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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이적(李勣)의 충의(忠義)와 원활(圓滑)

by 중은우시 2012. 8. 15.

글: 진한성(陳漢成) 

 

이적의 충의는 칭찬할만하지만 원활은 취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원활은 환경이 어쩔 수 없게 만든 것이고, 부득이하게 취한 보신책이다.

 

<수당연의>를 보면, 서무공(徐茂公)은 일을 귀신처럼 예측하고, 머리를 잘 쓴다. 지다성 오용과 같은 역할이다. 그러나, 이는 소설가의 두찬이다. 기실, 서무공의 원형은 바로 수당의 명장 이적이다 그의 원래 이름은 서세적(徐世勣)이고, 자(字)가 무공(懋公)이다. 그래서 민간에서는 그를 서무공이라고 불렀다. 당나라에 투항한 후, 이연은 그에게 사성(賜姓)을 하여 이세적(李世勣)으로 개명한다. 정관연간에 이세민의 이름을 피휘하여, '세'자를 버리고 이적이라고 하였다. 그의 개명사를 보더라도 일생이 평범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적은 농사를 업으로 하던 집안 출신이다. 비록 집안이 잘살았지만, 그는 편안하고 부유한 생활에 만족하지 않았다. 10살무렵부터 강호의 호걸들과 사귀며, 칼끝에 피를 묻히는 나날을 보낸다. 대업7년(611년) 적양(翟讓)이 와강채(瓦崗寨)에서 사람을 모아서 의거를 일으킨다. 이적은 거기에 투신하여 와강채의 호장이 된다. 적양은 안목이 좁아서, 쉽게 만족하는 사람이다. 그는 와강채를 지키려고만 했지, 진취적이지 못했다. 이적은 그에게 건의한다: 와강채는 고향에 있고, 주변 사람들도 모두 고향사람들이다. 와강채가 이 곳에서 장기간 약탈하며 지낼 수는 없다. 영양은 조운이 요도를 막는 곳이고, 관선과 상선이 많으니, 그쪽으로 근거지를 옮겨서 재물을 약탈하면 약탈할 재물이 없을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적양은 이적의 건의를 받아들인다. 과연 와강채에 재물이 계속 늘어나고, 병마도 늘어난다. 나중에 이밀(李密)도 와강채에 가입하는데, 나중에 적양을 대체하여 와강채의 새로운 두령이 된다. 적양은 싸우다가 죽고, 이적도 목에 칼을 맞아 상처를 입는다. 이밀은 이적의 상처가 다 치유되기도 전에 그를 여양(黎陽)으로 보내어 주둔하게 한다. 명의상으로는 중임을 맡긴 것이지만 실제로는 그를 멀리한 것이다.

 

당나라 무원원년(618년), 이밀은 북망산에서 왕세충에게 패배한다. 잔여부대를 이끌고 이연에게 투신한다. 이때 이적은 영양동쪽의 광활한 지역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무리의 군대와 큰 양식창고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밀의 행방을 듣고난 후, 장사(長史) 곽효각(郭孝恪)에게 말한다: "위공(이밀)은 이미 당나라에 귀의했다. 지금 이 곳의 무리와 토지는 모두 위공의 소유에 속한다. 나는 땅을 바쳐서 공을 얻을 수는 없다." 말을 마치자, 그는 점령하고 있던 주현의 호구조책을 곽효각을 시켜 장안의 이밀에게 보낸다. 그리고 이밀이 이연에게 바치도록 한다. 이연은 이적의 사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 자신에게는 글을 올리지 않고, 이밀에게 서신을 보냈다는 말을 듣고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곽효각이 경위를 설명한 후에야 이연이 탄식하며 말한다: "서세적이 덕을 어기지 않고, 공을 탐하지 않으니 정말 순수한 사람이로다." 그래서 이적을 여양총관으로 삼고 국성인 이씨를 하사한다. 이적의 거동은 이연의 뜻에 완전히 부합했다고 할 수 있다. 군웅이 항쟁하는데, 천하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군왕이 가장 중시하는 사람은 신하의 자신에 대한 충성이다.

 

얼마후, 이밀은 당나라에 투항한 후 냉대를 받는 것이 불만을 품고, 도망쳐서 다시 반당활동을 한다. 그러다가 도중에 당나라군에 피살당한다. 이적의 수급은 장안으로 보내진다. 당고조 이연은 사람을 보내어 이적에게 다시 보낸다. 그리고 이밀의 모반죄상을 알려준다. 이밀은 당나라에 투항했다가 다시 당나라를 배반했다. 그는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보답을 받은 것이다. 이밀의 반란에 대하여 이적은 전혀 몰랐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연루될 것을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이밀의 수급을 보자, 옛날 주공의 정이 생각나서 슬픔이 일었다. 그래서 대성통곡을 한다. 그 후, 이적은 이연에게 글을 올려, 이밀을 장례지내줄 것을 간절히 청한다. 이연은 그의 충의에 감동받는다. 그래서 이밀의 시신을 보낸다. 이적은 군신의 예로 이밀을 장사지낸다. 장사지내는 날, 그는 와강채의 옛 부하들을 모아서 함께 장례식을 치른다. 전군이 상하로 소복을 입었으며, 그 장면은 아주 감동적이었다. 이적의 이밀에 대한 태도와 장례처리를 통하여 그는 사람됨이 충의하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이를 통하여 대당조정의 호감을 산다.

 

선웅신(單雄信)도 와강채의 호장이다. 일찌기 와강채에서 의거를 일으킬 때, 그는 이적과 결의형제를 맺고, 적양의 오른팔 왼팔이 된다. 나중에 이밀에게 귀의한다. 이밀이 당나라에 귀순한 후, 선웅신은 왕세충(王世充)에게 투항하고, 이적은 당나라에 투항한다. 이 때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길을 가고, 각자 주인을 모시다. 왕세충이 패번한 후, 선웅신은 당나라에 포로로 잡힌다. 죄로 따지면 죽음을 받아야 했다. 이적은 급히 이세민에게 사정을 한다. 선웅신은 무예가 절륜하니 조정에서 쓸만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관작을 내놓을테니 선웅신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한다. 어찌된 일인지, 도량이 넓게 행동하던 이세민이 이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적은 어쩔 수가 없었다. 선웅신은 그가 자신을 위하여 힘을 다하여 도우지 않았다고 오해한다. 이적은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나는 여생을 형과 함께 죽는 것도 아깝지 않다. 그러나 나는 이미 몸을 나라에 바쳤다. 그러다보니 둘을 모두 이룰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만일 내가 죽으면 누가 형의 처자식을 돌보겠는가?" 말을 마치고, 칼을 들어 자신의 허벅지의 살을 베어 선웅신에게 내준다. 그리고, "이 살은 형과 함께 흙 속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예전 맹세에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선웅신은 그 말을 듣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린다. 이적과 손을 맞잡고 이별한다. 이런 감동적인 장면은 진실한 역사무대에서 확실히 보기 드문 일이다.

 

수나라말기, 군웅이 할거하고, 세상은 어지러웠고, 사람들도 계속 변신한다. 이적은 밑바닥에서 출발하여 옛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했고, 옛친구에 대한 의리도 대단했다. "중의"는 그의 일생에서 가장 빛나는 점이다. 이적이 대당정권에 귀의한 후, 점차 풀뿌리의 본색이 퇴색한다. 전쟁터의 숙장(宿將)에서 원로 중신으로의 역할전환이 이루어진다. 대당이 관료체계내에서 그는 잘 헤쳐나갔다. 이때는 그의 성격중에서 '원활'한 면모를 잘 보여준다.

 

이적은 궁중의 파벌투쟁때 명철보신한다. 시종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어느 한 편을 들지 않는다. 양측을 모두 관망하는 책략을 취한다. 그의 뛰어난 점은 군주의 심리를 잘 파악하여 정확하게 판단을 내리는데 있었다. 중요한 순간에 가장 적절한 행동을 한 것이다. 이적은 이세민을 따라 전쟁에 참가한 기간이 2년이나 된다. 이렇게 긴 기간동안, 이세민은 여러번 이적을 자기편으로 만들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이적은 비록 이세민에 충성을 다하고,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었지만, 진왕부(秦王府)의 핵심그룹에는 끼지 않았다. 이세민은 '현무문의 변'전에 이적에게 의견을 묻는다. 그러나 이적은 이씨형제의 권력투쟁에 개입하지 않고, 자신은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겠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이세민도 그를 질책하지 않았다.

 

무덕9년(626년) 육월, 진왕 이세민은 '현무문의 변'을 일으킨다. 태자 이건성, 제왕 이원길을 죽이고 조정을 장악한다. 팔월에는 이연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자신이 황위에 앉는다. 그가 당태종이다. 십월, 당태종은 공신들에게 상을 내린다. 이적은 5등으로 분류된다. 43명의 명단중 그는 14번째였다. 위치가 앞쪽이 아니었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그가 '현무문의 변'에 참가하지 않은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당태종말년, 궁중의 사건이 또 일어난다. 정관17년(643년), 태자 이승건이 모반으로 폐위된다. 도대체 누구를 태자로 앉힐 것인가에 대하여 조정에서는 두 가지 의견으로 나뉜다. 하나는 위왕 이태를 세우자는 것으로 이 의견을 가진 사람은 시랑 잠문본(岑文本), 황문시랑 유자(劉洎)였다. 또 다른 의견은 진왕 이치를 태자로 세우자는 것으로, 사도 장손무기, 저수량이 주도했다. 결국 당태종은 이치를 태자로 세우기로 결정한다. 이적은 비록 이치를 태자로 세우는 의사결정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그는 의견을 내지 않고, 양파간의 싸움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저 당태종의 눈치를 봐서 행동했다.

 

정관23년(649년), 당태종은 병세가 깊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게 된다. 비록 후계자는 정해두었지만, 보정대신 장손무기의 권력이 지나치게 커질까봐 우려했다. 이적은 군대의 원로이고 사람됨이 충성스러우며, 출신이 산동의 한미한 집안이어서, 가족배경이 장손무기와는 전혀 상반되었다. 보기에 이적이랴말로 장손무기를 제약할 둘도없는 인물이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당태종은 이치에게 말한다. "너는 이적에게 은혜가 없다. 나는 그를 지방으로 좌천시켜놓을테니, 내가 죽은 후, 네가 다시 그에게 복야의 직을 내려라. 그러면 그는 너에게 죽을 힘을 다해서 충성할 것이다." 태종은 그리고 특별히 당부한다. 만일 이적이 명령을 따르지 않고, 배회하며 관망하면, 그 자리에서 죽여버려라. 당태종이 이적을 좌천시킨 목적은 이치가 즉위한 후 다시 이적을 발탁하도록 하기 위함이었고, 이적으로 하여금 이치에게 감사의 마음을 품고 충성을 다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돌연한 안배는 이적의 정치적 지혜에 대한 시험이었다. 그가 잘 처리하면, 장래 다시 나올 수 있다. 가치는 더욱 올라갈 것이다. 만일 잘못 처리하면, 살신지화를 입을 것이다. 총명하기 그지없는 이적은 조서를 받은 후 집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바로 첩주로 부임한다. 이적은 당태종의 사람됨을 잘 이해했다. 그의 만년의 심리상태를 아주 잘 파악했다.

 

당고종 이치는 즉위후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이적을 첩주도독에서 낙양자사로 부르는 것이었다. 낙양궁을 지키게 한 것이다. 나중에 그에게 상서 좌복야의 직을 내린다. 이렇게 하여 당태종의 생전의 의도를 완전하게 실행한다. 보정대신 장손무기는 조정을 장악한다. 이적은 원래 그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리고 그와 총돌도 원치 않았다. 부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좌복야의 직을 사직할 것을 간청한다. 당고종은 신중하게 고려한 후 그의 요청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여전히 그에게 개부의동삼사의 신분으로 조정에 참여하도록 한다.

 

영휘6년(655년), 당고종은 무측천을 황후로 책봉할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본다. 그래서 태위 장손무기, 사공 이적, 상서좌복야 우지녕, 상서우복야 저수량의 4명의 중신을 내전으로 불러 이 일을 논의한다. 저수량은 논의내용을 미리 예측했고, 장손무기는 황제의 외숙부이고, 이적은 조정의 개국공신이다. 황제가 외숙이나 공신에게 죄를 내렸다는 악명을 뒤집어쓰게 할 수는 없다. 자신은 공로도 없고, 선제의 부탁까지 받았으니, 자신이 앞장서서 황제에게 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적은 생각을 해보고는 이번 투쟁에 개입하지 않고자 한다. 그래서 머리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집으로 가서 병석에 누워, 난감한 국면을 회피한다.

 

과연 당고종은 만나자마자 바로 말한다: "왕황후는 자식이 없고, 무소의는 자식이 있다. 짐은 무소의를 황후로 삼고 싶다. 공등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말이 끝나자 마자 저수량이 바로 말한다: "황후는 명문집안 출신이고, 선제께서 폐하를 위하여 취한 부인입니다. 선제가 임종시에 신의 손을 붙잡고 말하기를; '나의 아들과 며느리를 너에게 부탁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이 지금도 귀에 생생합니다. 황후에게 잘못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는데, 어찌 가벼이 폐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폐하께서 선제의 유명을 어기는 것을 따를 수 없습니다." 당고종은 그가 선제를 들고나오자, 아주 불쾌했다. 그래서 손을 흔들어 그들에게 물러나라고 한다.

 

다음 날, 당고종은 다시 한번 그들 4명을 불러서 상의한다. 이적은 여전히 병을 핑계로 나타나지 않는다. 저수량은 다시 한번 저지한다: "폐하가 반드시 황후로 세우시겠다면, 명문집안의 딸로 세우십시오. 무씨는 선제를 모셨다는 것을 세상이 다 압니다. 폐하께서 어찌 천하인의 이목을 가릴 수 있겠습니까. 신이 폐하의 뜻을 어기는 것은 만번 죽어 마땅한 죄입니다. 다만, 선제의 뜻을 어기지 않는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그는 말을 하면서 홀을 계단에 내려 놓고, 곧이어 두건을 벗고 머리를 바닥에 박아 피가 흘렀다. 고종은 저수량이 이처럼 완고한 태도를 보이자, 대노하여, 사람을 불러 끌어내라고 명령한다.

 

두번의 폐후논의에 이적은 모두 참가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당고종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했다. 그래서 당고종은 단독으로 이적을 불러 만난다. 그리고 직설적으로 묻는다: "짐이 무소의를 황후로 세우고 싶어한다. 저수량은 따르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그는 고명대신이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은가?" 이적은 일찌감치 장손무기등이 발호하고, 조정을 좌지우지하는데 불만이 있었다. 그는 나서기를 원하지는 않았는데, 주요이유는 조정의 형세가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견을 말해버리고 나면 퇴로가 없을까봐 우려했기 때문이다. 지금 당고종이 물어보니 의견을 말해야 했다. 그러나 너무 노골적이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그는 가볍게 미소를 짓고, 가볍게 말한다: "이 일은 폐하의 집안 일입니다. 왜 외인에게 물어보십니까?" 이 말은 아주 원활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의사표시도 하지 않은 것같다. 실제로는 그 노친네들을 신경쓰지 말라는 뜻이다. 황상이 하고싶은대로 하면 된다는 말이다. 당고종은 중신중에 자신을 지지하는 중요한 한표를 마침내 얻은 것이다. 그래서 기운을 내서는 반대파대신의 계속된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각을 밀어부친다.

 

영휘6년 구월 삼일, 당고종은 저수량을 담주도독으로 좌천시킨다. 그리하여 모든 반대파들의 입을 다물게 한다. 십월 십삼일, 왕황후를 폐위시키고, 초숙비를 서인으로 페한다. 십월 십구일, 무소의를 황후로 앉힌다. 십일월 초하루, 장안 태극전에서 융중한 황후책봉의식을 거행한다. 이적은 책봉예사로 임명된다. 그는 황후새수(璽綏)를 공손하게 무황후에게 바친다. 신황후는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한다. 

 

669년, 이적은 사망한다. 향년 76세였다. 당고종은 그를 위하여 7일간 조정을 파한다. 그를 소릉에 묻도록 명한다. 매장당일, 당고종은 높은 건물에 올라가서, 멀리 영구차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황태자를 보내어 영구를 호송하게 한다. 실로 극도의 예를 표했다고 할 수 있다. 이적은 고조, 태종, 고종의 삼대황제를 모셨다. 그는 시종 잘나갔다. 그러나, 누가 생각했겠는가? 이적의 사후 15년만에 그의 손자 이경업(李敬業)이 무측천에 반대하여 의거를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자살한다. 그 화가 일가친척들에게 미친 것은 물론이고, 죽은 지 여러해가 지난 이적까지도 개관분시(開棺焚屍)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