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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공통)

고대 중국에서 여름에 무엇을 마셨는가?

by 중은우시 2012. 8. 15.

글: 예방육(倪方六) 

 

여름이 되니 온도가 높아졌다. 현대인들은 에어컨, 냉장고가 있으나, 과거에는 이런 제냉설비가 없었다. 고대 중국인들은 어떻게 여름을 보냈을까?

 

여름은 겨울과 마찬가지로, 아주 불편한 기후조건으로 인류생활의 질을 떨어뜨렸다. 그리하여, 고대중국인들은 여름을 지내는 방법을 여러가지 생각해냈고 명 가지 발명을 했다. 예를 들어 선진(先秦)시대에는 천연얼음을 이용하여 제냉하여 음식물을 신선하게 보관하고, 차가운 음료를 만들었다.

 

<주례(周禮)>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주왕실은 여름에 얼음을 사용하기 위하여, 상응하는 기구를 두어서 "빙정(氷政)"을 관리했고, 책임자는 "능인(凌人)"이라고 불렀다. 이 부서는 편제된 인원이 적지 않아서 모두 80명의 '직공'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매년 겨울 12월부터, 직공들은 천연얼음을 채취하기 시작하여, "능음(凌陰)"이라고 부르는 얼음창고에 보관한다.

 

고고학적 발견으로 보면, 집에 얼음창고를 두는 것은 고대인의 지위와 신분의 상징이었다. 서한 양무왕 유무는 죽은 후 지금의 하남성 영성현 경내의 망탕산에 묻혔는데, 그의 묘는 상당히 호화스럽다. '화장실'을 갖추고 있는 외에 '얼음창고'도 갖추고 있었다. 아마도 유무는 더위를 싫어하여, 생전에 누리든 것을 사후에도 누리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주왕실은 얼음을 주변 사람들에게 하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나 이런 복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좌전. 소공4년>의 기록에 따르면, 지금으로 말하자면 고위관리들만이 얼음을 나눠받을 수 있었다. 소위 "식육지록, 빙개여언(食肉之祿, 氷皆與焉)". 고기를 먹을 자격이 되는 관리만이 여름에 얼음을 받을 자격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사빙(賜氷)"제도는 명,청까지 지속되었다. 명나라때 사람 유동(劉侗), 우혁정(于奕正)이 편찬한 <제경경물략>의 기록에 따르면, 매년 입하(立夏)가 되면, 명나라조정은 문무대신들에게 얼음을 하사했다. 청나라때도 마찬가지였다. '사빙'는 관리들에게 일종의 복지로 여겨졌다. 그러나 하사방식은 약간 바뀌었다. 직접 얼음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빙표(氷票)"를 주는 것이다. 경성에는 "서복일(暑伏日)로부터 입추일(立秋日)까지" 빙표가 있으며 이는 청나라때 사람인 부찰돈숭(富察敦崇)이 편찬한 <연경세시기>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다: "당시 공부에서 빙표를 나누어주며, 스스로 가서 얼음으로 바꾸어 받는다. 다과는 서로 다르고, 각각 차등이 있었다."

 

고대인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한 냉장기구는 "감(鑒)"이라고 한다. '감'은 실제로 일종의 큰 대야이다. 초기에는 도기로 만들어졌으나, 춘추중기이후에는 청동감이 유행한다. 이는 '빙감(氷鑒)'이라고도 부른다. 빙감은 일종의 원시적인 냉장고이다. 사용할 때, 음료나 음식물을 가득 담은 그럿을 넣고 주변을 얼음으로 둘러싼다. 그리고 두껑을 닫아놓는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차가운 음료'가 만들어진다. 1978년에 발굴한 전국시대 증후을묘(曾侯乙墓)에서는 아름다운 원시냉장고, 반훼동방감(蟠虺銅方鑒)이 출토되었다.

 

상술한 재냉방법은 백성들이 쓰던 것이 아니다. 진,한시기에 보통의 가정에서 여름을 지낼 때, '냉기'의 주요 공급원은 '우물'이었다. 재냉과 신선도유지에 "정장법(井藏法)"이 사용되었다. 혹은 우물의 가운데 큰 항아리를 두고, 음식을 담아두는 '냉장실'로 사용하기도 하고, 혹은 식품을 바구니의 중간에 넣고, 밧줄로 우물아래에 내려보내어 보존했다. 현대인들도 이 방법으로 수박을 얼려서 먹기도 하고 있다.

 

사실상, 고대인들이 해갈에 사용한 차가운 음료는 현대처럼 그렇게 복잡하지 않았다. 보통사람들에게 우물물은 그들에게 가장 좋은 '음료'였다. 한나라때 여름의 주요음료는 기본적으로 우물물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정지소상, 한천열청(井之所尙, 寒泉冽淸, 우물물을 좋아하는 것은 차갑고 맑기 때문이다)" 현재 사람들은 광천수를 잘 마시는데, 이것은 한나라사람들의 유풍과도 비슷하다.

 

고대인들은 뜨거운 음료를 "탕(湯)"이라고 부르고, 차가운 음료는 "수(水)"라고 불렀다. 한나라때 여름에는 비교적 신경을 쓴 음료가 있었다. 밀수(蜜水, 꿀물)'. 이것은 물 속에 꿀을 탄 음료이다. 한나라때의 스프라이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로서는 고급음료였다.

 

한나라말기에 이르러 음료에 꿀을 타는 것은 당시 사람들의 습관화된다. 한나라말기의 효웅인 원술(袁術)은 이런 음료를 아주 즐겨 마셨다. 원술이 죽었을 때가 마침 한여름이었는데, 밀수를 한 잔 마시고 싶었지만, 당시 부대에는 이미 식량이 떨어졌는데, 어디서 꿀을 구할 수 있겠는가? 주방장이 물을 한잔 가지고 오자, 원술이 장탄식을 한다: "나 원술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그리고는 평상(床)위에 엎드려 피를 토하고 죽는다. 이것이 바로 <위서>에 쓰여 있는 "시성서(時盛暑), 욕득밀장(欲得蜜漿), 우무밀(又無蜜)...."이 바로 이 내용이다.

 

원술이 마시고 싶어했던 "밀장"이 바로 밀수와 유사한 여름음료이다. 일대효웅이 한잔의 음료때문에 죽어버리게 된 것이다. 이것은 중외음료사상의 큰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다.

 

수,당에 이르러, 음료는 이전보다 많이 세련된다. 오늘날 우리들이 숭상하는 보건음료와 유사한 것들이 출현한다. 당시 사람들은 음료를 '음자(飮子)'라고 불렀다.

 

'음자'는 과일을 쓰기도 하고, 한약재를 쓰기도 하여 만들었다. 해갈하는 동시에, 열을 내리고 해독하는 기능도 있었다. 음자는 수,당의 소비자들에게 인기를 끈다. 당시 장안 거리에는 '음자점(飮子店)'이 많았고, 장사가 잘 되었다. 어떤 음자점은 먼저 마신 후에 돈을 치를 수도 있었다.

 

오대(五代)때 사람인 왕인유(王仁裕)의 <옥당한화(玉堂閑話)>에서는 한 음자점을 언급한다. 당시 장안성의 서시(西市)에 있는 한 음자점의 장사가 무척 잘되었다. 매번 한여름이 되면, 큰 솥에 음자를 끓여서 팔았다. 이 집에서 파는 음자는 '천가지 질병'을 치료할 수 있어, 한번 마시면 괜찮았다. 그래서 유명해졌다. 당연히 값이 싸지는 않았다. '한번 마시는데 백문'이었다. 이는 약물로 판매한 것이다.

 

당나라때 길거리에서 얼음을 파는 것은 이미 장사수단이 된다. 그리고 날이 더우면 값이 오르는 현상이 일어난다. <당척언(唐摭言)>의 '자부(自負)'조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있다: 옛날에 괴(蒯)에 사는 사람이 장사를 하러 시장으로 와서 얼음을 팔았다. 날이 몹시 더운 날을 손님들이 사러 오는데, 그는 때를 만났다고 생각하여 수배의 이익을 남기고 팔았다. 손님들은 화가나서 모두 그의 얼음을 사지 않았고, 시간이 흐르니 얼음이 모두 녹아버렸다. 이것은 괴에서 온 사람이 너무 욕심을 부리다가 후회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길거리에서 얼음을 하는 것이 당나라이후에는 여름이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광경이 되었다. 남송때의 시인 양만리는 그가 생활하던 시대의 장삿꾼들이 길거리에서 얼음을 사라고 소리치는 광경을 묘사했다.

 

제성육월일정오(帝城六月日停午)

시인여취한여우(市人如炊汗如雨)

매빙일성격수래(賣氷一聲隔水來)

행인미흘심안개(行人未吃心眼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