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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한)

"모성(謀聖)" 장량(張良)에 관한 수수께끼

by 중은우시 2012. 1. 29.

글: 여영무(余英茂)

 

 

 

진말한초의 군사모략가 장량은 중국역사상 전설적인 인물이다. 소위 "운주어유악지중(運籌於帷幄之中), 결승어천리지외(決勝於千里之外)"는 바로 장량을 말하는 것이다. 장량은 '모성'으로 칭송되고, 그의 이름은 지혜의 대명사가 되었다. 문성 공자, 무성 관우, 시성 두보등과 함께 중국고대의 14명 성인중 한 명이 된다.

 

재미있는 점은 역사상 장량에게는 여러가지 신비한 색채가 덧씌워 있다는 것이다. 장량이 후세에 남긴 여러가지 수수께끼는 다음과 같다: 장량의 관적은 어디인가, 장량의 "습리득서(拾履得書)"는 천년간 전해져 내려오는데, 그의 지혜는 과연 신으로부터 도움받은 것인가? 영웅이 배출되는 난세에 장량은 왜 왕을 칭하지 않았는가...이천여년동안, 장량의 역사수수께끼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지금까지, 장량에 얽힌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고 있다. 아마도 이것이 장량의 매력이 아닐까?

 

첫째, 오세상한(五世相韓), 장량의 관적은 어디인가?

 

비록 장량이 역사상 대명이 자자한 인물이지만, 옛서적에 장량의 관적은 명확히 기록하고 있지 않다. 사람들은 명인과 관계를 어떡하든 맺고 싶어한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전국각지에 세워진 장량사(張良祠)는 백개에 달한다. 안휘 박주(亳州)등지가 장량의 고향이라고 얘기한다. 하남성에만도 겹현, 신정등이 장량의 고향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얼마전 정주의 한 매체는 글을 발표하여 장량의 고향이 우주시의 장득향이라고 말했다. 장득(張得)은 장량의 부친이기 때문에, 이 마을의 이름이 장득향이 된 것이라는 것이다.

 

장량의 관적에 대하여 여러가지 주장이 나오는데 대하여, 전 신정시 당사판공실 주임인 정중지에 따르면, 사마천이 <사기>에서 명확히 적어놓았다고 한다. "(장량) 부평(父平), 상왕(相王), 도혜왕(悼惠王)" 그러므로, 장량이 고향이 우주라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정중지 선생은 이렇게 추단한다. <사기> <한서>등의 사료에 따르면, 장량은 전국시대 말기 한(韓)나라 사람이다. 자는 자방(子房)이고, 그의 조상은 "오세에 걸쳐 한나라의 재상을 지냈다" 장량의 조부인 장개지는 한나라의 재상으로 41년을 지낸다. 부친 장평은 46년, 합쳐서 87년간이나 한나라의 재상을 지낸다. 그리고 신정은 당시 한나라의 수도였다. 장량의 집은 당연히 한나라의 수도인 신정에 있었을 것이다. 장량의 부친 장평은 기원전250년에 사망한다. 당시 장량의 나이는 아직 어렸다. 그러므로, 장량의 출생지는 한나라의 수도인 신정일 것이다.

 

기원전230년, 한나라는 진시황에 의하여 멸망한다. 이때는 장량의 부친 장평의 사우 20년이 지난 때였다. 정중지 선생은 이로써 추단한다. 한나라가 멸망할 때 장량은 최소 20살정도된 젊은이였다. 한나라는 멸망하고, 장씨집안도 따라서 무너졌다. 그러므로, 장량은 진시황과 집안과 나라의 원수가 된다.

 

망국의 한을 풀기 위하여, 장량은 집안의 종들을 모두 내보내고, 동생이 죽어도 장례를 지내지 않고, 집안재산을 팔아서 현금화한다. 그리고 사방으로 용사를 찾아서 진시황을 암살하고자 한다. 장량은 마침내 큰 돈을 들여서 힘이 천균에 이르는 대역사를 얻는다. 그는 60근짜리 대철추를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진시황의 양무(원양현 동남쪽)의 박랑사로 순유를 떠났을 때, 이 곳에 매복한 장량은 대역사와 함께 대철추를 던져 진시황의 어가를 급습한다. 아쉽게도 부거(副車)에 맞는 바람에, 진시황이 앉은 수레에는 맞지 않는다. 진시황은 대노하여, 전국에서 십일간 대거 자객을 수색체포한다.

 

뜻을 이루지 못한 장량은 어쩔 수 없이 이름을 감추고 숨어버린다. 강소의 하비로 도망가서 9년간 숨어지낸다. 진승, 오광의 난이 일어난 후, 장량은 백여명을 모아서 반진의 농민군에 가담하고, 유방에 의탁한다. 병법에 정통한 장량은 한고조 유방을 도와서 경천동지할 대업을 이루고, 진나라를 멸망시킨다. 한나라의 복수를 한 것이다. 천하를 탈취한 후, 장량은 유후(留侯)에 봉해지고, 역사에 이름을 영원히 남긴 인물이 된다.

 

역사적 사실에 다르면, 신정시 지방사지 판공실총편집 조헌립은 이렇게 생각한다: 장량이 한나라에 오대에 걸쳐 재상을 지낸 후, 장량의 선조는 분명히 수도였던 신정에 있엇을 것이고, 다른 곳에 거주했을리는 없다. 한나라가 멸망할 때, 장량으 집안에 종만도 300명인데, 이런 대가족은 수도에마 살 수 있을 것이다. 이를 근거로 추단하면, 장량의 출생지는 한나라의 수도인 신정이다.

 

2. 습리득서(拾履得書): 장량의 지혜는 신의 도움을 받은 것인가?

 

유방에 의탁한 후, 장량은 유방을 도와 여러가지 계모를 내놓고, 많은 공로를 세운다. 잔도를 불태워 항우를 속였고, 잔도를 수리하는 척하면서 진창으로 몰래 진격해서, 항우를 마비시키고 공격했다. 초한전쟁의 중요한 순간에 영포를 회유하고, 팽월과 연락하고, 한신을 중용하여 공동으로 초에 대항하는 계책을 내놓는다. 항우의 숙부인 항백과 친분을 쌓아, 재물로 항백에 뇌물을 주어, 항백을 통하여 유방과 항우간의 갈등을 완화시킨다. 이를 통하여 '홍문연'에서 유방의 목숨을 구한다. 홍구의화후에 유방에게 항우의 병력이 약정에 따라 퇴각할 때 초군을 추격하고 호랑이가 산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아아 한다고 건의한다.

 

하비로 도망친 장량은 나중에 걸출한 모사가 된다. 그의 모략은 도대체 어디서 배운 것일까? 전설에 따르면 장량은 신선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사기>등 사서에서는 이 전설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지혜가 신선으로부터 받았다는 전설은 장량에게 더욱 더 신비로운 색채를 더해주게 된다.

 

하루는 장량이 하비의 한 다리 위에서 놀고 있었다. 거친 베로 만든 옷을 입은 노인의 앞을 지날 때, 노인은 고의로 신발을 다리 아래로 던져버린다. 그리고 장량에게 분부한다: "아이야. 내려가서 내 신발을 주워 오너라." 이 말을 듣고, 장량은 화가 많이 난다. 그러나, 노인의 나이가 많은 것을 보고는 꾹 참고 다리 아래로 내려가서 신발을 주워온다. 노인은 득촌진척(得寸進尺)으로 말했다: "신발을 신겨라." 장량은 화를 꾹 눌러참고, 땅 위에 꿇어앉아 노인에게 신발을 신겨준다. 신발을 다 신은 노인은 웃으며 떠났다. 그런데 1리 정도 가다가 다시 돌아와서 장량에게 말한다: "너는 잘 기르면 희망이 있겠다. 오일후에 이곳으로 나를 만나러 와라."

 

오일후 아침 일찍 장량은 약속대로 다리 위로 간다. 그런데 노인이 더 일찍 와 있었다. 노인은 얼굴에 화를 내며 말한다: "젊은 놈이 오인과 약속하고도 어찌 늦게 온단 말이냐, 돌아가라. 5일후에 다시 와라."

 

다시 5일이 지나고, 장량은 닭이 울때 약속장소로 간다. 그런데도 또 늦었다. 노인은 그에게 다시 오일후에 오라고 한다. 세번째, 장량은 한밤중에 출발하여, 마침내 노인보다 먼저 도착하게 된다. 장량의 성의는 노인의 시험을 통과한 것이다. 노인은 기뻐서 말한다: "이래야지." 그리고 책 하나를 꺼내서 준다. "너는 이 책을 다 읽어보아라. 그러면 제왕의 스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말을 마치자 노인은 표연히 떠난다.

 

날이 밝은 후, 장량은 노인이 준 책이 그가 꿈에도 찾던 <태공병법>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전설에 따르면 이 책은 서주의 강자아(강태공)이 쓴 책이다. <태공병법>을 얻은 후 장량은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과연 지모의 기재가 된다.

 

'습리득서'의 진위에 대하여 정중지 선생은 웃으며 말한다. 이 일은 분명히 장량의 계모일 것이다. 당초 젊었을 때 혈기방장했다. 사료에 따르면, 하비에 거주할 때 장량은 여전히 '임협'이었다. 아마도 하비에 거주하는 동안 장량은 스스로의 행동을 반성하고 학습하는 기간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강태공의 여러가지 군사사상을 배워서 점점 익숙해 졌을 것이다. 봉건사회때, 어떤 사람은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하여, 군중이 미신을 이용한다. 그리하여 신화를 날조해서 이용한다. 당시 이런 수단은 자주 쓰였다. 장량이 이 신화를 날조해낸 것은 자신의 뜻을 높이고, 다른 사람의 위풍을 죽여버리기 위함일 것이다.

 

3. 성격결정: 장량은 왜 왕을 칭하지 않았는가?

 

유방이 강대한 항우에 이겨서 한나라왕조를 세울 수 있었던 것에 장량의 공로는 무시할 수가 없다. 유방은 장량을 "운주어유악지중, 결승어천리지외'라고 칭찬한 바 있다. 장량은 소하, 한신과 더불어 후세인들이 '한초삼걸(漢初三傑)'이라 불린다.

 

이런 명언이 있다: 장군이 되고자 하지 않는 사병은 좋은 사병이 아니다. 역사를 자세히 읽어보면, 많은 사람들은 이런 점을 한탄한다: 장량은 왜 다른 사람의 밑에서 모사로 지냈을까? 왜 스스로 왕이 되려 하지 않았을까? 그의 주공인 유방은 깡패출신인데 어떻게 황제에 오를 수 있었을까?

 

장량에게 왕이 되고픈 야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실제로 그에게도 왕이 될 기회가 있었다. 진승오광의 난 초기에, 장량은 백여명의 무리를 모았다. 그런데 왜 왕을 칭하지 않고, 한마음으로 유방을 따랐을까? 고대인들의 머리에 충군사상이 아주 깊었다. 이런 사상이 아마도 장량을 지배했을 것이다.

 

장량의 속은 아주 깊었다. 장기를 두는 것처럼, 다른 사람은 한발 앞을 내다보지만, 장량은 세 발 앞을 내다보았다. 장량은 당시 정세를 꿰뚫어 보았다. 역대군왕은 모두 다른 사람의 어깨를 밟고 올라서 왕위에 올랐다. 장량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장량은 자신의 역량을 아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왕이 될 정치적 수완은 없다고 생각했다. 어떤 점에서, 그는 기껏해야 모신을 할 재목이었다. 그와 유방의 관계는 '수재(帥才)'와 '장재(將才)'의 관계이다. 억지로 한다고 하여 성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장량의 흉금도 그가 왕을 칭하지 않은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당초 장량이 유방에 의탁한 목적은 국가와 집안의 복수를 하기 위함이었다. 그가 무슨 공명을 얻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진나라를 무너뜨리면서 장량의 목표는 이루어진다. 천하를 평정한 후 논공행상을 할 때, 유방을 후에 봉하고 삼만호를 봉읍으로 주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장량은 그러나 1만호만 달라고 한다. <한서열전>에 장량이 이때 한 발이 기록되어 있다: "집안은 대대로 한나라의 재상을 지냈습니다. 한나라가 멸망하자, 만금의 재물을 아기지 않고 한나라를 위하여 강한 진나라에 복수하고, 천하를 진동시키고자 했습니다. 지금 세치 혀로 황제의 스승이 되었으니, 만호를 봉읍으로 받고, 제후의 반열에 오르면 포의로서 최대한을 받는 것이니, 장량은 만족합니다."

 

4. 토사구팽(兎死狗烹): 장량은 왜 혼자서 물러났는가?

 

한왕조가 건립된 후, 유방은 한신, 장량, 소하를 포함한 7명의 이족공신을 후로 봉한다. 그러나 몇년이 지나자, 유방은 더 이상 옛날의 공신들을 믿지 않는다. 기회를 잡으면 이들의 관직을 빼앗고 작위를 빼앗았다. 개국공신중 결말이 좋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한초삼걸'중에서 한신도 모반죄로 주살되고, 삼족을 멸하였으며, 소하도 죄를 받고 감옥에 갇히지만, 장량만이 다른 사람과 달리  일생을 평안하게 살았다.

 

이런 말이 있다. '임금과 함께 있는 것은 호랑이와 함께 있는 것과 같다' 유방은 의심이 많았다. 장량이 황제의 곁에 있으면서도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다는 것은 이미 일대기적이다. 장량은 왜 살벌한 궁중투쟁에서 혼자 잘 지낼 수 있었을까? 이것도 천고의 수수께끼이다. 정중지 선생에 따르면, 그의 공을 이루기 전에,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달랐던 점은, 장량이라는 개국공신이 용퇴를 하였다는 것이다.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가지 않고, 문을 걸어잠그고 손님을 맞이하지 않는 은거생활에 들어간다. 후에 봉해진 초기에 장량은 유방에게 말한다. 이후부터는 '벽곡' '경신'의 술을 배우고자 하며 인간세상의 일에 관여하지 않고, 인간세상의 음식을 먹지 않으려 한다고. 도를 닦아서 신선이 되고 싶다고. 그후 장량은 몸이 약하고 병이 많다는 핑계를 대며 점차 관직에서 몸을 빼고, 더이상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

 

<사기.유후세가>의 기록에 따르면, 후에 봉해진 후, 장량은 '벽곡'을 배웠다. '벽곡'은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다. 유방의 부인 여후는 장량의 행위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장량에게 말한다: "인생은 이렇게 짧은데, 그대는 어찌 스스로 고생을 자초하는가?"

 

장량의 이런 행동은 표면적인 것이다. 기실 그는 '명철보신'한 것이다. 이것도 장량의 계모이다. 장량은 총명하다. 그는 일찌감치 역사의 교훈을 알았고, 이런 역사의 철칙을 잘 알았다: "역대군왕은 창업초기 강산을 얻을 때에는 사람이 필요한 시기이고, 인재의 중요성을 인식한다. 인재는 이때 존중받고 중시된다. 군왕은 신하들과 고난을 함께할 수 있어야 천하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성공하게 되면 군왕은 더 이상 신하들과 승리의 성과를 나누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는 옛날의 공신들을 의심한다. 공신이 그의 왕위를 위협할까 두려워한다. 방아를 다 돌리고 나면 당나귀를 죽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역사상 개국공신의 대다수는 결말이 비참했다. 선종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유방이 어떤 사람인가? 장량은 일찌감치 다 꿰뚫고 있었다. 그래서, 성공한 후, 장량은 적절히 멈추었다. 총명하게 도망친 것이다. 도를 배우고, 놀았다. 점차 '명분을 가지고' 관료사회에서 떠난다. 이것은 총명한 행동이다. 이런 초탈한 거동은 장량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선종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당초, 장량은 한신에게 물러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한신은 그의 충고를 듣지 않는다. 목이 떨어질 때가 되어서야 한신은 장량의 고심을 이해했다. 그는 피살되기 전에, 이런 탄식을 발한다: "교활한 토끼가 죽으니, 달리던 개는 삶는구나. 나르는 새가 없어지니, 좋은 활은 감추어둔다. 적국을 다 격파하고 나니, 모신은 죽는다." 토사구팽의 결과를 장량은 미리 알았다. 이는 장량이 멀리 생각하고 철저하게 파악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장량의 조치는 명철보신의 의미가 있지만, 당시의 봉건사회인 사회조건하에서 장량은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장량이 평안무사할 수 있었던 데는 유방의 부인 여후가 큰 역할을 한다. 한동안 유방은 여후의 아들을 폐위하고, 척부인의 아들인 유여의를 태자로 삼고자 했다. 여후는 아들의 태자위를 지키고 싶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마음이 급해서, 그녀는 장량에게 가르침을 구한다. 장량은 여후에게 아이디어를 낸다: "당금 천하에 4명의 현인이 있습니다. 황상이 보고자 했지만 만나지 못했습니다. 태자가 그들을 상빈으로 모실 수 있다면, 황상은 분명 태자를 괄목상대할 것입니다. 그러면 태자의 지위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 여후는 장량의 계모대로 행했고, 과연 아들의 태자위를 보전할 수 있었다. 여후는 당연히 장량에게 감사한다. 이런 사정을 통하여, 계모에 뛰어난 장량은 또 하나의 안전열쇠를 확보한 것이다. 이 점에서 보더라도, 장량의 지모는 그 자신을 구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