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당나라의 명재상 요숭(姚崇)은 어떻게 정적에 대처했는가?

중은우시 2012. 6. 10. 23:45

글: 소풍(小楓)

 

당시 보통사람들에게 있어서, 재상은 큰 수수께끼이다. 생각해보라. 깊은 저택에 앉아서, 호풍환우의 능력을 지니고,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 누가 그의 생각을 꿰뚫어볼 수 있겠는가? 요숭은 바로 이런 재상이었다. 그는 650년에 태어났고, 섬주 섬석(지금의 하남 삼문협) 사람이다. 처음에는 작은 관아에서 작은 관직을 맡아 자잘한 일을 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큰 관직을 맡아 큰 일을 한다. 일찌기 세번이나 재상을 지냈고, 개원성세(開元盛世)의 창건자중 하나이다. 721년 사망하니, 향년 72세이다.

 

당나라때 재상은 369명인데, 그중 가장 뛰어난 사람은 4명이다. 즉, 정관(貞觀)시대의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 그리고 개원(開元) 연간의 요숭과 송경(宋璟)이다. 그드은 모두 두 황금시대때 재상직에 있었다. 그들 때문에 태평성대가 온 것인지, 태평성대였기 때문에 그들이 이름을 날린 것인지는 모른다. 4명 모두 명신(名臣)이고 대가(大家)였다. 모두 지자(智者)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비교하자면, 요숭이 더 재미있는 사람이다. 그는 더 재미있게 살았다. 그는 복잡한 경력을 지니고 있고, 관운도 좋았다가 나빴다가 했으며, 관료사회에서의 기복이 많았다. 그는 문무에 정통하고, 매번 재상을 맡을 때마다 병부상서를 겸임했다. 어떤 때는 아주 곤란하였지만, 그는 벽을 부수고 나왔다. 그의 인생의 요점은 변통(變通)이다. 그가 갔던 길은 동쪽이 밝지 않으면 서쪽이 밝다는 식이었다.

 

일처리, 긴요한 것은 선변구통(善變求通)

 

변통(變通)은 요숭의 경험과 풍격이다. 그가 보기에, 정치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옛방식을 따르지 않고, 고정된 틀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반드시 변화를 추구한다. 그래야 통달할 수 있다. 이것은 자물쇠를 여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손안에 아무리 많은 열쇠를 가져도, 적합한 열쇠를 찾아야 한다. 후세인들은 이렇게 평가한다: "요숭은 자성명달(資性明達)하고, 선응사기(善應事機)하며, 위곡통변(委曲通變)으로 국가의 업무를 이루었다." 그는 비교적 자부심이 있었다. 일찌기 스스로를 현상(賢相)인 관중, 안영에 비유했다. 그러나 그의 부하들은 "공소위법(公所爲法), 수복경지(隨復更之)"(공이 법이라고 하는 것은 수시로 바뀌었다). 앞선 현상들과 비교하면 부족한 점이 있다. 그는 "구시재상(救時宰相)"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제왕은 대부분 업무가 어려웠다. 위기국면을 구해야 했다. 그래서 그를 아주 중시했다. 여러번 자리를 비우고 그를 기다렸다. 그도 황제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당시의 폐해를 잘 살펴서 신축성있게 시정을 베풀었다. 시국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발전시켰다. 요숭은 시세에 맞추어 이끌고 기회를 보아서 일처리하는데 능했다. 예를 들어, 무측천시대에, 억울한 사건이 많았고, 죄명은 대부분 모반이었다. 무측천은 우울했다. 왜 반란자들이 이렇게 많은가? 당시 예부상서를 맡고 있던 요숭은 이 기회를 노려 주흥 등이 무고를 통하여 공을 세우려는 죄악을 들추어 설명한다. 이를 통하여 무측천의 인식을 제고시킨다. 무측천은 크게 기뻐하면서 반농반진으로 말한다: 과거의 재상은 불충불의해서 나를 도살자로 만들었다. 너만이 진실을 감히 말하는구나. 기실, 이때 무측천은 이미 대권을 장악하고 있어서 사람을 죽여서 위엄을 세울 필요는 없었다. 요숭은 이 점을 잘 간파한 것이다. 흐름을 따라서 불쏘시개를 던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억울한 사건들이 명예회복되도록 한다. 다시 예를 들어, 당중종때, 위황후와 안락공주가 조정에 참여하고, 방파를 만들고, '두봉관(鈄封官)"의 방식으로 주무부서를 피하여 대거 매관매직한다. 그리하여 쓸모없는 관리가 넘쳐나고, 각 기관마다 다른 명을 내린다. 요숭이 재상을 맡은 후, 시세의 흐름에 맞추어 여러가지 방법으로 잘못된 것을 시정한다. '충량을 끌어들이고, 불초한 관리는 내보낸다' 그후에 남는 인원을 감원하고, '두봉관'을 취소한다. 수천의 관리가 파면된다. 그는 또 다른 재상인 송경과 '힘을 합하여 당중종의 폐정을 시정한다" 상벌을 분명히 하고, 청탁을 사라지게 만든다. 기강을 바로 잡는다. 당시 '정관, 영휘의 기풍'이 되살아났다고 말해진다. 그리고 또 하나의 예를 들자면, 당현종이 즉위한 후, 그에게 승상을 맡아달라고 한다. 그는 이 기회에 몇 가지 조건을 내건다. '조정십사(朝政十事)'이다. 당현종에게 인정을 실행하고, 권력귀족을 억제하고, 사람을 잘 골라 기용하고, 간언을 잘 듣고, 누습을 혁파하는 등등이다. 당현종은 모조리 응락한다. 그것은 얻기 힘든 아름다운 시기였고, 상하가 한 마음으로 정국이 안정되고 민심이 안정되었다. 특별히 언급할만한 것은 요숭은 교조적으로 추진하지 않았다. 시정은 신축성있고 실용적이었다. 개원3년, 산동에 메뚜기떼피해가 생긴다. 상하가 모두 이는 천견(天遣)이라고 여기고 불안해 했다. 백성들은 밭에서 향을 사르고 절을 했다. 관리들도 덕을 쌓아 재난을 막자고 주장했다. 황제마저도 의혹을 지녔다. 오로지 요숭만이 굳은 태도를 보이며, 인공으로 메뚜기를 없애야 한다고 극력 주장했다. 이렇게 하여 메뚜기박멸행동을 조직하고 몇달 후 메뚜기떼는 점차 소멸한다.

 

요숭의 변통지혜는 원래 풍부한 지식, 실용적인 풍격, 그리고 달관한 태도에서 왔다. 그는 두뇌가 명석하고 사고가 민첩했다. 공부하기를 좋아했고, 글을 쓰는데는 행운유수였다. 붓을 들연 바로 글이 이루어졌다. 일처리는 간결하고 시원스러웠다. 효율이 아주 뛰어났다. 처음에 병부에서 일할 때, 변경에 전란이 발생한다. 그는 전국을 분석하고 전황을 정리한 후, 복잡한 군사투쟁을 철저히 간명하게 처리한다. '태후는 아주 기이하게 여긴다' 그는 세번이나 재상을 지냈는데, 동시에 병부상서를 겸임하여, 변경의 모든 군사배치, 기계전량이 그의 머리 속에 들어있었다. 마치 사전과도 같이 언제든지 찾을 수 있었다. 황제는 일을 만나면, 먼저 그의 의견을 듣곤 했다. "동료들은 모두 그 말이 맞다고 할 뿐이었다." 한번은 아들이 병으로 죽어, 그가 며칠간 휴가를 냈다. 정무가 산처럼 쌓이게 된다. 다른 재상이 잘 처리하지 못하자, 마음이 불안했다. 요선생이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자, 하나하나 모두 처리했다. 이런 뛰어난 재주로 무측천이 그를 발견한다. 그는 재상까지 고속승진한다. 당예종이 즉위하자 급히 그를 불러들여 백관의 우두머리로 삼는다. 당현종은 더더욱 간섭을 제배하고 그가 재상의 자리에서 변통의 방식으로 일하는 것을 지지해준다.

 

권력은 괴물이다. 항상 파벌을 만든다. 서로간에 싸우다보면 끝이 없다. 이런 상황은 당나라초기에 특히 심했다. 무측천때부터 당현종때까지 각종세력이 속속 등장한다. 한때는 황후가 권력을 잡고, 한때는 간신이 득세하고, 한때는 공주가 기세등등하다. 정적과 일을 같이 하는 것은 사실 아주 어려운 일이다. 만일 싸우려면 생사를 가늠하기 힘들다. 만일 타협하면, 오히려 일당이 될 수 있다. 요숭의 방법은 여전히 변통이었다. 가볍게 손을 쓰지 않고, 개별전투는 하지 않았다. 한도를 두고 대항하여 균형을 맞추었다. 이렇게 하여 상대방이 약화되기를 도모하고, 자신을 보호했다. 그에게 변통은 이미 또 하나의 무기이다. 탄력성이 충만하다. 그는 무공이 절륜한 고인과 같이, 손에는 아무 무기도 들고 있지 않지만, 다른 사람은 그를 어떻게 하지 못했다.

 

무측천 후기, 장역지 형제가 총애를 받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잘보이려 했다. 어떤 관리들은 세불양립이었다. 요숭이 간 길은 중간노선이다. 신축성있게 공존하며,  표면적으로는 호응했고, 어떤 때는 강경했다. 한번은, 장역지가 어떤 일을 처리해야 하는데, 요숭이 문하에 부탁했다. 요숭이 도와주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말로 해도 체면을 봐주지 않았다. 얼마후, 사형소경 환언범등 5대신이 연합하여 장씨형제에게 손을 쓰기로 결정한다. 요숭은 외부의 힘을 빌리는 것을 즐겨했다. 적극적으로 모의에 참여했다. 일이 성공한 후, 무측천이 황제위를 양위하고, 당중종이 즉위한다. 공신들은 기뻐했고, 하나하나 승진하고 작위를 받았다. 요숭은 비록 공로가 있지만, 무측천의 퇴위에는 두눈에 눈물을 가득 흘린다. 어떤 사람은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요숭을 자사로 좌천시킨다. 전통적인 견해에 따르면, 이번 좌천을 요숭은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는 방식으로 그는 스스로를 보호한 것이다. 이 설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당시의 국세를 보면, 비록 장역지형제가 죽었고, 무측천이 퇴위하였지만, 무삼사는 아직 건재했다. 강력한 반발의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사실도 바로 그러했다. 얼마후 5명의 공신은 무삼사에게 해를 당한다. 오로지 요숭만이 미리 물러났기 때문에 그 화를 모면한다. 당예종이 등극한 후, 태평공주가 득세한다. 공주는 무측천의 딸이다. 그리고 황제의 친여동생이다. 큰 공도 세웠고, 정치도 잘 알았다. 이런 자본을 가지고 그녀는 조정에 간여한다. 어떤 때에는 심지어 황제를 내팽개치고 일이 생기면 자신이 결정해버렸다. 그녀의 심복은 온 조정에 퍼져 있었다. 7명의 재직재상중에서 5명은 그녀의 말에 무조건 따랐다. 요숭은 자신이 그녀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항상 쓰던 방법을 쓴다. 정면으로 싸우지 않고, 좌박우삭(左剝右削)의 방법을 써서 어느 정도 공주의 특권을 약화시킨다. 그는 황제에게 건의했다. 공주에게 외지로 가서 영화부귀를 누리게 하라고. 이 일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요숭은 전혀 다치지 않는다. 그저 외지의 자사로 부임했을 뿐이다.

 

권모술수는 관리의 무기이다. 모순이 충돌할 때의 상용수단이기도 하다. 요숭은 변화를 잘했다. 자연히 권모술수를 잘 알았다. 그의 권모술수는 다양하고 탄력있었다. 사람마다 다르게 썼고, 대부분의 경우에 극제(克制)했다. 요숭은 장열(張說)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장열이 재상으로 있을 때, 요숭은 동주에서 자사로 있었다. 당현종이 즉위한 후, 요숭을 재상으로 삼으려 한다 .장열은 불쾌해하며 갖은 방법으로 저지했다. 그러나 황제는 거기에 속지 않았고, 요숭을 기용하겠다고 고집한다. 장열은 스스로 자신이 없어지며, 안전을 위하여 기왕(岐王)과의 관계를 맺는다. 장열이 생각지 못했던 것은 이러한 조치가 요숭에게 구실을 주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요숭은 황제에게 말한다: 기왕은 당신이 사랑하는 동생입니다. 장열은 보신(輔臣)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 하면, 아마도 조정에 불리할 것입니다." 그의 말에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그 뜻은 명백했다. 당현종도 금방 알아차린다. 즉시 장열을 상주자사로 좌천시킨다. 같은 방법으로 요숭은 유유구(劉幽求)를 혼내주기도 한다. 유유구는 재상을 역임했고, 나중에 태자태보가 된다. 새로운 직위는 비교적 편한 직위여서, 권세랄 것이 없었다. 유유구는 우울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불평을 한다. 어떤 사람이 유유구가 마음 속에 불만을 품고 있다고 고발한다. '원망하는 말'을 한다는 것이다. 황제는 그 말을 듣고 화를 벌컥 낸다. 관련부서에 엄중하게 조사하라고 시킨다. 이때 요숭이 나서사 한 마디 한다. 대강의 뜻은 이렇다: 재상의 자리에서 물러나 한직을 맡게 되면, 어느 정도 생각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하물며 그는 큰 공을 세운 바 있으니, 절대로 너무 심하게 처벌해서는 안됩니다. 겉으로는 유유구를 위하여 사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유유구의 불만정서를 인정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유유구는 외지로 좌천되고, 우울하게 죽어간다. 어떤 때는 요숭이 더욱 깔끔하게 처리했다. 원래는 자신의 잘못이지만, 그는 이렇게 저렇게 바꾸고 자신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다른 사람이 벌을 받게 하는 것이다. 위지고(魏知古)는 원래 하급관리였다. 요숭이 추천하고 발탁해서, 재상이 된다. 업무분업문제로 두 사람은 갈등이 생긴다. 이때, 위지고는 동도낙양에서 이부의 업무를 주재하고 있었다. 마침 요숭의 두 아들도 동도 낙양에서 관직에 있었다. 두 아들은 부친이 위지고에게 은혜가 있다고 생각해서,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매관을 청탁한다. 위지고는 아무런 표정변화없이, 사실대로 황제에게 보고한다. 이를 통하여 요숭의 명예에 먹칠을 하려는 생각이었다. 황제도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쉬면서 얘기나눌 때를 틈타서 고의로 요숭에게 아들이 몇 명이나 있고 관직은 어떠한지 묻는다. 황제는 분명히 요숭이 아들을 위하여 변명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요숭은 너무 뒤어났다. 즉시 내막을 알아채고는 자신의 두 아들이 모두 불초하여 분명히 위지고에게 폐를 끼치고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황제가 묻는다: "경은 어디서 알았는가?" 요숭이 말한다: "위지고가 하급관리로 있을 때 제가 발탁하여 날개를 달아주었습니다. 신의 아들이 우매하여, 위지고가 신에게 반드시 덕으로 보답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잘못된 일도 용납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황제는 이에 판단을 바꾼다. 요숭은 대공무사(大公無私)한 사람이고, 위지고는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렇게 되니 요숭은 무사하고, 위지고는 오히려 강등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