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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소미낭(蕭美娘): 수양제의 황후

by 중은우시 2012. 2. 19.

글: 장계합(張繼合)

 

어렸을 때 평서(評書)를 들을 때, 단전방(單田芳)의 <수당연의(隋唐演義)>에 푹 빠졌다. 와강채(瓦崗寨)의 초망영웅(草莽英雄)들은 황음하고 포악한 수양제를 무너뜨리고자 한다. 수양제는 의관금수(衣冠禽獸), "육단지군(六短之君)"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그는 화용월태의 부인 소미낭을 취한다. 이들 부부는 서로 결탁하여 국가와 백성들에게 화를 미치게 한다. 백성들은 그들에 대하여 뼛속까지 원한을 품었다. 평서의 '판사(判詞)"는 소미낭의 민간에서의 명성을 완전히 망가뜨렸다. 비록 그녀는 아름다웠지만, 아주 나빴다. <서유기>의 백골부인 혹은 <요재지이>에 '화피(畵皮)'를 뒤집어쓴 악귀와 같다는 것이다.

 

평서는 수당의 풍운을 도식화했다. 소황후를 요마화했다. 역사의 진실과 예술적 과장이 갈수록 거리를 멀게 했다. 심지어 서로 전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다.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상성(相聲)의 명인인 장쿤(姜昆)은 일찌기 장학량에게 직접 물어본 적이 있다고 한다: "서안사변의 영화, 드라마중 어느 배우가 가장 당신을 닮았습니까?" 장학량은 손을 흔들며 대답했다: "모두 연기하는 것이 아니냐. 아무도 나 장학량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연기이다." 연기는 보고 즐기는 것이다. 학자들이 그것을 가지고 따질 필요가 없다. 확실히 평서버전의 소미낭은 사서의 소황후와 절대로 같은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일생동안 부귀를 누렸고, 희비를 모두 겪었으며, 인생의 성공과 몰락을 모두 겪었다. 승리자의 손에 그녀는 요염한 사냥감이었으며, 바쳐진 놀이감이었다. 위장을 벗겨낸 배후에는 그녀가 자신의 그림자를 보며 스스로의 불쌍히 여기는 탄식과 흥망성쇠를 목격한 맑은 눈동자가 있다.

 

소황후의 집안내력에 대하여는 <북사>와 <수서>에 모두 기록이 있다. <북사>에서는 한 특수한 신분의 인물을 언급한다. 소황후의 부친인 소귀(蕭巋)이다.

 

소귀의 자는 인원(仁遠)이다. 그는 좋은 집안출신이다. 할아버지는 양(梁)나라의 저명한 문학가이자, 젊어서 사망한 '소명태자(昭明太子)' 소통(蕭統)이다. 아쉽게도 그의 대에 이르자 양나라는 옛날과 같지 않았다. 일락서산의 분위기였다. 소귀는 여전히 양나라에서 왕을 칭하고 있었다. 형주, 양양을 근거지로 하였다. 아마도 혈연관계때문인지, 소귀도 재주가 뛰어난 문화인이었다. 그는 글읽기를 좋아하고, 책을 쓰기를 좋아했다. 그는 <효경> <주역의기> <대소승유미>등 14부의 작품을 쓴다. 지금으로 보더라도 다작작가이다. 문인이 나라를 다스리면 왕왕 연약해진다. 하물며 군웅이 할거하던 시대에는 패권논리가 약육강식이다. 양나라는 좁은 영토를 가지고 생존해나가고자 하면 든든한 배경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 우문씨의 주나라가 북방에서 가장 강했다. 소귀는 그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는 자주 방대한 가마대를 이끌고 귀중한 예물을 싣고 형주양양과 장안을 오갔다.

 

581년, 장안의 정국이 돌연 급변한다. 8살된 주정제(周靜帝)는 황위를 '양견(楊堅)'에게 선양한다. 새로 등극한 수나라황제는 여전히 소귀를 융중하게 접견했다. 그는 솔직하게 말한다. 차남 양광(楊廣)이 서량(西梁)의 공주를 취하면 좋겠다고. 이것은 불감청 고소원인 일이다. 양쪽 집안이 혼인관계를 맺으면 자신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다. 좋은 소식을 알리는 까치가 우는 격이다. 소귀의 3명의 공주는 모두 정치혼인의 후보자가 된다.

 

유감스럽게도, 세 명의 공주는 용모가 옥처럼 아름답지만 하나도 선택받지 못한다. 이것은 무엇때문인가? 원래 양견의 부인인 독고황후는 아주 무서운 여인이었다. 후궁의 대소사를 모조리 그녀가 주재했다. 아들의 며느리를 고르는 일에 독고황후는 당연히 두 눈을 반짝였다. 하물며 양광은 아주 귀엽고 잘생긴 아들이었다. 그가 등극이후에 어떻게 바뀌었든지 간에, 결혼이전에는 사람들이 누구나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수서>에도 이렇게 쓰고 있다: "황상(양광)은 아름다운 자태와 용모를 지니고 있었고,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했다. 고조 및 황후의 여러 아들들 중에서 특히 사랑을 받았다." "개황원년, 진왕이 되고, 주국(柱國)이 되며, 병주총관이 된다. 그때 나이가 13살이었다." 이처럼 뛰어난 왕자의 비를 뽑는 것이다보니, 아주 신중하게 골랐다. 점쟁이의 말한마디에 세 공주는 모두 후보자에게 제외된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남녀쌍방의 팔자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파혼은 하늘의 뜻인 것같다.

 

소귀가 머리를 긁으며 고민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그에게 말을 해준다: "사공주를 불러서 시험해보면 어떻겠습니까" 만일 이 말이 아니었다면, 그는 일찌감치 운나쁜 그 딸은 잊어버리고 있었을 것이다. 소위 '사공주'는 바로 미래 수양제의 소황후이다. 세 언니가 결혼문제로 바쁠 때 그녀는 부모의 곁에 없었다. 그녀는 민간에 맡겨져서 자라고 있었다. 이때 그녀는 의복이 남루하고 형편없는 음식을 먹고 있었다. 집안에서는 그녀를 싫어하여, 가련한 이 여자아리를 버려버린 것이다. 이것은 무엇때문인가? 거기에도 아주 특수한 이유가 있다. 따져보면, 여전히 팔자때문이다.

 

<수서.열전>의 기록에 따르면, "강남의 풍속에 2월에 태어난 아들은 불거(不擧)한다. 황후는 이월생이므로 계부인 소급이 받아들여 기른다. 얼마후 소급 부부가 모두 죽고, 다시 외삼촌인 장가의 집에서 자란다. 그런데, 장가는 집안이 가난하여, 황후는 친히 힘든 일을 했다..." 이월에 태어났다는 것이 바로 원죄인 것이다. 소위 '불거'는 길러도 살지 못한다는 말이다. 아이가 중도에 요절하게 하느니, 아예 다른 집에 보내버리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그래서, 강보에 쌓인 여자아이는 소씨집안에서 쫓겨나게 되는 것이다. 그후 아이는 숙부의 집에서 외삼촌의 집으로 옮겨간다. 살아남으면 목숨을 건진 셈이고, 죽으면 당할 것을 당한 것이 된다.

 

소씨아가씨는 모든 가난한 시골여자아이와 마찬가지로, 베옷을 입고, 풀뿌리를 씹으며, 한자한자 글을 배우고, 하나하나 인생을 알아간다. 민간의 소박한 지혜와 시골의 순후한 인심, 그리고 그녀가 생래적으로 가진 귀족기질이 그녀에게서 하나로 합쳐진다. 이 빙청옥결의 어린 소녀는 자연히 군계일학격이다. <수서>는 그녀를 칭찬한다: "성격이 완곡하고 온순하며, 지식이 있었다." 외삼촌은 가난뱅이였지만, 외조카를 일류의 인물로 길러냈다. 여기에 많은 심혈을 기울였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아무렇게나 버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아마도 부모의 손에 '황금바둑돌'로 변신할 수 있을 것이다. 급히 목욕재계시키고 왕궁으로 돌려보낸다.

 

외삼촌을 떠날 때가 되자, 외조카딸은 만면에 눈물을 흘리며 석별했다. 외삼촌은 이미 늙었다. 기구한 운명의 외조카딸을 붙잡고, 억지로 웃는 얼굴을 보인다: "가라. 집으로 돌아가라. 그러면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잘사는게 뭔가, 바로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식사를 하는 것인가? 서진의 왕궁으로 들어가자 과연 잘 살게 된다. 소귀는 황후를 외삼촌의 집에서 데려와서는 사신에게 점을 치게 하니, '길'하다고 나왔다. 그리하여 그녀는 왕비로 책봉된다. 이렇게 쉬운 일이다. 점쟁이가 '길'하다고 한마디 함으로써 수나라의 중요한 정치혼인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는 중국역사의 방향을 바꿔쓰게 되는 순간이라고 할 수도 있다.

 

소씨가족은 마침내 정치결혼을 성공시킨다. 영준한 진왕 양광은 화촉을 밝혀 진왕비를 맞이한다. 이때는 개황2년 즉 582년이며, 신랑은 13살이고, 신부는 12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