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추우(李秋雨)
중국이 고난의 근대사를 겪에 된 것은 그 원인이 상당부분 제해권을 상실하였다는데 있다. 그러나, 이전에는 중국이 육지에서뿐아니라, 세계최대의 해양대국이기도 했다. 그때는 중국이 대해를 통치하던 시대였다.
중국이 바다를 지배한 사례를 언급할 때면, 거의 모든 사람들의 머리 속에슨 즉시 "정화(鄭和)"라는 이름이 떠오를 것이다. 정화는 중국역사상 가장 위대한 항해가로 공인된 인물이다. 그의 하서양(下西洋, 여기서 서양은 말라카해협 서쪽의 인도양을 의미함)이라는 위대한 항로는 세계항해역사상 공전의 장거였다. 명나라때 회족 태감으로서, 정화는 여러개의 세계기록을 세운다. 그중 하나는 "중국역사상 최초로 해로를 통하여 서양에 사신으로 간 외교관"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환관역사상 최대의 빛나는 순간이다. 그러나, 사실상, 중국에서 최초로 하서양한 외교관은 회족인 정화가 아니라 한족인 양양요이다.
양양요는 함양 경양 사람이다. "어려서는 절의(節義)에 뜻을 두고 행했으며, 나이가 들어서는 충용(忠勇)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았다." 요즘 말로 하자면, 포부가 있고 실력이 있으며 어려서부터 위대한 뜻을 세운 청년이라는 말이다. 양제독은 당숙종 덕년중(756-758)에 황제의 궁중으로 들어간다. 환관의 신분으로 전설적인 일생의 분투를 시작한다.
당나라는 중국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조라 할 수 있다. 과학기술, 문화, 경제, 군사등 방면에서 모두 사상유례없는 성취를 이룬 왕조이다. 국력과 국제영향력을 보면, 당시 세계제일의 제국이라고 하여도 지나치지 않다. 이것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만일 대당성세때 태어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탄식하는 바로 그 왕조이다.
양양요는 당왕조에 태어났지만, 그가 활동한 주요연대는 소위 '대당성세'때는 아니다. 한때 휘황했던 대당왕조는 756년에 발발한 대반란으로 순식간에 태평성대의 정점에서 난세의 질곡으로 떨어진다. 비록 8년의 고전을 거쳐, 당나라는 겨우겨우 이 반란을 평정했지만, 그후에 100여년의 통치는 이미 '대당성세'로 되돌릴 수 없었다. 제국통치의 기반은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실력있는 무장들은 군벌화하고, 각지의 소수민족이 폭동을 일으키녀, 주변의 강대군사실력은 야심을 드러낸다...제국이 위기를 해소하기는 했지만 다시 더 심각한 위기로 빠져든 것이라 할 수 있다.
당나라의 전성기때 명장 양사욱(楊思勖)부터 시작하여 환관집단은 점점 당나라의 정치생활에 참여한다. 그리하여 양양요도 여러번 전국각지를 돌아다니며 평화사절의 역할 혹은 무장진압의 사명을 집행한다.
당대종 영태원년, 자(절강성 자계일대), 습(산동성 임읍일대)에서 대규모의 반란이 일어난다. 양제독은 판관의 신분으로 낭산부락에 단기필마로 사신으로 간다. 그는 우두머리닌 답실력으로 하여금 무릎을 꿇고 갑옷을 내놓고 활을 버리며, 마음을 되돌려 황제의 조서를 받도록 만든다. 이렇게 이번 폭동을 평정한다. 이것은 당나라가 또 한번의 위기를 넘겼을 뿐아니라, 동시에 양제독으로 하여금 양제독이 어떤 고난이 있더라도 임무는 반드시 수행한다는 좋은 평가를 받게 만들었다. 대종 대력6년, 즉 771년 그는 조의랑, 궁위국승으로 승진한다.
이 기간동안 그는 '안남(安南)을 선무하고, 광부(廣府)를 힘으로 누르는" 외교사명을 완수한다. 그리고 성공적으로 반군 가서면(哥舒冕)을 투항을 받아낸다. 이러한 일련의 공적으로, 대력12년 즉 777년 그는 궁위령이 되어 내정의 정무를 책임지게 된다.
당덕종 건중4년(783년), 유명한 경원병변이 발발한다. 군수물자문제로 반란을 일으킨 군대는 장안을 점령한다. 반군의 우두머리인 주차(朱泚)는 스스로 대진황제로 칭하고, 응천이라는 연호를 반포한다. 그는 3000여명의 병사를 보내어 봉천성(건현)의 덕종황제를 추격한다. 대당왕조는 안사의 난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이한 것이다.
이성(李晟)등 '중흥명장'으로 불리는 장군들의 노력으로, 덕종은 죽음을 겨우 면한다. 그는 한중으로 도망친다. 그가 사방에 지원세력을 모은다. 회흘로 가서 병력을 요청한 사람은 바로 덕종의 '귀성몽난'이래 그의 곁을 계속 지키고 있던 양양요였다. 이것은 흥원초년(784년)에 발생한 일이다.
회흘의 기병은 이성등 명장의 지휘하에 이번 반란진압에서 크게 활약하고, 성공적으로 주차의 군대를 무찌른다. 덕종은 만신창이가 된 장안으로 돌아온다. 당나라는 다시 한번 멸망의 위기를 넘긴 것이다. 양양요는 자신이 이 기간동안 했던 충성과 능력으로 몇단계 뛰어 내시성내급사로 발탁되며, 조산대부의 작위를 받는다.
국내의 군벌외에 주변의 강대외족정권도 중원지역에 대한 야심을 가지게 된다. 그중 제국에 가장 위협이 되는 것은 토번이었다. '일대명상' 이필은 "북화회흘(北和回紇), 남통운남(南通雲南), 서결대식천축(西結大食天竺)"의 방안을 제정하여, 토번을 고립시키는 외교정책을 썼다. 이 정책에서 '서결대식,천축'의 구체적인 집행자가 바로 양양요이다. 그리하여 양제독은 황제로부터 "흑의대식"에 사신으로 가도록 명받는다. 그리고 남해에서 육지를 버리고 배를 탄다. 그는 중국역사상 첫번째로 해로를 통하여 서양에 사신으로 가게 된 것이다.
양양요의 항해노선에 대한 구체적인 역사기록은 없다. 그러나 그와 동시대에 저명한 지리학자인 가담(賈耽, <구당서>에는 賈躭이라 적었다)이 쓴 <광주통해이도>에는 광주에서 동아프리카로 가는 항해노선이 기록되어 있다. 남해에서 출항하여, 해남도 동남을 지나, 남해의 인도지나반도 동안을 따라간다. 타이만을 지나, 다시 말라카해협을 지나 니코르바제도를 지나, 방글라데시만을 횡단하여 사자국(스리랑카)에 도착한다. 다시 인도반도의 서안으로 항해하여 아랍해를 지나, 호르부츠해협을 거쳐 페르시아만의 아바단부근에 도착한다. 다시 유프라테스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바스라에 도착하고, 서북으로 육지를 천리정도 가면 티그리스강가의 아랍의 수도 바그다드에 도착한다. 비록 구체적인 사료기록은 없지만, 양양요가 간 항해노선은 이 항해노선과 기본적으로 일치할 것으로 믿는다.
후세의 정화와 달리, 양양요가 항해한 것은 후세소설가의 소재가 되었다. 그러다보니, 이번 항해노선에 관해서는 이런 문자로만 남아 있다: "아무리 멀더라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모습과 늠연하게 반드시 건너겠다는 기색을 가지고, 의리로 좌우 사람들을 격려하고, 충성심으로 귀신을 감동시켰다. 공은 머리를 잘라 파도에 제사지내고, 해를 가리키며 사람들 앞에서 맹세한다. 그리하여 날씨도 좋아지고 파도도 잦아지며, 바람도 순조로워진다. 돛을 달고 타도를 넘고, 노를 저어 머나먼 바다를 저어간다. 검은 밤에는 신등(神燈)이 길을 안내하고, 대낮에는 선수(仙獸)가 앞길을 연다. 세월이 흐르고 만국을 지난다. 황제의 풍속을 이족에 전파하고, 중국의 가르침을 이족들에게 전해준다." 비록 기록 자체는 아주 간략하지만, '밤에는 신등이 길안내하고, 낮에는 선수가 앞길을 연다'는 등의 문자에서 이번 항해가 얼마나 험난했을지는 짐작할 수 있다.
<신당서. 대식전>에 따르면, "정원중, (흑의대식)은 토번의 강적이다. 토번의 병력 절반은 서쪽으로 대식을 방어했다 .그래서 변방의 우환이 거의 없었다. 그들의 힘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를 보면 양제독이 하서양으로 간 활동에서 '오가는 기일을 지키고 사명을 완수'하는 거대한 성공을 거두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양양요가 귀국한 후, 그는 정원4년, 즉 788년 육월에 중대부에 임명되고, 나중에 홍농현 식읍 300호를 받는 남작이 된다. 이때부터 양제독은 더 많은 외교임무를 맡는다. 796년에는 다시 태중대부의 작위를 추가로 받는다.
정화와 양양요는 둘 다 환관이라는 점 이외에, 출항임무에서도 비슷한 점이 있다. 정화시대에는 "세계에서 유사이래 최대의 정복자"인 징키스칸의 후예인 테무르가 중앙아시아를 근거지로 하여 방대한 군단을 건립하고, 건국된지 얼마되지 않은 대명왕조를 정복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정화의 항해는 인도의 여러 왕국과 연락하여 테무르제국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테무르는 얼마후 병으로 죽는다. 그리하여 정화의 사명이 정말 실현된 것인지 여부를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이와 비교하면, 양제독의 공적은 실제로 존재했다.
정원13년(799년), 회서절도사 오소성(吳少成)이 반란을 일으킨다. 63세된 양제독은 '감동도기여주군사'의 신분으로 이번 반란진압에 참여한다. 양제독이 이번 전쟁에서 어떻게 전투를 지휘했는지에 대하여 후세나 당시의 사료는 상세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비록 '패배를 승리로 뒤집었다'는 말은 있지만.
당헌종 원화원년 즉 806년, 오조노신 양제독은 그의 전설적인 일생을 장안의 보흥리에서 마감한다. 그해에 그는 70세였다. 그는 함양시 경양현 서북의 양호촌에 묻힌다. 정화와는 달리, 양양요는 얼마후 사람들에게 잊혀진다. 그의 사적은 그의 묘지와 함께 발굴된 <당교양부군신도지비>라는 비문으로 남아 있다. 항해거리로 보면, 양제독은 정화와 차이가 크지 않다. 그러나 시기는 정화보다 600여년이나 빠르다.
그외에, 정화의 시대는 대명왕조가 가장 강성하던 시기였다. 그는 강대한 제국의 힘을 바탕으로 원거리 항해를 할 수 있었다. 이와 비교하자면, 양양요는 당나라가 일박서산하던 시대이다. 중앙정부로부터의 지원은 정화와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이렇게 보면, 한족인 양양요는 회족인 정화보다 위대하다고 할 수 있다. 중국과 아랍간의 문화교류에 이렇게 큰 공헌을 했고, 대당제국의 변방평화를 오랫동안 유지하게 해준 외교가, 항해가는 땅 속에 1100여년이나 조용히 묻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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