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건륭제)

건륭제의 어용보도(御用寶刀)

중은우시 2012. 10. 20. 00:50

글: 문재봉(文裁縫)

 

 

스크린에서 관중들이 잘 알고 있는 건륭제는 손에 일년 사계절 부채가 들려 있다. 그의 우아하고 고귀한 기질을 보여주는 이외에 필요한 때면 부채가 방어무기로 쓰이기도 한다. 매번 위기의 시각에 이 부채는 건륭제의 손에서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적을 사지로 몰아넣는 신비한 무기로 변신한다.

 

당연히, 이것은 그저 영화드라마작품이나 문학작품에서 만들어진 건륭제의 이미지이다. 현실의 건륭제는 어떠했을까? 그가 몸에 지니고 다닌 무기는 정말 부채 하나였을까?

 

1644년, 만주귀족은 병력을 이끌고 산해관을 넘어왔고, 이때부터 청왕조 이백여년의 통치역사가 시작된다. 부인할 수 없는 점은 청왕조가 중원에 들어온 후 4번째 황제인 건륭은 확실히 문무를 겸비한 황제였다. 그는 60년의 재위기간동안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십전무공(十全武功)"이다. 소위 "십전무공"은 그가 여러번에 거쳐 변방의 반란을 진압했는데 그중 두드러진 것이 10번이라는 것이다. 그중 비교적 유명한 것은 두 번에 걸쳐 서남의 대소금천을 정복한 일, 두번에 걸쳐 서북지구의 준가르부족을 진압한 일, 한번의 신강 회족을 진압한 일등이다. 이런 출병때 건륭제는 몸에 어도를 차고 제왕의 위엄을 드러내는 외에 몸을 방어하는 작용도 했다. 실제로 건륭의 방어무기는 영화드라마작품에서 묘사한 것과 같은 부채가 아니라, 보도(寶刀)였다. 

 

북경고궁박물원의 소장품중에 이런 진귀한 문물이 있다. 건륭어용도. 고궁의 전문가 소개에 따르면, 건륭어용도는 주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요도(腰刀)이고, 다른 하나는 패도(佩刀)이다. 통상적으로, 요도의 도신은 직선형이며, 길이는 보통 장검보다 약간 짧다. 패도의 형태는 더욱 작다.

 

고궁에 소장된 이들 어용도구는 마상민족의 특징을 강하게 보여준다. 그 형태는 현재의 몽고도(蒙古刀)와 유사하다. 대부분은 만월형이다. 그외에 칼집과 손잡이의 위치에 금사로 둘러쌌다. 어떤 장식은 아름다운 문양이 있고, 어떤 경우는 다채로운 보석을 상감했다.

 

북경고궁박물원에 현존하는 실물과 자료를 보면, 건륭제는 내무부 조반처에 명하여 4번 어도를 제작하게 명령하였고 모두 100여개의 관지(款識)가 있는 어용보도를 만들었다. 제1차 도구의 설계제작은 1748년으로 건륭13년이다. 건륭제는 이들 도구의 제조에 대하여 여러가지로 마음을 다 쏟았다. 최초의 종이양식, 나무양식의 설계이건, 구체적인 제조수량, 명칭, 장식, 연관, 심지어 도구의 부속품, 가죽칼집, 남목상자, 금을 쓰는 양 및 부피첨에 쓰는 글씨모양까지 크고 작은 모든 일을 친히 관여해서 만들었다.

 

매번 조반처가 제작절차를 하나씩 끝낼 때마다, 사고 백세수와 칠품수령 사무하는 친히 가지고 궁내로 들어와 태감총관 호세걸에게 보여주었고, 그가 양심전으로 가져가서 건륭황제게 보도록 했다. 건륭황제가 자세히 살펴본 후에, 다시 만족스럽지 않은 부분에 대하여는 수정요구를 한다. 그 후에 조반처는 다시 지시에 따라 개선하고 가공한다. 그후에 다시 황제에게 올려서 검사받는다. 이렇게 반복하여 수정한 후 건륭제가 만족할 때까 되어서야 완공했다. 이렇게 하여 이들 보도는 건륭22년 즉 1757년이 되어서야 정식으로 완성된다. 전후로 10년의 시간을 들인 것이다.

 

건륭황제가 이들 도구에 대하여 신경쓰고 중시한 정도는 청나라때도 비교적 보기드문 일이었다. 칼을 만드는데 공을 세운 사고 백세수는 이로 인하여 원외랑으로 승진한다. 그후, 건륭제는 다시 3차에 걸쳐 도구를 제작하도록 명령한다. 이 3차에 걸친 도구이 매 중량은 18량 정도이고, 조형, 길이, 관지, 도기등에서 모두 제1차도구와 기본적으로 같았다. 단지 손잡이, 칼집, 호수(護手)등이 약간씩 달랐다

 

건륭이 재위할 때, 계획적이고 규범적으로 4차에 걸쳐 어용보도를 제작한 이외에, 시시때때로 사람들에게 명하여 정교한 도구를 만들게 한다. 이들 도는 길이와 크기가 모두 달랐다. 어떤 경우는 비수 정도의 크기이고, 옥손잡이, 가죽칼집도 변화가 많았다. 고귀한 보석으로 장식하여 사람들에게 화려하고 아름답다는 느낌을 주었다. 건륭제는 자주 이들 보도를 몸에 지니고 다녔다.

 

건륭의 어용보도는 청나라 냉병기의 대표작이다. 그것은 중국고대 도구의 전통양식과 제작방법을 집대성한 것이고, 당시의 역사특징과 공예수준을 보여준다. 이들 보도는 공법이 정교하고, 장식이 아름다워서 충분히 건륭시대의 부유와 사치를 반영한다.

 

지금, 이들 어용보도는 고아하고 장중하며 장식이 화려하다. 아름다운 어용보도는 북경고궁박물원의 진보관에 소장되어 사람들이 감상할 수 있다. 이들 도구는 비록 200여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날카롭기 그지없고, 차가운 기운을 내뿜는다. 실로 중국 청나라 도검제작의 최고제작수준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