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건륭제)

<사고전서>에 서양서적을 실은 이유는?

by 중은우시 2013. 2. 4.

 

글: 포강객(浦江客) 

 

 

 

<사고전서(四庫全書)>는 건륭37년(1772년)부터 시작하여 10년가량의 시간을 들여, 대량의 인력물력을 들여 편찬한 대형 총서(叢書)이다. <사고전서>는 많은 유학자, 한학자들이 집단적으로 완성한 건륭제가 친히 정한 국가적 사업이었다. 건륭가경연간의 고거학(考據學)의 공력은 그 <총목제요(總目提要)>에 수천년의 박대정심한 중국학술문화사가 잘 담겨져 있다. 그것은 중화제국의 공식적이고 정통적인 문화적 안목과 내재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입체적이고 등급을 지닌 목록학체계를 만들었다. 또한 여러 책들을 분류하고 정리하고, 제요를 저술하며, 목록을 남기거나, 금훼(禁毁)하여 그들의 정사, 우율의 문화가치등급을 판결했다.

 

<사고전서>의 내용은 아주 풍부하고 방대하다. 문진각 소장본에 따르면, 이 책은 경(經), 사(史), 자(子), 집(集)의 4부로 나누고 고적 3503종, 79,337권을 수록하여 모두 3만6천여책으로 장정했다. 이리하여 풍부한 문헌자료를 보존하게 된다. 그러나, 건륭이 <사고전서>를 편찬한 과정은 우금어정(寓禁於征)의 과정이기도 하다. 건륭이 <사고전서>를 편찬하면서 만청에 불리한 서적을 없앴는데 그 총수가 1만3천6백원에 이른다. 서적과 자료를 금훼한 외에, 만청은 시스템적으로 잔존서적과 자료에서도 삭제와 수정작업을 진행하였다. 이와 동시에, 청나라통치자는 서학을 극력 배척한다. 서방현대과학기술은 "이단지우(異端之尤)"라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사고전서>에는 건륭이전에 중국에 온 17명의 선교사들의 학술저작29부가 실려있다. 그렇다면, 왜 청나라의 국가의지를 대표하는 <사고전서>에 <기하원본>등 '서양서적'이 수록되게 되었을까?

 

첫째, 청나라통치자는 서방과학기술에대하여 객관적인 평가를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서학동점"은 명나라 만력연간 이탈리아 예수회 선고사이자 학자인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서 서학을 전파함으로써 시작된다. 서광계, 이지조, 양정균등 일련의 문화적인 태도가 개방적이고 재능이 비범한 사대부들은 서학을 받아들인다. 비록 서학문헌수입이 한때 중단되기도 하였지만, 서방의 과학기술문헌의 전래는 계속되었다. 청나라초기에 "서학동점"은 서방선교사들이 마테오리치의 학술선교전략을 이어받아, 당시 지식계에서 대거 실학을 주창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명말 서광계등을 이어 경세치용의 서학은 필요하고 운용되게 된다. 동시에 강희제는 서학에 대한 열정이 높아 일부 사대부들이 이를 다라했다. 그리하여 당시의 "서학동점"은 사상유례없는 전성기를 맞이한다.

 

여기서, 강희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강희제의 서학에 대한 열정은 당시 조야역법지쟁(朝野曆法之爭)에서 나타났다. 말년의 강희제는 당시 그가 "조정을 다 살펴보아도 역법을 아는 자가 없다" "마음 속으로 통한스럽다"고 하였는데, 나중에 "천문역법에 뜻을 세워서 20여년을 공부한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개략을 알아서 혼란스럽지 않을 정도"의 수준이 된다. 강희제는 남회인(南懷仁) 신부를 모셔서 수학기기의 응용에 대하여 강의를 듣고, 기하학, 정력학, 천문학중 가장 재미있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을 강의듣는다. 강희제는 서학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여 아주 열심히 공부했다. 매일 선교사들과 함게 2,3시간을 공부하는 외에, 그는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 혼자서 공부했다. 문제를 풀고, 예습도 했다. 그리하여 강희제는 스스로 약간의 삼각법의 정수를 안다고 할 정도로 자부심을 가지게 된다.

 

황제가 앞장서서 서학을 공부하자 선비들의 기풍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광지(李光地)등 일부 사대부들의 할술방향도 바꾸게 된다. 그들은 "구라파의 사람들은 계산이 엄밀하고, 장인들의 제작이 정교하여 실로 전고(前古)를 뛰어넘는다"고 하게 된다. "계산이 엄밀하다"는 것은 이론과학의 분야이고, "장인들의 제작이 정교하다"는 것은 기술응용방면이다. 실제로 유럽의 과학기술이 당시 중국을 추월했다는 것을 인정한 말이다. 이것은 어느 정도 당시 정통유학의 개방성을 보여준다. 청나라초에는 이리하여 서학을 연구, 전파, 응용하는 기풍이 형성된다. 역사적으로 보면, 서학은 당시의 중국학술사상의 발전에 무시할 수 없는 추진력을 나타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청나라초기의 천문학연구가 사상유례없이 인기였다는 것이다. 수학연구도 사상유례없이 흥성했다. 통계에 따르면, <사고전서>에 수록된 자연과학저작장 1600년에서 1770년사이에나타난 천문학저작이 역대 천문학저작의 74%를 차지한다. 동시대에나타난 수학저작은 역대수학저작총수의 44%를 차지한다.

 

다음으로, 청나라통치자들은 서방의 천문역법에 대하여 객관적인 평가를 내렸다고 할 수 있다.

 

<사고전서>에 수록된 서방선교사의 학술저작은 주로 과학기술저작과 가치있는 문화언어류 저작이다. 목적은 "우리가 쓰면 민생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마테오리치는 중서문화를 융합하는 과정에서 전례없이 오래되고 심후한 동방문명을 만나게 된다. 동방의 원류가 긴 문명전통을 만나, 그는 천문산법과 같은 서학의 장점을 잘 발휘하여, 중국학자의 인정과 탄복을 받아낸다. <사고전서> 자(子)부 천문산법류에는 마테오리치가 쓴 4부의 책이 수록되어 있다. 이는 실용지학으로 평가한 것이다.

 

마테오 리치의 <건곤체의>는 자연철학저작이다. 상권은 지구와 천체구조를 토론하고, 지구와 오성의 상호관계원리를 논한다; 하권은 기하문제 18개를 열거하고 수학도형가운에 원형이 가장 포용성이 있고 모든 다른 것보다 아름답다는 것을 증명했다. <사고전서총목제요>에서는 그 원리를 "사람이 거주하는 한난(寒暖)을 오대(五帶)로 한 것은 <주비>의 칠형설과 비슷하고, 칠정항성천을 구중으로 한 것은 <초사.문천>과 같다. 수화토기를 4대원행으로 한 것은 불경과 같다." 이것은 청나라초기에 유행하던 사조인 "서학중원설(西學中源說)"에 부합한다. 그렇게 하여 서학은 쉽게 사대부들에게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기하원본> 6권, 내지 유클리트의<원본>의 평면기하부분에 마테오 리치는 그의 스승인 클라비우스의 라닡문 평석주석본을 서광계와 합작하여 중문으로 번역해서 1608년에 간행한다. 당시 서광계가 왜 <기하원본>이 이처럼 열정과 정력을 쏟았을까? 그 자신은 이렇게 말했다: "이 책에 정통한 자라면,무슨 일이든 정통하지 않을 수 ㅇ벗고; 이 책을 공부하기 좋아하는 자라면, 무슨 학문이든 배우지 못할 것이 없다." 그뜻은 기하정신의 운용과 기능은 한계가 없다는 뜻이다. 기하정신으로 무장된 과학두뇌는 무슨 일을 하든 정교하게 잘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서광계의 기하학보급은 점차 중국사대부들에게 인정받게 된다. 그들은 이들 이론적인 기초과학은 여전히 모든 응용과학의 기초로 보았다. 서광게가 중시한 "전제를 근거로 하여, 한단계 한단계 증명하고, 하나하나 개발한다."는 서학의 실증,정량의 분석법 특히 그중의 "사준루해(絲分縷解)", "분벽해석(分擘解析)"의 분석방법과 정신은 사대부들에게 점차 받아들여진다. 이 책은 명말청초 산학자들의 필독서가 된다.

 

<사고전서>에 서방의 천문역산저작이 수록되는 동시에, 서방의 기계과학, 농업과학, 지리과학 및 문화언어학의 저작물도 수록된다. <사고전서총목제요>를 보면, 청나라초기의 4황제, 순치, 강희, 옹정, 건륭시기에 청나라조정은 서방과학기술에 대하여 비교적 개명한 태도를 나타냈다. 서방선교사에 대한 평가도 기본적으로 객관적이었다. 아쉬운 점이라면, <사고전서>도 <홍루몽>의 정책(正冊), 부책(副冊), 그리고 영책(另冊)으로 나눈다면, 마테오 리치의 중문저작의 처리를 보면 그것들은 '정책'에 들어가지 못했다. 천문산업류의 책은 '부책'에 들어가고, 교의전파류의 서적은 '영책'에 들어갔다. 이것은 바로 서학동점 초기 중국문화의 대화태도이고 서방문화가 처한 운명이었다.

 

특히 안타까운 일은 서학의 열기가 대단했을 때, 중국의 과학은 명말이래의 쇠퇴기를 벗어날 수 있었고, 근대화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혹은 최소한 서방문명에게 크게 낙후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청나라통치자들이 서방을 배우는 적극성은 부족했다. 사람을 유럽으로 보내어 시찰하게 하지도 않았고, 서방의 책을 직접 가져오려는 담량도 없었다. 그저 서방선교사들이 가져다주는 서방에 대한 인식에 만족했다. 동시에 서방의 계속 발전하는 생물학, 화학, 물리학 및 기술(증기기관등)에 대한 번역이나 도입은 결핍되었다. 서방천문학, 수학도 역산에 편중되었다. 특히 청나라초기의 "서학중원"의 침식성 사조는 선비들로 하여금 동서양의 융햡을 샛길로 빠지게 만들었고, 객관적으로 중국학술과 과학의 근대화를 저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