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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건륭제)

건륭제와 그 형제들

by 중은우시 2011. 1. 2.

글: 청사(靑絲)

 

옹정제(雍正帝)는 일생동안 10명의 아들, 4명의 딸을 낳았다. 그러나, 단지 4명의 아들과 1명의 딸만이 살아남아 성년이 된다. 나머지는 모두 요절했다. 당시는 천연두가 유행하고, 영아사망률이 아주 높았던 시대여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4명의 황자는 홍시(弘時), 홍력(弘曆), 홍주(弘晝), 홍첨(弘瞻)이었다.

 

그중 황삼자 홍시는 비극적 인물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조부 강희제가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두 형이 요절한 후, 장남이 된 그는 다른 당형제들과는 달리 세자로 책봉되지를 못했다. 그리하여 후계자의 자리를 노리던 옹친왕 윤진은 불안해하고 난감해 앴다. 그리하여 옹정제는 홍시를 아주 엄격하게 훈도하고, 명사를 불러서, 홍시를 잘 키우고자 생각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엄한 교육에 대하여 홍시는 견디지 못하고, 부친이 그에 대하여 편견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마음 속으로 원한을 품는다. 옹정제가 즉위한 후, 홍시는 모친인 제비 이씨가 한군팔기출신이므로 후계자다툼에서 열세에 놓였다. 그리하여 홍시는 알았다. 자신보다 7살이 어린 동생 홍력이 황권의 승계자가 될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것을. 후계자가 되는 가망이 없어지고, 질책을 받다보니, 홍시는 반역심리가 생겨난다. 그리하여 부자간의 갈등이 폭발하게 되는 것이다.

 

강희제의 여덟째 아들 윤사는 강희말년의 후계자다툼에서 명망이 높았던 황자이다. 옹정이 즉위한 후, 비록 윤사를 염친왕에 봉하기는 했지만, 계속하여 그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 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홍시는 오히려 이 숙부와 긴밀하게 내왕한다. 그리고 가까운 사이가 된다. 이런 배반은 냉정하고 각박한 옹정제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옹정3년(1725년), 홍시는 '나이가 어린데 방종하고, 일처리가 조심스럽지 못하다"는 죄명으로 궁중에서 축출된다. 그리고 윤사의 양자로 들어가게 한다. 다음해에는 홍시의 종실신분을 박탈해 버린다. 얼마후 윤사도 '당을 만들어 망녕된 행동을 했다'는 이유를 들어 작위가 삭탈되고, 연금에 처해진다. 홍시는 다시 옹정제에 의하여 열두째 동생 이의친왕 윤도에게 넘겨진다. 윤도로 하여금 그를 관리하고 의식주를 해결해주도록 한 것이다. 1년후 홍시는 우울하게 죽으니 나이 겨우 24살때의 일이다.

 

전대의 후계자 다툼을 둘러싼 혈우성풍을 경험했고, 형인 홍시가 부친을 거역하다가 패가망신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건륭제는 즉위한 후 회유정책을 쓴다. 황족내부의 투쟁을 피하기 위하여, 두 동생에게 은혜를 두텁게 내린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방식은 또 다른 극단을 낳는다. 두 동생이 총애를 믿고 교만해지고, 행위가 괴이해진 것이다.

 

홍주는 옹정제의 다섯째 아들이다. 화친왕에 봉해지고, 건륭제가 즉위한 후, 부친인 옹친왕의 구저택과 재물은 모조리 홍주에게 하사한다. 교만하기 그지없는 홍주는 형의 위세를 믿고, 오만하고 자기마음대로 한다. 소련의 <<숙정잡록>>에 따르면, 한번은 조회에 나가서, 홍수는 군기대신이자 1등공을 하사받은 눌친과 약간 논쟁을 벌인다. 그런데, 여러 대신들의 앞에서 눌친을 구타한다. 건륭제는 이 사건의 경과를 친히 모두 목도하였으면서도 그에게 죄를 묻지 않았고, 그만두라는 말도 하지 않는다. 이를 보고는 문무백관의 그 어느 누구도 홍주에게 대들 수 없게 된 것이다.

 

또 한번은 건륭제가 홍주와 정대광명전에서 팔기자제를 면담하고 있는데, 날이 어두워졌다. 홍주는 건륭에게 먼저 궁으로 가서 식사를 하라고 하나, 건륭이 따르지 않는다. 홍주는 말한다: "내가 뇌물을 받고 마음대로 처리할까봐 그러는 것이냐?" 건륭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다음 날 건륭은 홍주를 보자 말한다: "네가 어제 그렇게 대불경한 짓을 하다니, 만일 내가 여러 사람들 앞에서 대답했다면, 너는 이미 죽은 살덩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에게 죄를 묻지 않았다. 홍주는 또 하나의 괴벽이 있었다. 그는 장례음악을 듣고 장례식을 행하기를 좋아했다. 그는 자주 집안에서 관을 놓고 장례식을 하는 모양을 꾸미곤 했다. 집안 사람들에게는 제사를 지내고 곡을 하게 하고, 자신은 높은 곳에 앉아서 이를 보면서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이다. 건륭은 이에 대하여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홍첨은 건륭제의 가장 어린 동생이다. 두 사람의 나이차이는 23살이다. 건륭이 죽위한 후 그를 과친왕 윤례의 양자로 보낸다. 그렇게 하여 과친왕의 작위를 승계하게 한다. 홍첨은 어려서부터 명사 심덕잠의 교육을 받는다. 그리하여 시사에 조예가 깊었다. 그러나 재물을 탐하는 것이 심하였다. 그는 석탄광산을 깨고, 인삼을 판매했다. 적은 돈을 들여서 전국각지의 골동품과 특산물을 사들인 후, 강매를 했다. 그리고 사람들의 부탁을 받고 관청에 압력을 넣기도 한다. 이렇게 모은 돈을 모조리 집을 짓는데 쓴다. 건륭28년(1763년) 오월, 원명원 구주청연전에 화재가 발생한다. 여러 왕들이 입궁하여 문안을 드리는데, 홍첨이 가장 늦게 나타난다. 그는 도착한 후에도 전혀 신경쓰지 않고 다른 왕들과 웃고 떠든다. 황제와 황태후의 안위는 관심도 없다는 태도였다. 이전부터 홍첨의 소행을 모두 들어서 알고 있으면서도 꾹 참고 있던 건륭제는 이에 대하여 불만을 가진다. 그리하여 홍첨이 황태후를 접견할 때 예의에 어긋났다는 것을 들어, 그의 친왕작위를 박탈하고, 패륵으로 강등시킨다. 함께 황태후를 알현했던 홍주도 3년간 녹봉을 몰수당한다.

 

아마도 홍첨은 일생동안 순탄했고, 좌절이라는 것은 해본 적이 없어서인지, 심리적인 내성이 아주 약했다. 이때부터 문을 걸어잠그고 사람을 만나지 않으며, 우울증에 걸리고, 병석에 누워 일어나지 못한다. 건륭제는 이 말을 들은 후, 친히 그의 집을 찾아가는데, 막내동생의 병이 위중한 것을 보고는 한때 오열하며 실성하기도 했다. 돌아온 후에 즉시 홍첨에게 군왕의 작위로 올려준다. 그래도 홍첨은 얼마후 병사하고 만다. 건륭제는 막내동생의 죽음에 비통해 하며, 특별히 시호를 "공(恭)"으로 내린다.

 

재미있는 일은 홍주, 홍첨에 관한 여러가지 에피소드를 적고 있는 <<숙정잡록>>의 작자인 소련은 예친왕 대선의 육대손으로 예친왕 작위를 물려받은 바 있다는 것이다. 가경제때 소련은 1품관리, 호부상서 경안을 모욕하고, 형벌을 불법적으로 남발한 죄로 가경제에 의하여 친왕의 작위를 박탈당하고, 종인부로 보내어 3년간 연금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아마도 소련의 난폭하고 발호하는 행위는 홍주가 조정신하를 때리고도 용서받았던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그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세습제의 친왕과 황제의 동생인 친왕은 신분에서이건 대우에서이건 모두 적지 않은 구별이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