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섭지추(葉之秋)
동한말기의 난세를 얘기하자면, 일반 사람들은 항상 동탁(董卓)을 떠올린다. 확실히 동탁이 입경하여 한나라황제를 폐위시키고 새로 세운 것은 동한이 쇠망으로 가는 중요한 사건이다. 천하의 제후들은 동탁을 통하여 한 가지 이치를 확실히 깨달았다. 동탁처럼 아무런 명분이 없고, 출신이 별로라고 하더라도, 심지어 충분히 지혜가 없다고 하더라도, 권력만 있고, 군대만 있으면, 천하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러나, 동한이 이런 지경에 처한 것은 여러가지 원인이 있다. 우리는 한나라의 각종제도를 얘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유수(劉秀)가 건국한 초기에는 각 지역의 호족들을 회유하는 정책을 썼다. 이는 동한말기 제후가 난립하는 화근을 심는다. 그리고 나중의 환관의 전권, 외척의 전권 등등도 모두 중요한 원인이다. 그러나, 동한말기 난국간적은 동탁을 제외하고도 두 사람을 그냥 넘길 수 없다: 원소(袁紹)와 유언이다.
동탁은 왜 정권을 성공적으로 장악할 수 있었을까? 당시의 환관세력이 막 조정의 외척세력과 싸우면서 양패구상하고 있어서, 동탁이 어부지리를 얻은 것이다. 동탁이 어부지리를 얻을 기회를 준 것은 바로 그가 대군을 이끌고 대의명분을 가지고 양주의 주둔지를 떠나 경성으로 올 수 있었던 것이며, 이것은 원소에게 감사해야 한다. 만일 원소가 대장군 하진(何進)에게 게속하여 환관을 없애라고 요구하지 않았더라면 동탁은 아예 입경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언은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는가? 간단히 말자하면, 바로 유언이 진언했기 때문에, 조정에는 군권, 정권이 통합된 주목(州牧)이라는 관직을 만들었고, 각현령, 각군수 심지어 자사의 위에 군림하는 관리가 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각지의 주목은 스스로 한 지역의 재정, 부세 및 병마를 모으는등 각종 업무권한을 독립적으로 행사하게 된다.
당연히 하나의 제도에는 장점과 단점이 있다. 조정에서 마지막으로 주목제도를 시행한 것은 당시의 권력자가 보기에 주목제도가 천하를 안정시키는데 도움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목의 설립은 잘한 것인가 잘못한 것인가? 왜 유언이 이 건의를 한 것이 마음 속으로 속셈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며, 국적(國賊)이라고 할만하다고 말하는가?
우리는 간단히 유언의 신분을 먼저 살펴보자. 그는 나중에 촉한의 소열제가 되는 유비와는 달리 신세내력이 아주 명확하다. 그는 한나라때 노공왕(魯恭王)의 후예이고, 노공왕은 동한 장제(章帝)연간에 경릉에 봉해졌다가 그 곳에 자리를 잡는다. 계보의 전승이 아주 분명하여 모든 사람이 한나라의 황족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유언은 집안도 괜찮았다. 유언시대에도 아직 황족의 신분으로 중랑(中郞)의 직을 맡았다. 이는 체면이 서는 일이다. 그러나, 어쨌든 유언의 집안은 이미 몰락했고, 유비보다는 훨씬 낫다고 할 수 있을지 몰라고, 당시의 귀족황족들과 비교하면, 얼마나 형편없는지 모른다.
<삼국지>에는 유언을 대하여 "한영제때 정치가 쇠약하고 부족해고 황실에 사건이 많이 생기는 것을 목도하고" 조정에 건의했다:"자사, 태수,는 뇌물을 주고 관리가 되어 백성들을 수탈하여, 민심의 이반을 가져왔다. 청렴한 중신을 목백(牧伯)으로 삼아 천하를 안정시켜야 한다" 표면적으로 보면, 유언의 이 건의는 한영제가 즉위한 이후 환관을 많이 기용하고, 청류를 도살하여 정치가 쇠퇴해지고, 국가에 연이어 재난이 발생하였다. 예를 들면 전국을 진동시킨 황건적의 난이 있다. 그러나 진정한 원인은 이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원인은 무엇인가? 우리는 유언이 제시한 주목을 선발하는 몇 가지 기준을 보면, 유언이 도대체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알 수 있다. 유언은 이렇게 말한다: 조정이 왜 암흑이고, 백성들은 왜 고생을 하는가? 그것은 모두 일부 자사, 태수가 재물을 수탈하여 백성들에게 해를 끼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지방의 군사,민정을 책임지는 중요인물을 선발할 때 반드시 "청명중신(淸名重臣)"을 봅아야 한다고 한다. 무엇이 '청명중신'인가? 그것은 여론에서 돈을 좋아하지 않고 품행이 고상한 사람이다. 그리고 덕행이 있을 뿐아니라, 조야에서 인정된 중요인물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민간의 고명한 인물들은 직접 주목을 맡아서는 안된다. 즉 두 가지 기준이다. 하나는 재물을 탐하지 않아야 하며, 하나는 신분지위가 있어야 한다. 유언을 자세히 살펴보면 바로 이 기준에 들어맞는다. 유언은 한황실의 종친이고, 한나라황실의 흥망은 그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하물며 유언은 유씨황족중 덕행이 있는 것으로 공인된 인물이다. 당초 유언이 중랑을 맡았을 때, 스승 축공이 사망한다. 유언은 관직을 버리고 스승의 삼년상을 치른다. 제자로서 원래 스승의 삼년상을 치를 의무는 없다. 그러나, 유언은 그렇게 한 것이다. 이것은 유언이 명리와 지위를 탐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준다. 관직에 이렇게 연연하지 않는 관리라면 백성들을 수탈하고 재물을 긁어모으는 용렬한 관리는 되지 않을 것이다.
즉, 유언은 기실 자신이 가진 두 가지 장점을 기준으로 하여 주목의 선발기준을 제시한 것이다.
이뿐아니라, <삼국지>의 기록에 따르면, 유언은 주목을 설립하자는 건의를 제출한 후,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자신이 교지주(交趾州)의 주목(州牧)이 되기 위하여 뛴 것이다. 교지는 지금의 광서, 월남지구이다. 동한판도에서 최남단이다. 원래 교지는 하나의 주가 아니고, 군이었다. 그러나 교지는 연이어 수수민족의 반란이 일어나서, 조정은 이를 소탕하기 위하여 특별히 교지의 급을 올려 주로 한 것이다. 자사와 여러 명이 태수를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했다. 유언은 안목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교지는 좋은 곳이다. 조정의 풍파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유언의 위명과 수단이라면 교지를 유언의 개인재산으로 만드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중에 교지의 자사인 사섭(士燮)이 몇 대에 걸쳐 교지에 할거하며 삼국후기에 이르러 비로소 동오에 멸망당한다.
그러나, 요언은 교지목이 되지 못했다. 이것은 누군가가 방해했기 때문도 아니고, 유언이 마음을 바꾸어 조정에 남아서 국가를 위하여 일하고자 한 것도 아니다. 당시에 풍수에 아주 능한 대가가 있었는데, 이름이 동부(董扶)이다. 그는 유언에게 말한다: "경사에 앞으로 난이 일어날 것이고, 익주(益州)쪽에 천자의 기운이 있다." 유언은 그래서 교지를 포기하고 자신이 익주목으로 가고자 한다.
마침 당시의 익주자사 극검(郤儉)이 백성을 수탈하는데 골몰하여 원성이 자자했다. 조정상하에서 모두 극검은 정말 더 이상 맡겨서는 안될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병주의 자사가 피살되고, 양주의 자사도 피살되었으며, 전국각지에서 폭란이 일어난다. 유언의 주목을 설치하자는 견해는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게 된다. 익주자사는 명성이 좋지 않으니, 명성이 좋은 한황실의 종친인 유언이 익주목을 맡아서, 천자를 대신하여 한 지방을 다스린다는 것은 명분에도 맞는 일이다.
당시에 누가 권력을 잡고 있었는가? 대장군 하진이다. 하진은 인심을 회유하기 위하여, 유언의 건의를 받아들인다. 유언을 익주목에 임명하고, 동시에 유표(劉表)를 형주목(荊州牧)에 임명하며, 유우(劉虞)를 유주목(幽州牧)에 임명한다. 세 명의 종친이 3개의 큰 주의 주목이 된 것이다. 이 3명중에서 유언과 유표는 모두 자신의 속셈이 있었다. 오로지 유우만이 조정에 충성스러웠고, 할거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할거야심을 지닌 유언과 유표는 20년간 지역을 잘 지켰고, 한황실에 충성하던 유우는 오히려 공손찬에게 금방 피살당한다. 세상의 선악의 결말은 때때로 이렇게 무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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