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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건륭제)

우라나라씨: 건륭제의 두번째 황후

by 중은우시 2012. 4. 4.

 

글: 자일(子逸)

 

황후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국모이다. 황귀비의 아랫사람이 될 수가 없다. 그러나, 사실상 대청의 후궁에서 그런 황후가 있었다.

 

청나라의 장례제도에 따르면, 만일 황후가 부군보다 먼저 죽으면, 황제릉에 들어가 황제와 합장한다; 만일 부군보다 나중에 죽으면, 단독으로 릉을 만든다. 청나라때 이런 황후가 있어싿. 황제보다 먼저 죽었으면서 황제릉에 들어가지 못하고, 단독으로 능을 만들지도 못했고, 그저 비원릉(妃園陵)에 매장되었다 .그뿐아니라, 그녀는 자신의 지궁(地宮)도 없이, 황귀비의 동쪽에 묻혔다. 이렇게 하여 황귀비의 수하가 된 것이다. 그녀는 바로 청나라 건륭황제의 두번째 황후인 우라나라씨이다.

 

우라나라씨는 만주 상황기출신으로 좌령 나르부(那爾布)의 딸이다. 건륭보다는 7살이 어렸다. 옹정년간에 그녀는 궁중의 후궁선발에 참가하여, 옹정황제에 의하여 그녀는 홍력의 측푸진으로 보내어진다. 옹정이 죽은 후, 건륭이 즉위한다. 1달후, 우라나라씨는 한비(嫻妃)로 봉해진다; 건륭10년 그녀는 한귀비(嫻貴妃)로 승진한다; 건륭13년, 홍력의 정실부인인 황후 푸차씨가 병사하여 중궁의 자리가 비어있게 된다. 황태후는 중궁의 주인이 없는데 시경을 쓰다가 친히 황제를 위하여 한귀비를 황후로 고른다. 그리하여 그녀는 특별히 의지를 건륭에게 내린다. 모후의 명령에, 건륭은 거역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당시는 푸차씨가 사망한지 얼마되지 않았으므로, 건륭이 새로 황후를 임명하고 싶어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절충적인 방법을 택하여, 먼저 한귀비를 황귀비로 세우고, 후궁을 관리하게 한다. 준황후에 상당한다. 건륭15년, 효현황후의 삼년상이 끝나고, 그녀는 정식으로 황후에 책봉된다. 우라나라씨는 이로써 건륭의 두번째 황후에 올라서 국모가 된 것이다.우라나라황후는 명문출신이고 양호한 교육을 받았으며, 단장하고 전아했다. 국모의 풍모가 있었다.

 

우라나라씨는 명문출신으로 양호한 집안교육을 받았다. 단정하고 전아했으며, 국모의 기품이 있었다. 그녀는 황후에 오르기 전에 건륭제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자식은 없었다. 황후로 책봉된 후 5년동안 그녀는 연속으로  황십이자 영기, 황오녀, 황십삼자 영거를 낳는다. 이를 보면, 황후로 책봉된 우라나라씨가 건륭제의 총애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어지는 한가지 사건이 그녀를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건륭30년, 건륭제는 다시 남순에 나선다. 황제의 일행이 항주에 도착했을 때, 아침에는 건륭이 황후에게 많은 물건을 내린다. 그러나, 그날 저녁에 식사를 할 , 황후는 자리

나타나지 않았다. 원래, 도중에 건륭이 푸롱안을 시켜 황후를 북경으로 호송하여 돌려보낸 것이다. 건륭이 북경에 돌아온 후, 영귀비 웨이쟈씨를 황귀비로 올리고, 5일후, 황제는 황후의 수중에서 4개의 협지책보를 회수한다. 즉 황후책보 1부, 황귀비 1부, 한귀비 1부, 한비 1부이다. 그리고 황후 수하의 궁녀들을 회수한다. 청나라제도상 황후의 아래에는 12명의 궁녀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건륭30년 7월, 우라나라황후의 아래에는 두 명의 궁녀만 남는다. 이것은 답응(答應) 수준의 규격이다.

 

황후가 돌연 총애를 잃게 된 원인에 대하여 사학에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건륭의 주장] 건륭은 황후의 실총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했다: 황후는 스스로 머리카락을 잘랐다. 이는 국가의 금기를 건드린 것이다 .만주족이 보기에,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은 '한번 죽는다'는 의미를 지닌다. 황제, 황후 혹은 부모가 죽은 후에 아들, 신하는 머리카락을 잘라서 '순사(殉死)'했음을 표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라나라씨는 태후, 황제가 아직 살아있는데 스스로 머리카락을 자르다니, 이것은 태후와 황제에게 빨리 죽으라고 저주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건륭의 불만과 분노를 사서, 황후는 총애를 잃는다. 그러나 황후가 왜 머리카락을 잘랐는지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았다.

 

[자료의 견해] 자료에서 우라나라황후가 돌연 총애를 잃어버린데 대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황제는 한 비(妃)를 들이고자 했는데, 황후가 극력 반대했고, 투기심을 나타냈다. 그리고 잠시 정신을 놓아서 머리카락을 자르게 된다. 이로 인하여 건륭의 미움을 사고, 총애를 잃는다.

 

[야사의 견해] 야사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건륭이 남순때, 자주 여자들을 건드렸다. 한번은 비구니를 건드렸다. 황후는 이를 알고 크게 불만을 가진다. 손에 간언하는 글을 들고 가서 황제에게 권한다. 그러나 황제는 보거나 들으려 하지 않고 황후를 후궁을 잘 관리하지 못한다고 질책하고, 투기심이 너무 크다고 질책했다. 황후는 이에 말대꾸를 한다: '황상이 머리카락이 없는 여자를 좋아한다면 나도 머리카락을 잘라버리겠다. 그러면 좋아하시겠느냐' 그리고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버린다. 건륭제는 대노하여, 황후를 북경으로 호송하게 한다. 이로써 우라나라씨는 황제의 총애를 잃는다.

 

이상의 세 가지 견해중에서 필자는 야사가 맞는 것같다. 우라나라씨는 명문출신이고, 양호한 교육을 받았는데, 분명히 현숙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황제와 황태후의 총애를 받아 황후에 오을 리가 없다. 그러므로 그녀는 예절과 법도를 모르고 투기를 했을리는 없다. 이 일의 근원은 기실 황제에 있다. 건륭이 즉위초, 조부,부친대의 업적을 이어받아 스스로 근면성실하게 정무를 보아 건륭성세를 일으켜 전성기를 이룬다. 그는 자신의 통치하에 대청의 국고가 날로 쌓이고 백성이 날로 부유해지는 것을 보고는 더 이상 노력을 하지 않게 된다. 건륭이 좋아했던 일은 순유였다. 매번 순유때마다 엄청난 돈을 썼다. 이뿐아니라, 건륭은 풍류천자였다. 사람을 시켜 각양각색의 미녀를 찾고 즐겼다. 황후는 황제가 이처럼 진취적이지 못하고 술과 여자에 빠져있으면서 강산사직을 돌보지 않는데 대하여 불만이 컸다. 국모로서 그리고 대청강산의 영원한 발전을 위해서 그녀는 황제에게 그만두도록 권할 의무가 있었다. 여러번 완곡하게 권했지만, 황제는 듣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더욱 심해졌다. 비구니까지 품에 안은 것이다. 우라나라씨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죽음을 각오하고 직언한다. 심지어 '머리카락을 깍아서 뜻을 나타낸다' 그렇게 하여 결국 건륭제의 총애를 잃는다.

 

황후가 돌연 총애를 잃자 정신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얼마후 병을 얻어 한을 품고 사망한다. 향년49세이다. 황후가 죽었을 때, 건륭은 피서산장에 있었다. 황후의 사망소식을 듣고, 그는 전혀 슬퍼하지 않았고, 그저 황후의 친아들인 십이아거 영기를 북경으로 보내어 장례를 치르게 한다. 자신은 여전히 피서산장에서 먹고마시며 놀았다. 이뿐 아니라, 황후가 죽은 다음 날, 건륭은 명을 내린다: 황귀비의 규격으로 황후의 장례를 처리하라. 사실상 우라나라황후의 장례는 황귀비에도 전혀 미치지 못했다. 제도상으로 황귀비, 귀비, 비는 모두 신패를 만들어, 원침의 대전에 모시고, 매년 청명, 연말에 두번 제사를 지낸다. 그러나 우라나라씨는 사후에 신패도 없고, 제사의식도 없었다. 심지어 단독으로 지궁을 마련해주지도 않고, 순혜황귀비의 지궁에 들어가서 황귀비의 수하가 된다.

 

일대황후가 죽은 후, 황제가 이처럼 냉막하게 굴다니. 속담에 '일일부처백일은(一日夫妻百日恩)"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건륭은 자신을 삼십여년간이나 따른 처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반군여반호(伴君如伴虎, 임금을 모시는 것은 호랑이를 모시는 것과 같다)', '황궁무진정(皇宮無眞情, 황궁에는 진정한 사랑이 없다)'이라는 말이 그대로 들어맞는다. 황후는 이미 죽었지만, 그녀가 죽음을 무릅쓰고 직언한 정신은 감탄할 만하다. 우라나라씨는 태평황후로 지낼 수 있었다. 궁중에서 자신의 복을 누리며 살 수가 있었다. 그러나 강산을 위하여, 사직을 위하여, 백성을 위하여, 그녀는 자신의 지위와 생명을 버리고 죽음을 무릅쓰고 직언했고, 삭발을 함으로써 뜻을 나타냈다. 역사상 이처럼 대의에 밝은 황후가 몇 명이나 있을까? 비록 역사의 회고록에서 그녀의 종적을 찾아보기는 힘들지만, 그리고 비록 신패도 없고, 지궁도 없지만, 우라나라씨는 영원히 후세인들의 존경을 받을만한 열후(烈后)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