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한)

상홍양(桑弘羊): 잊혀진 공신

중은우시 2012. 6. 3. 23:55

글: 신삼재망

 

 

 

한무제(漢武帝)를 얘기할 때면 중국인들의 가슴은 진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중국인들에게 자랑스러운 시대이다. 그것은 중화문명을 널리 사해에 전파한 시대히다. 그 시대를 떠올리면 사람들은 위청(衛靑), 곽거병(霍去病)등 흉노와 싸운 명장들을 떠올린다. 수십만대군이 삭풍을 맞으며 대막을 건너, 흉노를 북으로 쫓아냈고, 서한건립이래의 기울어가는 분위기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이때부터, "오랑캐의 말이 음산을 넘어오지 못하게 하였다(不敎胡馬度陰山)". 이 얼마나 호기대단하고 사람을 격동시키는 말인가? 그것은 또한 대한한 강세이고 위엄이었다. 그러나, 그 배후에 쓴 돈도 만만치 않았다. 일곱번에 걸친 흉노공격에만도 합쳐서 백만이 넘는 인/차가 동원되었고, 2,3백만명의 민부들이 병기, 갑옷과 군량을 운송했다.

 

전투때, 한나라군대는 십여만의 사병과 2,3십만의 전마를 잃었다. 적군의 수급을 벤 장병들에게 하사한 상금도 걸핏하면 수십만황금이었다. 사서에 따르면, "서한의 중앙정부의 재정은 세비 백여거만(百餘巨萬)의 거액지출을 감당했다" 여기서 '거만'은 '만만' 즉, 억을 가리킨다. 바로 이런 자금조달을 담당한 사람인 '상홍양'은 한나라 제국의 사서에 별로 많이 언급하지 않고 지나간다. 전쟁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상홍양'이다. 그는 역사에 그다지 이름이 알려져있지 않지만, 한무제시기의 흉노와의 전쟁에서 대사농등의 직위를 맡아서 운주유악(運籌帷幄)을 하며, 재정공급을 보장했고, 이 장기간에 걸친 전쟁을 효과적으로 지원해주었다.

 

그러나, 역사는 이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에 대하여 제대로 대접을 해주지 않았다. <한서>에는 그의 전(傳)을 따로 두지 않았다. 사마광은 그를 "세금을 추가징수하지 않으면서 국가의 자금은 충분했다. 이것은 음험한 방법으로 민간의 이익을 빼앗은 것에 불과하고, 그 해악은 세금을 추가하는 것보다 컸다."고 하였다. 또한 소철은 '법술이 바르지 않았다" "백성이 그 해를 입었다"고 하였다. 소식은 더욱 날카롭게 공격했다: "한나라이래로 학자들은 상앙, 상홍양을 언급하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그를 말하는 것은 입이 더러워진다고 생각하고, 그를 쓰는 것은 책을 더럽힌다고 생각했다"(<동파지림>권5), 그리고 <사기>에서 상앙과 상홍양의 공을 논한 것이 태사공(사마천)의 두 가지 대죄라고 하였다.

 

상홍양은 생전과 사후에 "언리소인(言利小人)"과 "취렴지신(聚斂之臣)"의 전형적인 인물로 낙인찍혀 비난을 받아왔다고 말할 수 있다. 위청, 곽거병등이 역사서에 그 명성을 남겨 후세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것과 선명하게 대비가 된다. 도대체 상홍양은 어떤 인물일까? 도대체 왜 이렇게 악독하게 비난을 받는 것일까? 도대체 상홍양은 무슨 일을 하였기에 천추사서에서 그의 전을 둘 수 없었을까? 수수께끼같은 상홍양은 도대체 어떤 사정을 숨기고 있기에 후세에 지금까지 그 신비한 면사를 벗기고 그의 전설같은 이야기를 해독하지 못하고 있을까?

 

상홍양(기원전152-기원전80)은 낙양의 상인가정 출신이다. 계산에 밝은 장기를 지니고 있어서, 13세때 시중(侍中)을 맡는다. 이때부터 한무제의 곁에서 일을 했다. 33세때 동곽함양, 공근등 세 사림이 "이익에 대하여 아주 상세하게 설명했다(言利析秋毫)". 그의 경제에 대한 분석은 아주 깊이가 있었다. 그래서 한무제의 신임을 받는다. 원정2년(기원전115년) 한무제 유철은 대권을 장악한 후,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곽토척경(廓土斥境)"한다. 특히 부친과 조부의 선례를 깨고, 흉노에 대하여 강경한 조치를 취한다.

 

이같은 전면적인 개혁은 사회경제에 거대한 압력을 준다. 비용이 많이 들어서 재정이 감당을 하지 못하고, 일시에 재정이 부족한 현상이 나타난다. 재정위기가 심화되는 것이다. 재정의 곤경을 해결하는 것이 한무제와 그 신하들의 시급한 문제가 된다. 이전의 "매관매직' '속죄금'으로는 배수거신(杯水車薪)이었고, 도저히 해결방법이 되지 못하였다. 게다가 날로 곤궁해지는 백성들에게서 세금을 추가로 더 거두는 것도 '장기적인 대책'은 될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상홍양은 일련의 돈을 벌 수 있는 경제정책을 제안하고 주재한다. 원봉원년(기원전110년), 상홍양은 치속도위가 되고, 동시에 내농령을 겸임하여, 전국의 조세재정을 장악한다.

 

그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유명한 경제개혁을 시작한다. 한나라초기의 "개산해금(開山海禁)"정책은 염철(소금과 철)의 사영을 허용했고, 거상들과 여러 제후들은 속속 철을 제련하고, 소금을 만들어서 엄청난 경제력을 쌓는다. 이것은 국가수입의 감소를 가져왔을 뿐아니라, 정치적으로 서한왕조의 안정에도 아주 불리했다. 상홍양은 염철의 국유화를 주장하고, 소금과 철을 사적으로 매매하는 것을 금지하도록 한다. 적폐를 일소하고 염철을 국영으로 하여 생산량과 판매가 대폭 늘어난다. 이는 한나라조정에 엄청난 재정수입을 가져다 준다. 이것은 이후 변방을 공고히 하고, 흉노와 싸우는데 중요한 경제적 보장이 된다.

 

동시에 거부와 귀족들이 매점매석을 통하여 물가를 조작하고 폭리를 취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그리고 재정수입을 증가시키기 위하여 상홍양은 균수법(均輸法)과 평준법(平準法)을 실행한다. 운수를 장악하는 균수관과 물가를 관리하는 평준관을 두어, 각지에서는 공물의 가격과 운송비를 납부하고, 그 후에 균수관과 평준관은 가격이 싼 곳에서 상품을 구매해서 경사 혹은 가격이 비싼 지역으로 운송하여 판매한다.

 

이는 관청이 "천하의 화물을 모두 모아서, 비싸면 팔고, 싸면 사들이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부호와 귀족들이 폭리를 취하기 어렵게 된다. 물가가 터무니없이 뛰는 것이 없어진다. 균수법과 평준법을 실행한 결과는 백성의 원거리 공물납부의 부담을 줄여주었을 뿐아니라, 지방부상과 귀족이 사회를 통제하는 힘을 약화시킨다. 그리고 중앙집권의 역량을 효과적으로 강화시킨다. 동시에 조정은 운수와 무역을 통제하고, 서한왕조는 거액의 재정수입을 확보한다. 이때부터 변방으로의 물자공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진다.

 

화폐제도개혁은 상홍양의 경제개혁중 가장 주목되는 개혁이다. 한나라조정이 건립된 초기에 법령이 잘 시행되지 않아서, 사적으로 화폐를 주조하는 것이 성행한다. 이리하여 화폐사용의 혼란이 있었다. 그리하여 물가폭등현상이 날로 심각해졌다. 원정4년(기원전113년), 한무제는 조서를 내려 상홍양의 건의를 받아들여 화폐제도를 개혁한다. 국가에서 통일적으로 화폐를 주조하게 된다.

 

새로 주조한 삼관전(三官錢)은 세상에서 오수전(五銖錢)이라고 부르는데, 중량이 실제중량과 일치했고, 규격도 같았다. 품질도 비교적 좋고, 원가도 높았다. 사적으로 동전을 주조하는 자들이 이익을 볼 수가 없었다. 이를 통하여 민간에서 사적으로 화폐를 주조하는 폐해를 일소한다. 그리하여 화폐제도가 통일된다. 오수전은 후세에 장기간 사용된다. 그외에 상홍양은 주류전매, 공전경영등등의 조치를 취한다. 이리하여 중앙재정을 개선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한다. 동시에 변방의 개발에도 아주 중요했다.

 

상홍양은 일생동안 육십년간 조정에 있었다(한소제 원봉원년 기원전 80년에 피살될 때까지). 한무제의 경제정책의사결정에 미친 영향이 가장 커서, 상홍양 본인이 서한의 경제사회에서 더욱 특수하고 중요한 지위를 누린다. 그가 실시한 일련의 경제정책의 주요관점은 널리 자금조달원을 개발하고, 정부의 재정위기를 해결하고, 또한 거부귀족의 역량에 타격을 가하는 것이다. 가장 직접적인 목적은 장기간의 한-흉노전쟁에 경제적인 뒷받침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는 바로 사서에서 쓴 바와 같이, "변방의 쓸 돈이 부족하여, 소금과 철을 정부가 운영하고, 주류전매를 실시하고, 균수법을 시행했다"

 

이들 조치는 모두 예견한 효과를 거두었다. 바로 충분한 군수조달이 이루어졌다. 한무제는 "삽십여년간 병력을 동원하면서도 백성들에게 세금을 추가하거나 군용물자를 징용하지 않았다." 한나라는 이로 인하여 흉노와의 전쟁을 끝까지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무제의 '문치무공'은 상홍양의 일련의 재정경제정책으로 물질적인 기반을 확보했다. 이런 의미애서 말하자면, 상홍양은 한무제의 업적에 가장 유력한 조수였다. 그의 공로는 위청, 곽거병에 절대 못지 않다. 그러나, 상홍양이 국가재정을 확충하여 국가가 충분히 쓰게 했음에도, 그는 공공연히 유가사상의 "휘언재리(諱言財利)", "여민쟁리(與民爭利)"의 금기를 위배했다. 그리하여 당시 및 후세의 여러 유생들로부터 비난을 받는 것이다.

 

특히 그가 '백성들에게 과세를 추가하지 않으면서 천하의 재정을 충족시킨 것'은 권력귀족과 부호들의 기득이익에 타격을 가하면서 이룬 것이다. 그러다보니 이들로부터 맹공과 모함을 받는다. 염철회의에서 순창설검(脣槍舌劍)의 설전을 벌인 후, 상홍양은 점차 세력을 잃는다. 결국 권력귀족과 외척과의 정치투쟁에서 패배하여 비참하게 별족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그러나 역대왕조는 그의 조치를 본받아서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돈벌 길을 막아버렸다. 그리하여 그를 적대시하고 미워하는 것은 역사를 통틀어 끊이지 않았다. 이런 점을 보면, 우리는 상홍양이라는 인물의 생전과 사후에 왜 그렇게 많은 욕을 얻어먹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신비로운 면사와 전설적인 이야기는 한나라제국이 점차 쇠퇴하면서 한나라제국의 사서에서 잊혀진 인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