은 최선의 후계자들이었다.

 

가경은 건륭의 후계자이며, 청나라가 중원을 차지한 후 제5대 황제이다. 청나라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는 가경제가 황음하다거나 탐욕스럽다거나, 혼용하다거나, 음험하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다; 청나라의 야사에도 그의 풍류사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이처럼 품행이 방정하고, 정무에 근면하고, 생활이 검소하며, 대인관계에서 후덕한 사람인데, 그는 청나라 12명의 황제중에서 가장 특색없고, 가장 개성없는 황제가 된다. 국가를 다스리는 측면에서 아루먼 공로도 없는 가경제에게서 볼 수 있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핍술(乏術, 술수의 결핍), 평용(平庸)이다. 그렇다면, 건륭은 왜 황위를 그에게 물려주어, 방대한 제국을 그에게 맡겼을까?

 

건륭은 일생동안 17명의 아들을 두었다. 가경제 영염(永琰)은 15째 아들이다. 적장자를 우선시하는 황위계승원칙에 따르면, 순서도 뒤이고, 서출인 영염은 대통을 이을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건륭도 처음에는 확실히 그를 고려대상에 넣지 않았다. 그런데, 하늘은 건륭의 뜻에 계속 어긋났다. 적차자(嫡次子)인 영련(永璉), 적칠자(嫡七子)인 영종(永琮)이 차례로 요절한다. 나머지 황자들도 어린 나이에 요절한 사람이 많았다. 영염이 출생하였을 때는 그의 14명의 형들 중에서 이미 8명이 죽었다. 건륭제의 총애를 받았던 황오자(皇五子) 영기(永琪) 마저도, 몇년후에 요절한다. 여러 황자들 중에서 건륭이 선택할 수 있는 범위는 이미 많이 좁아졌다. 그래서 건륭제는 남은 몇명의 나이어리고, 서출한 황자들 중에서 후계자를 골라야 했다.

 

황십일자(皇十一子) 영성(永瑆)과 황십오자(皇十五子) 영염(永琰)은 건륭의 몇 남지 않은 아들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아들들이었다. 영성은 총명하고 지혜가 있으며, 재주가 넘쳤고 일처리에 주관이 뚜렷했다; 영염은 성격이 내성적이고, 침중하며, 사람됨이 법도즐 잘 지키고 효성이 있으며 인자했다. 청나라의 국력이 날로 쇠퇴하는 상황하에서 이치대로라면 영성과 같이 성격이 선명하고 주관이 뚜렷한 황자가 황위를 계승하는 것이 가장 적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건륭은 황위를 영염에게 넘긴다.

 

건륭의 후계자를 선정하는데서 따른 원칙은 바로, 후임자는 반드시 아무런 의문없이 그의 뜻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정책을 있는 그대로 계승해야 하며, 온 힘을 다하여 그의 권위를 유지보호해야 한다. 그리고 강희이래 개창한 태평성대를 계속 유지해나갈 수 있어야 한다. 영염은 충후하고 성실하며, 법도를 잘 지켰고, 인과 효를 중시했다. 건륭의 말은 무조건 따랐다. 그러니, 건륭의 후계자 선정기준에 가장 부합했다. 조정에서 눈이 있는 자들은 모두 건륭의 영염에 대한 태도와 마음을 눈치챘다. 당시 북경으로 왔던 조선의 사신도 조선국왕에 보내는 보고서에서 이렇게 적었다: "영염은 사람됨이 진중하고, 도량이 커서, 건륭황제가 가장 좋아한다."

 

기실, 건륭이 영염을 후계자로 선택한 것에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가 권력을 내놓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비록 건륭은 "짐은 팔순하고 여섯이 되면 권력을 내놓겠다", "황조(강희)의 육십년수와 감히 같을 수 없다"는 맹세를 하였지만, 그가 나이들자, 지고무상의 황권을 자신의 목숨보다 중하게 여겼고, 조그만큼도 양보하지 않으려 했다. 그것이 자신의 친아들이라고 하더라도, 약간의 파이조각도 나눠주려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물러나지만 물러나지 않는다'는 것을 실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살아있는 동안 계속 조정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까? 이것이 건륭이 얼마남지 않은 말년에 가장 고심한 것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는 인자하고 효성을 지키며, 성실하고, 부친의 명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후계자가 필요하다. 그런데, 영염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과연, 건륭은 황위를 양위하는 동시에 이렇게 선포한다: "무릇 군국대사나 용인(用人)에 관한 것은 절대로 모른 척 놔두지 않을 것이고, 친히 처리할 것이다." 퇴위후에도 건륭은 여전히 자신을 "짐(朕)"이라 칭하고, 그의 명령은 "칙지(勅旨)"라고 부른다; 진공하러 온 조선사신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비록 권한을 신황제에게 주었지만, 큰 일은 그래도 내가 처리한다." 그는 양심전에 이미 60년간 살았고, 이곳이야말로 "안전길상(安全吉祥)"하며, 여러 신하들을 불러서 만나기 편리하다는 이유로 옮겨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가경을 제한하기 위하여, 그는 '황위는 넘겼지만, 옥새는 넘기지 않는' 소동도 일으킨 바 있다; 원래 가경이 즉위한 후에는 당연히 전국에서 가경의 연호를 사용해야 했지만, 궁중에서는 여전히 건륭연호를 사용했다. 예를 들면, 건륭61년, 건륭62년등; 신황제가 즉위한 후 동전은 당연히 "가경통보"를 주조해야 했지만, 그 몇 해동안은 "건륭통보"와 "가경통보"를 절반씩 주조한다...부황의 위세에 눌려, 긜고 효성이 지극하기로 소문난 가경은 그저 몇년간 유명무실한 "제2황제"역할을 수행한다.

 

그래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영염은 그래도 자질이 있었다. 그는 근면하고 공부를 좋아했다. 6살때 글을 읽고, 13살때 오경을 통했으며, 그후 여러 사부로부터 금체시와 고체시를 배웠다. 문화적 기본은 아주 탄탄했다. 특히 14살때 비밀입저된 후, 35세에 등극할 때까지의 20여년간, 그는 정치경험이 풍부한 건륭으로부터 시시때때로 관찰을 당하고, 시험을 받았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차기 황제로 확정된다. 이것은 모두 영염의 자질, 재능이 절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그의 이런 자질과 재능은 모두 인과 효를 지키고, 부친의 명이라면 무조건 따르고, 체계있게 처리하며, 옛것을 그대로 지키는 측면에서는 괜찮게 작용했지만, 나라를 잘 다스리거나, 새로운 것을 개척하고 진취적으로 일하는데서는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만일 천하가 안정되고, 태평성대였다면, 가경의 능력으로 현명한 태평군주가 되는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건륭후기부터 국고가 고갈되고, 국력이 쇠약해지며, 조정의 정치가 부패하고, 관료사회에 뇌물의 기풍이 성했고, 각종 모순이 일촉즉발이었다. '강건성세'의 화려한 빛 아래에 있던 대청제국은 밖에서 보기에는 화려하고 대단했지만, 안에서는 이미 썩어 있었다. 이런 시기에는 강력한 수단으로 철혈정책을 수행할 능력있는 군주가 국면을 바로잡아주어야 했다. 아쉽게도 가경은 앞의 몇몇 황제들처럼 치국능력과 개척기백의 유전인자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비록 근면하고 열심히 했으며 한마음으로 성취를 이루고자 했지만, 기껏해야 충후하고 성실하며 파란에도 놀라지 않는 수성군주가 될 수 있을 뿐이었다.

 

가경제가 친정을 한 후 일련의 정책과 조치를 시행한다. 건륭후기의 여러가지 폐단을 시정하는데는 일정한 작용을 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쇠퇴국면을 바로잡을 수는 없었다. 가경은 날로 심각해지는 부패와 나태를 뿌리부터 치료할 약방을 내놓지 못했다. 수많은 "시록보위(屍祿保位)"하는 관리들에게 그저 경고하고 겁주다가 마지막에는 "어쩔 도리가 없다"고 한탄할 뿐이었다. 서방식민주의자들의 침략에 대하여 약간의 인식은 있었지만, 진정 효과적으로 외래침략자들에 대응할 수 없었다. 그의 재위기간동안 토지는 대관료, 대지주에게 고도로 집중되고, 농민은 대량으로 파산, 유랑하였다. 정치는 건륭후기보다 더 부패했고, 사회모순을 갈수록 심화되었다. 사천, 호북의 백련교와 산동, 하남의 천리교등 대규모의 농민반란이 속속 발발했다. 그후, 일찌기 불가일세의 대청왕조는 쇠퇴의 길을 따라 불가피하게 쇠퇴해 갔다.

 

호대희공(好大喜功)하고 궁병독무(窮兵黷武)하여, 원래 강성했던 대청제국을 쇠퇴의 길로 들어서게 했던 건륭은 죽을 때까지도 통치에 위기가 나타났다는 점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대청제국을 누가 감히 다투겠는가?"라고 소리치기 까지 했고, 심지어 자신이 자손들에게 여전히 강대한 국가를 물려주었다고 생각했다. 이런 당시 형세에 대한 스스로 귀를 막고 눈을 가리는 식의 잘못된 판단은 발가피하게 후계자를 선정하는 문제에서 잘못을 범하게 된다. 이뿐 아니라, 건륭은 허영을 탐하고, 권력을 조종하기 위하여 그리고 자신의 사욕과 사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황위를 대기가 될 수 없는 아들에게 넘겨주게 된다. 그리하여 이백여년간 휘황했던 기업의 대청제국을 치국능력이 없고, 정치적으로 평범한 가경에게 물려준 것이다. 그리하여 대청왕조는 흥성에서 쇠락으로 접어들고, 일패도지한다. 마지막에는 열강들이 마음대로 모욕하고 짓밟는 반식민지로 전락해버리는 것이다. 대청제국이 가경의 손에서 쇠퇴했다고 말하기보다는, 건륭의 손에서 썩어들었다고 하는 편이 맞다. 하나만 잘못하면 모조리 진다.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해야 한다. 아마도 이것이 후세인들이 깊이 생각해야하고 깨달아야 하는 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