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노채(老蔡)
당나라 제일명장을 꼽으라면 이정(李靖)을 꼽아야 할 것이다. 공명을 이룬 고대 군사장수들중에서 승리가 패배보다 많으면 명장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정처럼 일생동안 패배를 한 적이 없는 장수는 역사상으로도 보기 드물다. 이정은 당태종 휘하의 최고 군사모략가였고, 능연각24공신중 1명이다. 나중에 당숙종도 그의 충실한 팬이었고, 그를 역사상 10대명장중 1명으로 꼽았으며, 강태공묘에 배향했다.
이정의 일생은 휘황한 일생이다. 백전백승의 일생이다. 그는 이당의 건립에 한마공로(汗馬功勞)를 세웠으며, 나중에 이당의 안정을 위하여 주변국들과의 전투에서도 전공이 혁혁했으며, 명성을 널리 알렸다. 그러나 이처럼 전장터를 누비고, 운주유악하며 지용을 겸비한 명장도 일생동안 4번의 큰 위기를 만난다. 두번은 하마터면 피살당할 뻔했고, 두번은 무고로 하마터면 감옥에 들어갈 뻔했따. 그러나, 그는 이를 하나하나 풀어나갔고, 결국 공명을 성취하고, 선종한다.
이정은 관료집안에서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병서를 읽었으며, 견식이 남달랐다. 그의 외삼촌은 수나라의 명장인 한금호(韓擒虎)였다. 매번 두 사람이 군사를 논의할 때면 한금호는 외조카를 괄목상대했고, 칭찬을 금치 못했다. 조정신하들은 이정을 "왕좌지재(王佐之才)"가 있다고 말했다. 재상인 양소는 자신이 앉은 자리를 쓰다듬으며, "그대가 언젠가 이 자리에 앉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앞날이 탁트여있었으므로, 이정은 한 때 수나라에 충성을 다하려는 생각을 가진다. 이로 인하여 그는 일생에서 첫번째 위기를 맞이한다. 그가 지방의 하급관리로 있을 때, 태원왕 이연이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키려는 조짐이 나타났다. 수나라에 충성심이 대단했던 그는 수도로 가서 이를 고발하려 한다. 그러나, 가는 도중에 막혀서 성공하지 못한다. 이연이 장안을 함락시킨 후, 이정을 붙잡아서 공개처형하고자 하였다. 형을 내리기 전에, 이정은 소리높여 고함을 지른다: "공이 의병을 일으킨 것은 천하를 위하여 포악한 자를 제거하기 위함이지, 대사를 이룬 후에 사적인 원한으로 장사를 죽이려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 강개격앙된 말은 인재를 아끼는 이연의 마음을 뒤흔든다. 이연은 그가 비범하다고 생각하여 그를 석방해준다. 이세민은 그의 담량이 남다르다고 보고 그를 자신의 막료로 들인다. 이정의 첫번째 위기는 그가 정치적으로 미성숙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줄을 잘못 서서 억울하게 죽을 뻔한 것이다. 하마터면 자신의 군사적 재능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한을 품고 인생을 마칠 뻔했다.
그렇다면, 두번째 위기는 이연의 마음이 좁은데서 비롯된다. 이연이 용상에 앉은 후, 이정을 보내어 소선(蕭銑)을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이정에게 병사는 조금만 주었다. 이정은 요새에 의지하여 버티고 있으므로 진격하기 힘들었다. 이연은 그가 옛날의 원한으로 인하여 공격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몰래 허소(許紹)에게 이정을 죽이도록 명령한다. 허소는 이정의 재능을 아껴서 황상에게 그의 목숨을 살려주도록 요청한다. 그리고 이정은 팔백의 장병을 이끌고 승리를 거둔다. 그렇게 하여 이효공의 위기를 해소시켜준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군사적 재능을 가지고 살신지화를 면한 것이다. 첩보가 경사에 전해지자, 이연은 스스로 후안무치하게 자신의 행위를 과장한다: "상을 내리는 것보다는 벌을 내리는 방법이 더 잘 들을 때가 있다. 이정에게 써보니 과연 효과가 좋았다." 이정은 자신의 걸출한 재능으로 스스로에 대한 신뢰위기를 해소시켰고, 이연의 자신에 대한 의심을 영원해 거두게 만들었다. 이때부터 이정은 군사적 재능을 마음껏 펼치며, 강남, 영남의 할거세력을 제거하고, 여러번의 반란을 평정한다.
이연은 '현무문의 변'으로 인하여 황제위를 물려주고, 이세민이 즉위한다. 이정은 여전히 대당제국의 군사에서 최고의 장수였다. 정관4년(630년) 변경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돌궐인이 대거 침입한다. 당태종은 병조판서 이정으로 하여금 부대를 이끌고 막게 한다. 이병은 신속히 움직여서 연환계를 써서 돌궐인을 대파하는 동시에, 수나라의 제왕(齊王)과 역사상 대명이 자자한 소황후(蕭皇后)를 포로로 잡는다. 나중에 이정의 부대는 음산으로 들어가 1만을 죽이고, 십여만을 포로로 잡는다. 그는 또 다른 명장인 이적(李績)과 함께 동돌궐을 소멸시키고, 당나라의 변방의 오랜 근심거리를 해소시키고, 당태종이 돌궐인들에게 고개를 숙였던 치욕을 깨끗이 씻는다. 그러나, 그의 이같이 대단한 전공으로 이정은 일생중 가장 큰 한 차례의 위기를 맞이한다. 자고이래로 공신이 공이 너무 높아서 주군을 누를 정도가 되면 곤란하다. 이정이 개선한 후,어사 소우는 이정이 군대를 다스리는데 문제가 있다고 탄핵한다. 수하가 돌궐인들의 보물을 모조리 강탈하도록 놔두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막수유'의 죄명이다. 대신은 황제 이세민이 분명히 이정에 대하여 의심을 품을 것이라고 추측하여 그렇게 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황제의 환심을 사려고 한 것일 뿐이다. 여기서 보기드물게 이정은 잘 행동한다. 이정은 자신을 위하여 변명하지 않았다. 그는 역대명장들이 이로 인하여 살신지화를 당한 일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정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 죄를 인정했다. 그리고 여러번 황제에게 죄를 벌해달라고 청한다. 이처럼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자 당태종은 감동한다. 그리하여 그에게 더욱 많은 상을 내리고, 병부상서에서 재상으로 승진시켜준다. 그렇기는 해도 이정은 불안해서, 매전 조회때마다 조심하며 말을 하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같지만 실은 도광양회의 고명한 책략이었다.
이것은 당태종이 세심하고 사람을 잘 쓰는 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정이 냉정하게 일처리하고 원만하게 행동했던 것과 관련이 있다. 그후 공헌이 탁월했고, 공명을 이루었던 후군집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보다 앞서 공을 세웠던 일대명장 주아부도 그렇게 하지 못했고, 옹정연간의 연갱요 대장군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 결과 공고진주(功高震主)의 명장들은 각박과은(刻薄寡恩)한 군주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다. 후군집을 얘기하자면, 그로 인하여 이정도 감옥에 갇힐 뻔 했다. 즉 이정이 맞이한 네번째 위기인 것이다. 이정은 공이 높아서 천하에 이름을 떨친다. 당태종은 이정으로 하여금 후군집에게 병법을 가르키도록 한다. 이정은 명을 받들어 교육시킨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후군집이 나중에 역으로 공격하여 이정이 역심을 품고 있다고 무고한다. 왜냐하면 매전 세밀한 부분에 이르면 이정이 말을 해주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후군집은 이를 근거로 이정이 나쁜 마음을 품고 있고, 사사로이 모반할 마음을 품고 있다고 한 것이다. 당태종은 그의 말을 들은 후 이정을 책망하고, 그가 불궤지심을 품었다고 질책한다. 이것은 이정이 일생동안 가장 꺼리던 일이다. 이정은 솔직하게 당태종에게 아뢴다. 이것은 내가 나쁜 마음을 품어서가 아니라, 후군집이 불궤지심을 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내가 그에게 가르친 책략만으로도 그가 천하를 안정시키고, 사방의 오랑캐를 정벌하기에 충분하나, 그는 이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것은 다른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다. 당태종은 반신반의한다. 그후 두 사람에 대하여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지만, 이정에 대하여 방심하지 못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이정은 그 후에 더더욱 조심하고 열심히 일한다. 나중에 한번은 후군집이 말을 타고 상서성을 몇 걸음이나 지났는데도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를 보고 이정은 사람들에게 사적으로 말한다. 후군집은 남을 마음에 두고 있지 않으니, 이 자는 반드시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 정관17년, 후군집은 과연 태자 이승건과 모반을 일으킨다. 일이 누설되어 피살당한다. 당태종은 그제서야 이정의 사람보는 눈이 정확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정은 직위가 높고 권력이 컸지만, 항상 조심했다. 자신의 공이 너무 커서 군주가 꺼리는 대상이 될까 우려한 것이다. 재상을 만 4년간 맡은 후, 더 이상 안하겠다고 한다. 당태종이 어떻게 말려도 이정은 병을 핑계로 사임을 간절히 요청한다. 당태종은 감동한다. 이정은 공을 세우고 물러난 후, 죽을 때까지 조용히 요양하며 지낸다. 이정이 병사하자, 당태종은 만면에 눈물을 흘리고 사도, 병주도독의 직을 추존하고, 소릉에 배장한다.
이정의 인생에서 4번의 위기를 모두 탁월한 식견으로 하나하나 풀어갔다. 비록 그가 현명한 군주를 만난 것과도 관련되지만 역시 그가 일생동안 명리에 담백하고 진퇴를 잘 알았던 것과 관련있다. 이같이 제왕이 심리를 잘 알아서, 일생동안 우환의식을 지니고 살아서 선종할 수 있었던 사람이 많지는 않다. 당나라때의 위단부는 <위공고물기>에서 이정의 후손의 집에서 이정이 남긴 일부 물건을 본 적이 있다고 한다. 이세민이 내린 이십통의 서찰이 있는데, 그중에 몇통의 조서는 이정의 병세가 위중할 때 보낸 위문서신이다. "밤낮으로 그대의 병을 간호하는 나이든 여인네를 불러서, 그대의 병세를 상세히 물어보았다" 이를 보면 이세민은 이정이 죽을 때까지 그에게 잘 대해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자고이래로 군신간에 보기 힘든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이정은 군사적으로 신출귀몰하고, 운주유악했지만, 사람을 대하는데 있어서도 이성적이고 도광양회할 줄 알았다. 그리하여 일생의 명예를 누린 것이다. 나중에 민간에서는 그를 풍진함협의 하나이자 탁탑이천왕으로 불렀는데, 이는 어느 정도 사람들이 그를 좋아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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