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한)

장양(張讓): 황제가 '아버지'라고 부른 환관

중은우시 2012. 6. 3. 13:13

글: 이치아(李治亞)

 

태감은 몸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이지만, 역사상 적지 않은 일을 했다. 어떤 사람은 황제를 끼고 명령을 내렸으며, 어떤 사람은 여러 신하들을 압도했다. 어떤 때는 모든 사람에게 허리를 굽히지만, 일단 득세하면 왕왕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횡한다. 처자식이 없기 때문에 황제는 그들이 충성스럽다고 믿고, 그들이 반역을 할 욕망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믿었다.

 

기실 태감도 사람이다. 비록 정상인은 아니지만, 정상인과 비교한다면, 그들의 생각은 더욱 변태적이고, 어떤 때는 한번 난리를 치기 시작하면 더욱 야만적이 된다.

 

동한의 환제(桓帝), 영제(靈帝)는 태감의 시대였다. 환제때 다섯 명의 태감이 양기(梁冀)를 제거하는데 공을 세워 '오후(五侯)"에 봉해졌다. 영제때 10명의 태감이 어린 황제의 마음에 잘 영합하고, 그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백성의 고혈을 짜냈다. 황제에 의하여 "십상시(十常侍)"로 불리웠다. 장양은 바로 그 십상시의 첫째 인물이고, 황제가 '아버지(吾父)'라고 불렀던 인물이다.

 

장양은 성공하기 전에 궁문의 출입을 책임지던 "소황문(小黃門)"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는 눈치가 빨라서, 점점 총애를 받는다. 특히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어린 황제에 관하여, 장양은 어린 황제가 원래 황제의 아들이 아니라, 친왕의 아들이고, 그 다지 행복을 누려본 적이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는 어린 황제의 마음을 아주 잘 헤아렸다.

 

어린 황제는 말타고 놀기를 좋아했다. 장양은 전국각지에서 명마들을 끌어모은다. 각지의 탐관오리들은 황제가 말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자, 앞다투어 진상했다. 일시에 천하에 말값이 비싸졌다.

 

어린 황제는 나귀타기를 좋아했다. 원래 나귀는 '멍청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나귀는 원래 서역의 공물로, "산호, 호박, 취옥, 주보'와 나란히 공물로 바쳐졌다. 당시에도 희한 것이었다. 황제가 나귀타는 것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돌자, 다시 나귀의 가격이 올라간다. 이때 장양은 황제를 나귀가 모든 수레에 타게 했으며, 그 수레는 금과 옥으로 치장해서, 별천지였다. 그리고 자신이 친히 몰고, 황제를 타게 했다. 나중에 황제도 재미있겠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채찍을 들고 몰았다.

 

실컷 놀고나자 황제는 다시 우울해졌다. 장양은 수하를 시켜 동물을 끌고 오게 한다. 그것이 관모를 쓰고 허리에는 허리띠를 하고, 황제의 앞으로 다가왔다. 사람들이 이를 보고는 모두 놀라서 어쩔 줄을 몰랐다. 원래 개 한마리가 대신의 모양으로 분장한 것이었다. 황제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대단한 구관(狗官)이군. 여러 대신들은 자신들이 속았다고 느끼고 화난 눈으로 장양을 노려보았다.

 

장양은 황제에게 들짐승날짐승을 가지고 놀게 해주었을 뿐아니라, 황제로 하여금 토목공사를 대거 일으키고, 호화로운 궁전을 짓게 하였다. 그리고 황제에게 관직을 돈을 받고 팔도록 하였다.

 

궁전을 다 짓자, 장양은 다시 황제에게 여색을 가까이 하도록 권한다. 이때, 궁전에는 예쁜 묘령의 여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보일듯 말듯한 얇은 비단치마를 입고 다녔다. 한영제는 당연히 그녀들에게 마음이 쏠리고, 꽃속에서 세월을 보낸다.

 

이때, 장양의 교사하에, 한영제는 황음무도하게 되고, 온갖 사치를 다부리며, 조정은 신경쓰지 않는다. 당연히 장양이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그 권력을 누렸다.

 

장양은 황제에게 대정방침을 얘기한 적은 없고, 항상 황제를 타락하게 할 방법만 강구했다. 중평2년, 남궁에 불이 붙는다. 장양은 세금을 가중하도록 건의한다. 한영제는 기뻐했지만, 백성들의 고통은 더욱 심해졌다. 일시에 과중한 세금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갔다. 그리고 각지에서 목재, 기석(奇石)을 대거 거두었다. 그리고, 각주현에서 알아서 운송해도록 시킨다. 당연히 경성에 도착하면 태감들이 꼬투리를 잡고, 적지 않은 돈이 환관들의 주머니로 흘러들어간다. 거록태수 사마직은 경성까지 왔지만, 환관들이 요구하는 돈을 마련할 수 없어 독약을 마시고 자결한다. 장양은 황제의 궁전을 아주 호화롭게 짓게 했을 뿐아니라, 자신의 집도 보통이 아니게 지었다. 집안에 각종 진기한 보물들을 놓아두어 사람들의 찬탄을 불러일으켰다. 이뿐아니라, 사방에 그의 졸개들을 심어놓았다. 거기에 황제까지 그에게 공손하게 대하니 태상황과 같았다. 한번은, 한영제가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서 임영안대에 오르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장양은 황제가 높은 곳에 올라가면 자신이 호화롭게 지은 집이 들킬까봐 두려워, 황제를 속인다: 제왕천자는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높은 곳에 오르면 백성이 흩어지게 되니 불길합니다. 한영제는 그의 말을 사실로 믿고 감격해서 눈물을흘릴 정도였다.

 

장양의 권세는 하늘을 뒤덮었다. 장양의 동생 장석(張碩)도 형의 권세를 믿고 날뛰었다. 당시 그는 임야왕현령으로 있었는데, 평소에 살인방화를 저지르면서도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임산부를 죽이고, 뱃속에서 태아를 꺼내는 등 악행을 저질렀다. 조정의 사례교위 이응(李膺)은 당시 하남윤으로 있었는데, 이 사건을 조사하여 장석을 법으로 처벌한다. 장양은 동생이 죽을 지경에 처하자, 급히 황제에게 보고한다. 당시 황제는 한환제였다. 이응은 이치를 따져서 장양의 동생이 너무나 불법한 일을 저질렀다고 한다. 장양은 황제가 자신을 도와주지 않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암중으로 이응의 죄상을 끌어모은다. 당시에 장성(張成)이라는 망명자가 있었는데, 무슨 일인지 자식이 살인하도록 놔두었다. 이응은 즉시 체포했고, 장성은 입건된다. 장양은 시기가 도래했다고 보고, 사방에 유언비어를 퍼트린다. 이응이 왕명도 듣지 않고 마음대로 살인한다는 것이다. 조정도 어쩔 수 없었다. 어쨌든 진정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응등 이백명이 감옥에 갇힌다. 졸지에 인심이 흉흉해진다. 이것이 유명한 제1차 '당고지화(黨固之禍)'이다. 이응의 공로로 인하여 사형을 면한다. 장양은 계책이 무효로 돌아가자 다시 계책을 세운다. 장양은 한영제 시기에 후람, 조절등 환관과 결탁하여 다시 '당고지화'를 일으킨다. 이번에는 이응등이 사형을 당한다. 이때부터 정의로운 인사들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게 되고, 신주대지는 검은 구름에 뒤덮힌다.

 

장양은 황제를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놀았다. 그런데, 당시 반란자인 황건적의 두령 장각과도 연루되고, 심지어 황제를 바꿀 생각까지 한다. 낭중 장균이 이 일을 알고는 '십상시를 죽여서 천하에 보답하자'는 구호를 내건다. 장양은 그러나 장균을 모함하고 황제의 명을 빌어 장균을 때려죽인다. 초현의 조조는 한 때 밤에 장양의 집으로 들어가 암살할 생각까지 한다. 그러나, 정보가 누설되어, 조조는 쌍극을 휘두르며 도망치게 된다.

 

189년, 한영제가 붕어한다. 하황후는 유변(劉辯)을 안고 즉위시킨다. 그녀의 오빠인 하진(何進)은 대장군이다. 이때 장양은 생존할 토양이 남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즉시 방향을 틀었다. 그의 양자가 하진의 여동생을 처로 삼는다. 장양은 하진의 모친에게 여러번 기진이보를 바쳤고, 하진의 동생인 거기장군 하묘(何苗)에게도 뇌물을 보낸다.

 

하진등을 마비시키기 위하여, 장양은 자신의 며느리(하진의 여동생)에게 무릎을 꿇고, 자신은 대장군을 한 마음으로 성원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진의 부하장수인 원소, 조조등은 모두 청군측(장양의 제거)을 주장한다. 그러나, 장양이 성지를 위조하여 하진을 입궁하도록 하고, 궁문에서 습격하여 하진을 죽여버린다. 원소등은 대노하고 낙양성은 공포분위기가 조성된다.

 

불의를 많이 행하면 반드시 벌을 받는다. 갖은 악행을 저지른 장양은 천자를 데리고 도망치고자 하지만, 앞에는 황하가 흐르고, 뒤에는 노식(盧植)등이 추격해왔다. 장양은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는 것을 보고는 어린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하고서는 황하에 몸을 던진다. 온갖 죄악을 저지른 태감의 최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