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한)

한영제(漢靈帝): 부자가 되고 싶었던 황제

by 중은우시 2012. 3. 31.

글: 섭지추(葉之秋)

 

한영제를 얘기하자면 많은 사람들은 제갈량의 <출사표>에 나오는 구절을 떠올릴 것이다: "선제(유비)께서는 한환제, 한영제에 대해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先帝未嘗不嘆息於桓靈也)". 제갈량이 보기에, 그리고 많은 역사학자들이 보기에, 한나라가 쇠망한 것은 한환제, 한영제가 나라를 다스린 20여년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도 확실히 그러하다.

 

그러면, 한영제는 너무 무능하고 너무 용렬하여 십상시(十常侍)에게 눈과 귀가 가려지고, 간신들에게 놀아났고 대권을 장악하지 못하여 천하의 혼란이 일어났단 말인가? 아니다. 정사에 나오는 한영제는 비록 용렬하기는 하지만 멍청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한영제는 아주 총명한 군주였다고 말할 수 있다. 한영제가 즉위한 초기에 그는 12살의 소년이었다. 그러나 짧은 4년만에, 한영제는 환관세력에 의지하여, 궁중의 가장 큰 어르신인 두태후를 포함한 두씨집단(竇氏集團)을 소멸시킨다. 두태후는 울분 속에서 죽는다. 이런 군주가 어찌 무능하다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한영제의 권력이 확대되면서 그의 욕망도 계속 팽창한다. 말년에 이르러, 한영제는 이미 26살이고,성숙한 군주였다. 이때 외척세력은 이미 모조리 제거되었고, 환관세력이 날로 강해졌다. 막후의 주모자는 바로 한영제이다. 한영제는 조정의 일부 대신에 대하여 한편으로는 의존했다. 어쨌든 조정대신의 도움이 없이는 국사를 처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환관세력을 이용하여 탄압했다. 한영제가 궁전을 짓고자 했는데, 삼공중 한 명인 사도 양사(楊賜)가 끝까지 반대했다. 한영제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다행히 조정의 일부 사람들이 한영제의 눈치를 봐서 일을 처리했고, 결국 궁전을 지었다. 그러나, 한영제의 조정에서의 이미지는 실추되었다. 그래서, 다음 해, 한영제는  삼공 가운데 태위, 사도를 연이어 파면시키고, 그의 궁전공사에 반대했던 사도 양사는 태상시로 보내어 황궁의 물자관리를 책임지게 했다.

 

그러나, 한영제가 지나치게 총명한 탓에, 총명하여 오히려 일을 그르치게 된다. 황제가 신하에 대하여 일관되게 권모술수만 쓰고, 국가와 백성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의무도 행하지 않는다면, 그 황제는 점차 천하의 정직한 관리 및 천하백성의 공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영제가 느긋하게 지낼 수있는 기간도 길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군왕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무리 머청하더라도 신하가 있으면 우수한 신하가 있으면 굴러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일부 악인들 예를 들어, 동탁, 조조와 같은 류는 군신간의 한계를 돌파하여 네가 깡패짓을 하면 나도 깡패짓을 하겠다는 식으로 나오게 된다.

 

한영제는 역대왕조의 군주들 중에서 개성이 확실했던 군주중 하나이다. 비록 당시 천하의 사방에서 폭동이  일어났지만, 한영제가 보기에, 조정대신과 십상시를 모두 장악하고 있으면, 변방의 소란은 신경쓸 가치가 없었다. 그래서 한영제는 시간과 정력을 들여서 자신이 좋아하는 생활을 즐긴다.

 

한영제는 당후주처럼 시사를 쓰는 재주는 없었다. 송휘종처럼 회화, 서예에 재주도 없었다. 그러나 한영제는 자신이 독자적으로 추구하는 바가 있었다. 한영제가 추구하는 바는 바로 천하에서 가장 돈이 많은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돈을 긁어모으는 것이 한영제 이십년의 가장 큰 정치적 업적이라 할 수 있다.

 

한영제는 장사하는 느낌을 좋아했다. 그러나 황궁금지에는 여러가지 규칙이 많았다. 그리고 천하의 땅은 모조리 왕의 땅이니, 한영제가 입만 열면 어느 대신, 어느 백성이 자신의 재물을 바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재미가 없다. 군주라도 공평을 추구해야 한다. 그래서 한영제는 자주 황궁에서 장사연습을 한다. 황궁의 모든 궁녀가 점포를 여는데, 모두 각자의 재능을 발휘하여 특색있는 점포를 열어 황제의 눈길을 끌고자 한다. 그래서 아주 보통으로 볼 수 있는 채소, 의복, 악세사리에서 각종 골동, 주보,내지는 특색있는 먹거리, 호화로운 해산물까지 각종 점포가 모두 나타났다. 모두 진지하게 장사를 한다. 장사꾼의 옷을 입고, 말투까지도 장사꾼을 닮으려 했다. 한영제도 보통 상인으로 분장하고, 여러 태감, 궁녀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여기저기서 장사하는 소리가 들리면 한영제가 아주 기뻐했다. 한영제가 점포에 도착하면 친히 가격을 협상하고, 가게주인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매각하면 비로소 만족한 미소를 짓는다.

 

한영제는 비록 천하의 부자이지만, 항상 부족하다고 느낀다. 비록 조정의 창고에 돈과 재물이 있지만, 그것은 국가의 것이고 황제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뭔가를 하고 싶을 때, 즉 황궁을 더 짓고 싶을 때, 조정관리들이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서 저지하곤 했다. 그는 연습을 마친 후, 점차 알아차린다. 자신의 독립적인 비자금이 있어야 비로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때 그가 뭔가를 하고 싶어하면 아무도 말릴 수가 없었다.

 

한영제는 돈을 긁어모으는데 여러가지 수단을 썼다. 첫번째 방식은 달라고 하는 것이다. 한영제는 대신들에게 말한다. 짐이 개를 기르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한영제에게 각양각색의 개를 바쳤다. 한영제는 개에게 대신의 모자를 씌우고, 대신의 허리띠를 채워서, '구관(狗官)'을 끌고 서원에서 위풍당당하게 다니며 만족해 했다. 개를 데리고 노는 것이 싫증나자, 한영제는 다시 대신들에게 말한다. 여러분들이 모두 마차를 타고 다니는데, 너무나 개성이 없다. 짐은 여차(驢車, 나귀가 끄는 차)를 모는게 좋다. 그러자 여러 대신들은 각양각색의 나귀를 바친다. 그래서 한영제는 네 마리의 나귀가 끄는 수레를 타고 서원을 돌아다녔다. 조정의 신하관리들은 황제가 나귀가 끄는 수레를 타는 것을 보고는 유행을 쫓아 속속 말을 타지 않고, 나귀가 끄는 수레를 몬다. 그래서 경성의 나귀가격이 말과 같아진다.

 

두번째 방식은 비용징수이다. 한영제는 여러가지 취미가 있었다. 그러나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돈이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대신들에게 내가 돈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한영제는 두번째 수단을 고안해낸다. 당시, 조정의 군형봉국에서는 매년 조정에 많은 재물을 바쳤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진공된 재물은 대사농이 관리한다. 진헌된 말은 태복이 관리한다. 그러나, 한영제는 백성들이 조정에 바친 재물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골라서 자신의 개인금고에 넣는다. 한영제는 당당한 이유를 댔는데, 바로 "도행비(導行費)"라는 것이다. 통행세라는 말이다.

 

그러나, 한영제는 이렇게 버는 돈은 얼마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한영제와 환관심복은 밤낮으로 고민하여 결국 세번째 수단을 생각해낸다. 파는 것이다. 한영제는 돈버는 방법을 알아냈다. 다른 것을 파는 것보다 관직을 파는 것이 돈을 가장 많이 버는 것이다. 빨리 벌기도 하고 확실히 벌기도 하는 것이다. 한영제는 천하의 관직에 가격을 붙인다. 조정공경의 고위직이지만 생기는 것이 적은 경우는 개당 1천만이고, 큰 주군의 각종 직위는 낮으나 생기는 것은 많은 직위는 개당 2,3천만이며, 일반적으로 현은 5,6백만이었다.

 

당시, 관직을 사려는 사람은 부지기수였다. 그중에 유명한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어, 조조의 아버지인 조숭은 1천만을 들여서 태위를 샀다. 당시의 명사인 최열(崔烈)은 한영제의 유모와 관계가 좋은 바람에 절반으로 깎아서 오백만에 샀다. 그러나 한영제는 조서를 쓰면서도 가슴이 아팠다. 여러번 대신에게 말한다. 너무 싸게 판 것이 아닐까. 너무 싸게 팔았다. 한영제가 보기에, 오백만에 사도 직을 주는 것은 자신의 규칙을 깨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 관리중에 사마직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거록태수를 맡았는데, 관례에 따르면 2천만을 지급해야 했다. 한영제는 사마직이 정직하고 빈한한 관리라는 말을 듣고 특별히 사마직에게 삼백만을 감해준다. 그 결과 사마직은 조서를 받고는 가슴이 아팠다. 돈도 없을 뿐아니라, 지방으로 가서 백성의 돈을 착취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조정의 명령이 있으니 안갈 수도 없었다. 그는 고민하다가 결국은 음독자살하고 만다.

 

한영제가 관직을 팔면서 돈을 많이 벌었다. 당연히 한영제시대에 돈이 있다고 관리가 될 수있는 것은 아니었다. 명청시기에 공개적으로 매관매직한 것과는 달랐다. 한영제가 관직을 파는 것은 조정의 관리가 임명장을 받으면, 등급과 직무의 수입에 따라 돈을 납부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자 전국의 관리는 모두 백성들에게 돈을 착취해서 한영제에게 바치는 일꾼들이 된 것이다. 당연히 이들 탐관오리들은 부임한 후 열배 백배 우려먹는다. 손해보는 장사는 누구도 하려고 하지 않는다.

 

한영제가 이처럼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긁어모으자, 조정대신들의 불만이 쌓이게 된다. 비록 전임 사도 양사가 진언하다가 파면되었지만, 많은 대신들이 뒤를 이었다. 그리고, 환관집단에서도 진흙 속에서 살아가지만 더럽혀지지 않은 대단한 인물인 여강(呂强)이 나타난다. 여강은 한영제와 관계가 좋았다. 예전에 함께 두씨집단이라는 무서운 집단을 상대했었다. 여강은 그러나 장양, 조충등의 행동에 불만을 가졌다. 그는 오히려 국가사직, 백성의 생사존망에 관심을 가졌다.

 

여강은 한영제에게 글을 올린다. 완곡하게 한영제에게 조정의 물건을 자신의 개인금고로 넣지 말 것을 권한다. 한영제가 임의로 조종제도를 고치고, 삼공을 거치지 않고 직접 조정관리를 임명하는 방식에도 불만이 있었다. 여강은 말했다. 한영제의 이런 행위는 "간사한 관리들이 이익을 보고, 백성이 그 폐해를 입는다"고. 관리에게 돈을 달라고 하면, 관리들은 백성을 더욱 괴롭히고, 백성들은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고. 그리고 관리선발제도를 고쳐서 공경을 거치지 않고 직접 임명하고, 또한 모든 관직에 돈을 내도록 요구하는 것은 천하관리들의 강렬한 불만을 가져오고, 일단 천하백성과 전체관리가 군왕을 등지면, 대한강산은 위기의 백척간두에 선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영제는 일찌감치 돈을 긁어모으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여강의 건의가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한영제는 여강의 상소를 한켠에 밀어놓고 거들떠 보지 않았다. 기실 이것만 해도 여강의 체면을 많이 살려준 것이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사도이건 태위이건 분명히 관직을 파직시키고, 가산을 몰수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