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장계합(張繼合)
중국고대의 유명한 재녀 채문희의 부친은 채옹이다. 그는 중요한 인물이다. 자는 백개(伯喈)였고, 진류어(陳留圉, 지금의 하남성 기현 남쪽)사람이다. 한헌제때, 그는 좌중랑장(左中郞將)을 지낸다. 그리하여 후인들은 그를 "채중랑(蔡中郞)"이라고 부른다. 채옹은 집안의 기둥이었고, 그는 일가의 남녀노소를 모두 돌보았다. 그리고 총명하고 영리한 딸을 길러낸다. 범엽은 <채옹열전>을 별도로 썼는데, 이를 보아도 그가 얼마나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채옹은 대효자이다. 어머니가 병이 들자, 그는 탕약을 끓여서 한숟가락 한숟가락 먹여드리고, 잠잘 때에도 옷을 벗지 않았다. 약간만 동정이 있으면 일어나서 모셨다. "오랜 병에 효자없다"는 말이 있지만, 채옹은 3년간을 이렇게 모셨다. 어머니가 관에 들어갈 때까지. 어느 시대이건 인품을 형량하는 기준은 대체로 비슷하다. 그것은 바로, "만악중에 음탕함이 으뜸이고, 백선중에 효도가 제일이다" 친부모에게 효도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 어찌 형제를 돌보고, 친구를 잘 사귀겠는가? 그리고 어찌 "제가, 치국, 평천하"를 할 수 있겠는가?
한나라때는 과거제도가 없었다. 민간에서 인재를 선발하는 유일한 경로는 "거효렴(擧孝廉)"이었다. 채옹의 덕망은 '효렴'으로 백번 기용되어도 무당할 정도이다. 그가 역사에 이름을 남긴 것이 혹시 3년동안 뛰어나게 모친을 모셨기 때문인가? 그건 확실히 아니다. <채옹열전>에는 그의 뛰어난 재주를 기술하고 있다: "박학다식하고, 글에 뛰어나며, 수학에 뛰어났고, 천문에도 뛰어났으며, 음률도 잘했다."
범엽은 두 가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나는 채옹이 강남에 갔을 때, 한 여관에 투숙하는데, 돌연, 부엌에서 '파파팍'하는 불타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의 귀는 아주 예민했다. 즉시 불에 타는 것이 상급의 금(琴) 재료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그 나뭇조각을 불 속에서 거낸다. 그리고 잘 자른 다음에 그 시커먼 나무조각은 둥글고 매끄러운 고금(古琴)으로 태어난다. 금의 줄이 울리면, 그 아름다운 음성이 거세무쌍이라 할 정도였다. 아쉽게도 아름다운 가운데 결점이 있었다. 금의 꼬리부분에 약간의 불탄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는 그냥 "초미금(焦尾琴)"이라고 이름붙여버린다.
또 하나는 한영제 희평4년, 채옹은 '의랑(儀郞)'으로 승진한다. 그는 조정의 조회에 참가한다. 그가 가장 신경쓰던 것은 유가경전과 육경의 문자였다. 이미 누렇게 된 옛날 책에서는 이미 형편없는 유학자들에 의하여 난도질을 당했다. 그리하여 원래의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글자와 행간에 잘못된 내용들이 많이 섞여들어간다. 그는 조정에 이들 경문을 새로 교정하도록 요청한다. 요청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해내는 것은 어렵다. 이것은 실력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글에 대한 공력이 심후하지 못하다면 어찌 옛날의 성전에 손을 댈 수 있을 것인가? 채옹은 그 능력이 있었다. 조정에서 승락하자, 그는 즉시 옛날 책에 파묻혀서, 땀을 흘려가며 촛불을 켜고 밤을 샜다. 이 사업이 끝나고 그는 친히 글을 써서 비석을 세운다. 채옹은 당대일류의 서예가이다. 그는 예전(隸篆)에 능했다. 그는 유명한 "비백서(飛白書)"를 창안한다. 일을 마치고 나서야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쉰다.
지금, 46개의 경문을 새긴 석비가 태학문 바깥에 우뚝 서 있다. 명성을 듣고 찾아오는 자들이 줄을 잇는다. 매일 일천여명이 감상을 하고, 베껴간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희평석경(熹平石經)"이다. 중국의 첫번재 '한석경(漢石經)"이며, 이는 채옹의 문화교주의 지위를 확립시켜 준다. 태위 마일제(馬日磾)는 마음 속으로부터 찬탄한다: "백개는 광세기재이다" 이를 보면 저명한 문인 채옹은 이미 뛰어난 서예실력 즉 '필력'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광세기재'는 유명해지니 천하의 명사들과 사귀게 된다. 그는 청년준재 조조와도 스승이며 친구였다. 두 사람은 의기가 투합했다. 다행이 이런 사적인 교분이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채문희의 운명은 더 비참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채옹은 그의 선조 채훈(蔡勛)처럼 혈기가 넘치지는 않았다. 그는 군벌 동탁의 위세에 거절하지 못해서, 그가 시키는대로 '동탁'의 브레인이 된다. 정말 그 말이 맞다: "악당에게 인정받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임을 당하는 것이 낫다" 동탁은 악명이 높았지만, '채중랑'을 아주 높이 평가했다. 그리하여 그를 중용한다. 먼저 그를 제주(祭酒)에 앉히고, 다시 지금으로 말하면 차관급의 고위간부직인 시어사(侍御史)로 승진시킨다. 곧이어 장관급의 "상서(尙書)"로 승진시킨다. 삼일만에 세 직위를 모두 거친다. 초평원년(190년) 좌중랑장이 된다. 한헌제가 장안으로 천도하고나서는 고양향후(高陽鄕侯)의 작위를 받는다. 이때가 채옹에게는 정치인생의 최고봉이었다.
배상봉후(拜相封侯)는 보통 관리들이 평생 꿈에도 그리는 일이다. 그저 동탁이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하급 관리에서 졸지에 이런 것들을 모두 얻게 된다. 아쉽게도 공명에 취한 채옹에 있어서, 이 악당에 의하여 부여받은 관운이 절대로 복음은 아니었던 것이다. 당연히 채옹도 수수방관하면서 공짜밥을 먹은 것은 아니다. 그는 동탁을 위하여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낸다. 사람이 남의 처마 맡을 지날 때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여야 한다. 설사 그것이 인간의 도리나 도덕적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부역논리'나 '매국철학'을 옹호하려는 말이 아니다. 역사는 모든 사람에게 열사나 민족영웅이 되도록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떤 사람이 대회상에서 후르시초프에 대하여 왜 당초에 스탈린에 반대하지 않았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후르시초프는 화를 벌컥 내며 말했다: "그 말을 누가 했느냐. 일어나 봐라." 회의장은 쥐죽으 듯이 고요했고 적막이 흘렀다. 사람들은 최고지도자가 화를 무지 낼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후르시초프는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당시 내가 스탈린을 따랐던 처지는 지금 너희들의 처지와 다르지 않다." 채중랑도 그랬다. 이미 호랑이등에 올라탄 것이니 내려갈 수가 없는 것이다.
금방 동탁은 실각한다. 그와 함께 있었던 사람은 모조리 좋은 꼴을 보지 못했다. 채옹도 목숨을 부지하지 못한다. 그는 '연환계'를 쓴 사도 왕윤에 의하여 '기장파(騎墻派)'로 분류된다. 한헌제 초평3년, 즉 192년, 61세의 채옹은 '동탁에 아부한' 죄로 피살된다. 전해지는 바로는 나중에 그를 애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심지어 사도 왕윤조차도 애통해하며 후회했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이미 너무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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