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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보시라이-왕리쥔사건

다롄스더(大連實德) 쉬밍(徐明) 실종의 배후

by 중은우시 2012. 4. 24.

글: 남방주말

 

냉동창고 직원에서 각종 부호랭킹에 이름을 올린 부호까지, 20년간 쉬밍은 기적같은 성공을 이루고, 다시 기적처럼 사라졌다. 3월중순부터 지금까지, 그의 가족과 동료들은 이 41살된 부호의 소재를 모르고 있다.

 

2012년 4월 4일, 청명절의 아침 일찍, 79여세된 쉬성자(徐盛家)는 큰 며느리를 데리고 다롄 좡허시(莊河市) 우루진(吳爐鎭), 광화딩촌(光華丁邨)의 서씨 조상묘에 성묘를 했다.

 

다롄에서 이곳까지 2,3시간이 걸린다. 오전 10시, 산중턱의 묘지에 몇 줄기 향이 아직 다 타지 않았다. 성묘를 마친 후 쉬성자는 광화딩촌의 한 촌민과 몇 마디 말을 나눈 후, 다롄으로 직접 돌아왔다. 두번이나 고향집을 지났지만, 일행은 잠시도 들르지 않았다.

 

딩촌에 들어가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바로 쉬밍이 기부하여 닦은 것이다. 고향집은 바로 길가에 있고, 반드시 지나야 한다. 한칸자리 쓸쓸한 초가집이다.

 

41년전, 다롄스더집단의 동사장 쉬밍은 이 30여평방미터짜리 초가집에서 태어났다. 7년후, 부친 쉬성자가 향진기업 다롄다허(大連大河)수산물회사를 관장하게 되어, 일가는 이 산촌을 벗어나 좡하현성으로 들어간다.

 

1988년, 쉬밍은 좡허를 떠나 자비로 심양항공공업학원에 입학한다. 딩촌을 떠날 때, 촌에서 가장 대담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아마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말그대로 농민가정출신의 17세소년이 짧은 10년후, 전국에 이름을 날리는 '스더제국'을 건설하고 부호랭킹에 이름을 올리게 될 줄은.

 

그러나 지금, 막 41세 생일을 보낸 부호는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3월 31일, 신화사 <재경국가주간>에서는 3월 15일 쉬밍은 '경제사건의 혐의로 관련부문의 통제를 받고 있다"고 보도한다. 마찬가지로 조사받고 있는 사람에는 다롄스더집단의 총재인 천춘궈(陳春國)이 있다. 두 사람의 핸드폰은 계속 꺼져 있다.

 

3월 중순부터, 여러 은행은 돌연 다롄스더에대한 대출상황을 하나하나 검사한다. 다롄은행감독국의 한 내부인사에 따르면, 현재 은감국은 다롄스더의 은행대출에 대하여 우려하고 있다고 한다. 여러 건의 대출은 담보가 없고, 신용으로 대출이 이루어졌다.

 

한 다롄의 민영사업가는 4월 6일 이렇게 말한다. 스더는 1주일동안 "미친듯이 대외적으로 결제를 했다. 자산이 동결되는 것을 걱정한 것같다." 3월말, 쉬밍의 친형이자 다롄스더의 부동사장인 쉬빈(徐斌)은 동사회영도소조를 건설해서 동사장직권을 대행하고 있다. <신세기주간>에 따르면, 현재 스더는 파산절차에 진입하는 사전준비단계에 들어섰다고 한다.

 

아무도 쉬밍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있다. 쉬빈을 잘 아는 한 민영사업가는 이렇게 말한다. 스더집단은 이미 다롄시위, 다롄시정부에 서면보고서를 제출했다. 쉬밍이 현재 어디에 있는지를 물어보는 내용이다.

 

쉬밍과 잠시 같이 일한 바 있는 전 다롄스더의 경영진인 리원(李文)은 이렇게 말한다. 스더는 권귀자본(權貴資本)을 오간 괴물이고, "문제가 터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장우는 쉬밍의 좡허일중의 동창생이다. 쉬밍이 1990년 심양항공학원을 졸업한 후, 그와 몇몇 친구들은 쉬밍과 함께 2년간 논 적이 있다.

 

장우의 인상 속에 쉬밍은 담이 작다. 당시 학교에서 남학생은 3가지밖에 하지 않았는데, 바로 술마시고, 싸우고, 여자와 노는 것이었다. 술마시고, 싸우는데 있어서 쉬밍은 가장 약했다. 자신이 벌인 일도 친구들이 나서서 해결했다. 여자와 놀아나는데는 힘을 아끼지 않았다.

 

쉬밍의 전처는 좡허1중에서 "피아노도 치고, 문예쪽의 모범생"인 후배여학생이었다. 그녀의 부모는 좡허시의 한 국영도매상점의 직원이다. 쉬밍은 그녀를 5년간이나 쫓아다녔다. 두 사람은 1993년에 결혼했고, 몇년후에 이혼한 후 관계를 끊었다. 그후 쉬밍의 혼인여부는 불명확하다. 외부에는 쉬밍의 처가 큰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있다. 그러나, 그의 친구들은 모두 그런 말을 부인한다.

 

그 당시  자비로 대학을 다니면 국가에서 직장을 분배해주지 않았다. 쉬밍은 할 수 없이 스스로 다롄으로 가서 일자리를 찾는다. 좡허 산허(三禾)냉동창고의 다롄판사처의 직원이 된 것이 쉬밍의 첫번째 일이다. 이곳은 새우를 일본에 수출하는 좡허현의 산하기업이다. 쉬밍의 일은 일본고객을 상대하는 것이다. 총명한 쉬밍은 1년도 되지 않아 5,6만위안의 돈을 모은다.

 

금방, 쉬밍은 이 직장을 사직한다. 그리고 스스로 새우무역회사를 만든다. 다롄보하이호텔에 스위트룸 하나를 빌려서 사무실로 삼는다. 성공한 후 쉬밍은 매체에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자신의 첫번재 자본금은 익힌 새우로 생새우를 대체하여 새우수출하면서 벌었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쉬밍이 새우무역회사는 1년동안 단 1건도 성사시키지 못하고, 상심한 상태에서 포기하고 만다.

 

놀면서 할 일이 없을 때, 장우와 쉬밍등은 자주 다롄시 공안국의 뒤에 있는 다중우팅(大衆舞廳)에서 춤을 췄다. 다중우팅은 오전에는 입장료가 1.5위안, 오후에는 2.5위안이며, 저녁에는 3위안이다. 중간에 사람을 내보내지 않는다. 비용을 아끼기 위하여, 쉬밍등은 왕왕 아침 9시에 문을 열면 들어갔다. 사이다 1잔, 마화 1개, 호박씨 몇 접시를 먹는다. 1.5위안이면 하루종일 놀 수 있었다. 그때는 1991년이다. 쉬밍의 주머니에는 3만여위안을 들인 '다거다(휴대폰)'이 있었다. 어두운 댄스홀에서, '다거다'의 붉은 신호가 반짝이면, 쉬밍은 그 댄스홀 내에서 가장 두드러진 '큰 손'으로 보였다.

 

그 당시 쉬밍은 다롄에서 가장 먼저 핸드폰을 보유한 사람이었다. 그는 숫자 '3"을 좋아했다. 5개의 "3"을 가진 핸드폰번호는 여러해동안 바뀌지 않았다.

 

장우의 회고에 따르면, 그 친구들은 1년동안 할 일없이 놀았다. 하루는 쉬밍이 돌연 좡허로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당시 친구들은 모두 그를 말렸다: "다롄에 오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지 않느냐. 그냥 있다." 그러나, 성공을 갈망했던 쉬밍은 한 마디를 남긴다. "농촌으로 도시를 포위하고, 최종적으로 도시로 돌아온다."

 

좡허로 돌아간 쉬밍은 공장을 하나 만든다. 십여명을 모아서, 한 한국고객에게 무선전자기판을 가공해준다. 겨울동안 그는 10여만위안을 번다. 그리고 2만여위안을 써서 동펑130트럭을 산다. "그는 매번 크게 변화했다. 수산물에서 전자기판으로 그는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장우의 말이다.

 

장우가 다시 쉬밍을 본 것은 이미 1993년이다. 당시 장우와 친구들은 선물투자를 하고 있었다. 정오 휴식시간에, 그들은 다롄 고리키로의 한 차관에서 마작을 했다. 그때 쉬밍이 돌연 나타난다.

 

몇 마디 하지도 않아서, 쉬밍은 돌연 건너편의 고리키아파트(나중의 스더빌딩)을 가리키며 말한다. 저 건물을 내가 며칠 전에 사들였다. 6천만위안에.

 

장우는 말했다. "쉬밍, 네가 어디서 6천만위안을 구했느냐?"

 

다시 3,4개월이 흘렀다. 장우와 친구들이 밖에서 당구를 치고 있는데, 돌연 친구가 쉬밍의 소식을 전한다. 쉬밍이 불야성(不夜城)에서 토목공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불야성은 나중이 다롄시 중심의 승리광장이다.

 

"당시 나는 생각했다. 불야성은 대단한 곳인데, 쉬밍이 그 곳에서 토목공사를 한다고? 뻥이겠지." 그런데 불야성에 도착하자, 이미 밤10시가 되었다. 장우가 보니 23살된 쉬밍이 황색안전모를 쓰고, 부지에서 도면을 놓고 이리저리 지시하고 있었다. 장우는 당시에 쉬밍이 형인 쉬빈이 맡은 공사를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승리광장이 완성되고, 스더집단의 간판이 내걸리자, 장우는 비로소 쉬밍은 이미 옛날의 그 쉬밍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중에 보니, 장우의 이 어릴 때 담이 작고 말이 없던 친구는 실제로 일찌감치 '큰 뜻'을 품고 있었다. 젊은 거는 매일 양복에 구두를 신고, 머리도 가지런히 하고는 집에서 거울을 보며 말솜씨를 익혔다. 이십여세된 그는 좡허사투리가 있는 표준말로 정식 장소에서 거침없이 말을 했다.

 

쉬밍은 돈과 재물에 갈망이 컸다. 성공하기 전에, 그는 포커도박에 빠졌었다. 2002년, 쉬밍은 음주과다로 간경화가 생겨 생명이 위독해진다. 주변 사람들이 웅담을 황급히 구했다. 소문으로 신선한 웅담이 간을 구할 수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홍콩동물원의 곰이 곧 죽을 것이라는 소문을 듣자, 한 스더의 부하는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서 그 곰이 숨을 거두기를 기다려, 뜨거운 김이 나는 웅담을 채취하고는 바로 베이징으로 날아온다.

 

나중에 쉬밍의 병세가 점차 안정되자, 그는 더 많은 돈을 벌겠다고 결심한다. "그는 말했다. 돈이 있으면 직접 곰도 한 마리 죽일 수 있다고" 장우의 말이다. 당시 쉬밍은 24억위안의 자산으로 포브스 대륙부자랭킹 12위에 올랐었다.

 

쉬밍에게 큰 변화가 발생한다. 1992년에서 1993년 사이이다. 이때부터 그는 더 이상 댄스홀에서 노는 한량이나 시골마을의 공장주인이 아니었다.

 

1992년 10월, 22세된 쉬밍은 좡허경제무역위 산하의 좡허시공업품대외무역공사의 경리 겸 법정대표인이 된다. 나중에 다롄스더집단의 부총재가 되는 수이신민(隋信敏)은 당시 좡허시 계획위원회에서 이 회사로 와서 업무과장이라는 제2인자가 된다. 이 회사는 바로 다롄스더집단의 전신이다.

 

즉, 이 정부배경을 지닌 소형 무역회사가 바로 쉬밍의 '상업제국'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1990년대초, 중국정부는 합자기업에 여러가지 혜택을 준다. 그래서 쉬밍은 마카오로 가서 합자구조를 지닌 마카오스더회사를 만든다. 마카오에서, 계약을 체결한 후 그와 다른 3명의 주주가 술을 마시고 잠을 자러 호텔로 돌아가는 중에 차가 전복된다. 3명의 주주는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쉬밍은 살아남는다. 그저 늑골이 몇 개 부러졌을 뿐이다. 가짜합자는 진짜독자로 바뀌게 된다.

 

그후, 쉬밍은 1992년 10월 27일, 중외합자의 다롄스더기계공정유한공사를 등록한다. 좡허시공업품대외무역공사와 홍콩상인 저우이밍(周一鳴)의 홍콩헝허기계공정공사가 공동으로 80만달러를 출자한다. 그중 중국측이 44만달러로 55%의 지분을 가지고, 외국측이 낸 36만달러로 일본, 미국에서 37대의 중고 기계설비를 구매하여 45%지분을 보유한다.

 

다롄스더기계공사에서 당시 좡허대외경제무역위 주임을 맡고 있던 양싱푸(楊興普)가 동사장을 맡고, 쉬밍이 부동사장 겸 총경리를 맡는다. 저우이밍과 수이신민은 부총경리를 맡는다. 공상등기자료를 보면, 이 합자회사의 출자금과 생산개시후의 유동자금은 모조리 중국농업은행 다롄분행 국제업무부의 대출로 해결한다.

 

소식통에 따르면, 그후 쉬밍은 중국농업은행 다롄분행 국제업무부에서 1억이상의 대출을 받아냈다고 한다. 그리하여 승리광장의 토목공사를 따내고, 첫번째 사업자금을 마련한다.

 

이 시기에 쉬밍에게 왜 큰 변화가 발생했는지, 외부에서는 알지 못한다. 장우가 나중에 사람들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쉬밍이 사라진 1992년에 베이징으로 가서, 배경이 있는 '2세'와 친분을 맺었다고 한다. 그를 통하여 은행 행장을 몇 사람 알게 되고, 나중에 상업대출을 받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그후 쉬밍은 PVC사업을 시작한다. 매체의 공개된 보도에 따르면, 당시 다롄시는 알미늄합금과 완전히 다른 PVC에 큰 흥미를 나타냈다고 한다. 쉬밍은 그에 호응하여 PVC를 생산해낸다.

 

1994년 8월, 쉬밍은 다시 좡허대외무역위원회의 정부배경을 빌려, 독일아주수출입회사와 외상합자를 진행하여 다렌스더PVC공업유한공사를 설립한다. 중국측이 675만달러의 현금을 출자하여 75% 지분을 가지고, 자본금과 유동자금은 여전히 농업은행 다롄분행 국제업무부의 대출로 충당한다.

 

당시 쉬밍은 한꺼번에 12개의 PVC생산라인을 도입한다. 연간 계획생산능력은 1.5만톤이다. 다롄시 건설위원회의 한 간부는 다롄스더PVC공업유한공사의 기공식에서 쉬밍에게 말한다: "이렇게 하면 리스크가 너무 크지 않은가? 그러나 사실은 증명한다. 쉬밍이 선택한 이 길은 진정한 실업을 보유하는 것일 뿐아니라, 시장을 신속히 확대하는 일이었고, 전세계 최대의 PVC생산업체의 하나가 되는 길이었다.

 

쉬밍의 스더제국은 점점 여러 업종을 모두 거느리는 신비한 다원체계를 형성한다. 그의 부의 궤적을 보면 다롄, 베이징과 충칭에 연결된다.

 

쉬밍을 전국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것은 스더가 다롄완다(大連萬達)의 축구클럽을 인수한 일이다.

 

중국프로축구 수퍼리그(중초리그) 클럽투자자 연석회의 제3차회의가 2004년 11월 20일(토요일) 베이징에서 거행된다. 회의는 요녕축구클럽의 집행동사인 장슈광(張曙光)이 주재했다. 베이징 궈안, 다롄 스더, 선전 젠리바오, 랴오닝, 상하이 중웬, 칭다오 이중 및 쓰촨 관청의 7개 클럽투자자 및 대표가 회의에 참석한다.

 

1999년 12월 24일, 28살된 쉬밍은 1.2억위안의 댓가를 치르고 완다집단의 동사장 왕젠린(王健林)으로부터 다롄완다축구클럽을 매입한다. 양도계약서에는 다롄스더집단이 5천만의 현금만을 지급하고, 나머지 7천만위안은 '스더집단이 지정한 채무인수업체를 통하여 완다집단의 건설은행 다롄분행의 대출금을 지급한다"

 

여러 인터뷰대상들은 쉬밍이 축구계에 들어간 것은, 다롄시가 축구브랜드를 키우려는 의도에 맞춘 것이라고 한다. "쉬밍은 축구를 모른다. 축구를 보지도 않는다." 장우의 말이다. 쉬밍은 그저 축구를 기업운영의 말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지방정부의 축구에 대한 지원이 약해지자, 쉬밍도 축구에 대한 투입을 대폭 감소시킨다. 그러자 성적은 급격히 떨어진다. "이전에 홈경기에 자주 부서기, 부시장등이 시합전에 축구팀을 보러 오곤 했다. 쉬밍은 죽어라 성적을 올려야 했다. 그러나 나중에 간부들이 축구를 중시하지 않게 된다. 체육국장도 축구를 보러 가지 않게 되었다. 쉬밍의 축구에 대한 열정도 급격히 식어버린다." 다롄스더 축구클럽의 한 중간간부의 말이다.

 

다롄스더클럽의 총경리인 린러펑(林樂豊)도 이렇게 토로한다. 쉬밍은 최근 들어 기본적으로 클럽을 신경쓰지 않았다. "회사에서도 그를 보는 일이 드물었다. 그는 자리에 잘 있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베이징이나 국외에 있었다."

 

만일 축구가 쉬밍의 한 도약판이었다면, 금융업에 진입한 것은 그로 하여금 여러 산업을 움직일 수 있는 레버리지를 갖게 해주었다.

 

2000년, 스더는 처음으로 금융업에 진입한다. 1.8억위안을 들여 생명보험회사의 13.25% 지분을 인수한다. 이어 몇년동안, 스더는 차례로 태평양보험, 경순장성기금, 태평양금융학원 및 대련상업은행등이 지분참여하거나 지배지분을 보유하게 된다.

 

스더가 금융에 투자한 것은 거액의 이윤을 획득하였다. 매체보도에 따르면, 태평양보험의 지분매입으로 스더는 40억위안이 넘는 이익을 남긴다. 그리고 거액의 저금으로 자본운용을 한다. 그는 직접 혹은 간접으로 지분을 보유하고, 자산교환등을 하는 방식으로 여러 개의 상장회사를 지배한다.

 

"쉬밍은 금융을 가지고 놀았다. 자금의 관계가 복잡다단하고, 이족 돈으로 저쪽을 메워서 아주 불투명했다." 한 소식통의 말이다.

 

자본레버리지를 획득한 후, 쉬밍은 다롄스더의 행정총재라는 역할을 천춘궈에게 넘겨준다. 자신은 주로 투자분야에 집중한다. 이렇게 하여 화학건설, 부동산, 보험, 상업은행, 의로체계등 여러 업종에 걸친 다원체계가 형성된다.

 

2002년, 쉬밍은 처음으로 부동산에 진입한다. 그는 고향인 좡허로 돌아가서 토지를 낙찰받는다. 한편으로 철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건설한다.

 

그러나 부동산개발이 한창일때, 쉬밍은 간경화로 위독해진다. 좡허의 정부지도자는 그를 위문하러 간다. 그는 감동하여 두 가지 결정을 한다: 하나는 좡허의 부도산프로젝트를 스더가 무상으로 정부에 넘겨준다. 이것은 고향에 대한 공헌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이후 부동산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쉬밍은 두번째 약속은 어긴다. 2010년, 스더의 부동산부문인 "텐스안더(天實安德)'가 수면위로 드러난다. 다롄, 충칭, 북경에 프로젝트 회사를 설립한다. 텐스안더지산의 동사장은 수이신민이고, 총재는 홍콩텐안중국투자유한공사 화북구총재는 샤젠(夏謙)이 겸임한다.

 

다롄의 개발상은 이렇게 설명한다. '텐스안더'는 홍콩의 역사있는 부동산기업인 텐안과 스더의 합작회사이다. 스더가 주요역할을 하고, 자신의 자원을 이용하여 토지를 획득한다.

 

2011년초, 텐스안더는 창싱다오, 진스탄, 푸완 및 베이징 등지에서 프로젝트개발건설을 한다. 소식통에 따르면, 창싱다오 랑팅산프로젝트를 제외하고, 나머지 프로젝트는 모두 정체 혹은 지연상태이고, 자금조달에 성공하지 못했다.

 

텐스안더는 다롄 동강(東港)에 토지가 있다. 다롄의 한 부동산업게 인사는 이렇게 말한다. 2011년 년말 텐스안더는 헤드헌터를 통하여 그를 찾아왔다. 그에게 동강프로젝트의 부총경리를 맡아달라는 부탁이었다. 동강은 여름 다보스포럼의 개최지이다. "이 토지를 차지할 수 있는 개발상은 배경이 보통이 아니다" 그 인사의 말이다.

 

텐스안더의 베이징프로젝트는 이좡(亦莊)에 있다. 프로젝트회사는 텐스허화치업9북경)유한공사이고 법정대표인은 송쩡빈(宋增彬)이다.

 

송쩡빈은 다롄 사람이고, 일찌기 다롄시 건설위원회 주임, 다롄시 부시장을 지냈다. 54세에 조기퇴직한 그는 텐안중국투자유한공사의 동사회 부주석 및 비집행동사를 맡고, 스더의 부동산합작을 주도한다.

 

스더가 부동산에 진출하는 또 다른 플랫폼은 하르빈기업 런허상업(人和商業)과의 합작이다. 2009년 10월, 쌍방은 성허(盛和)집단지주유한회사룰 설립한다. 각각 50%의 지분을 보유한다. 성허집단은 베이징, 하르빈, 다롄, 선양, 충칭에 각각 투자회사를 두었고, 총재는 스더집단 부총재 출신인 자웨상(賈月湘)이다.

 

공상등기자료를 보면, 충칭성허와 외국인주주인 까오등국제(홍콩)투자유한공사는 투자총액이 8000만달러이고, 그중 외국측이 5000만달러를 출자한다.

 

그러나, 부동산거시조정으로 성허집단은 산하의 토지를 사방에서 매각하고 있다. 충칭 량장신구의 베이베이차이자에서, 성허집단은 2010년 2월 충칭허성위부동산개발유한공사의 명의로, 3필지의 총건축면적 50만평방미터의 토지를 획득했다. 지가총액은 4.5억위안이다. 2011년말, 다롄드서는 3필지부지의 매입자를 찾아다니기 시작한다. 충칭룽신지산의 대변인인 쉬쓰광은 당시 스더가 10억여위안에 3필지의 토지를 롱신에 매각하려고 했다.

 

축구와 부동산을 제외하고, 스더의 상업제국에는 석유화학프로젝트가 있다.

 

2004년, 다롄시는 쐉다오석유화학프로젝트를 계획한다. 쉬밍은 다롄시정부에 쐉자오완에 대형석유화학프로젝트를 제안한다. 예상투자금액은 416억위안이다. 2004년 9월, 중국상무부의 공고에는 다롄스더집단공사가 완제유 국제무역경영라이센스를 취득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2009년 7월, 이 프로젝트는 부결되고, 쉬밍의 화학공장꿈은 물거품이 된다.

 

대외경제무역위의 등록시 출자금을 반환한 후, 스더의 절대다수의 지분은 쉬밍이 보유한다. 비록 이미 완전한 민영기업이 되었지만, 스더는 농후한 정부색채를 띄고 있었다.

 

자신의 상업제국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일찌기 쉬밍은 좡허시공업품대외무역공사 법정대표인의 신분으로 이 회사의 정부신용과 시장자원을 충분히 이용한다. 자신이 다롄스더기계공정공사, 다롄스더PVC공정공사와 다롄스더집단공사의 3대핵심기업을 인큐베이션할 수 있게 했다.

 

1998년 10월, 좡허시공업품대외무역공사는 '연도검사를 진행하지 않았음"을 이유로 영업허가증이 말소된다. 1999년, 양싱푸는 돌연 사망하고, 이 두 가지 사건으로 좡허시공업품대외무역공사는 완전히 쉬밍의 손에 들어온다.

 

"쉬밍은 양싱푸를 밀어내었고, 양싱푸는 오랫동안 마음이 우울해 있었다."

 

공상등기자료를 보면, 양싱푸는 다롄스더PVC공정공사와 다롄스더기계공정공사의 동사장 직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분양도없이, 각각 1999년 8월과 2004년 4월에 쉬밍으로 교체된다. 2005년 11월 이미 영업허가증이 말소된 좡허시공업품대외무역공사는 그의 산하에 있는 다롄스더PVC공정공사 50.3%지분을 무상으로 다롄스더집단공사에 양도한다.

 

1999년, 좡허시대외경제무역위등에 원래 납입한 출자금액을 돌려준 후, 다롄스더의 지분은 모조리 쉬밍, 수이신민, 쉬빈 및 천춘궈의 4 명에게 양도된다. 그중 쉬밍이 절대지분을 보유한다. 그리하여 다롄스더는 완전한 민영기업이 된다.

 

얼마후, 사유화된 후의 스더는 돌연 등록자본금을 대폭 증가시킨다. 2001년초, 당시 등록자본이 1.2억위안에 불과했던 스더집단은 돌연 40억위안의 등록자본을 증자시킨다. 이는 쉬밍의 전설의 최대 전환점이다. 이 자금이 어디서 왔는지는 지금도 수수께끼이다.

 

비록 완전한 민영기업이지만, 다롄드서는 여전히 농후한 정부배경을 보인다. 스더의 고위층에는 69세된 당위서기인 전 요녕성성장조리인 양바오산과 60세된 부동사장 천신광의 두 전직 정부관리가 있다. 82세된 전 다롄시장 웨이푸하이도 스더집단의 고문을 맡은 바 있다.

 

소식통에 따르면, 쉬밍은 신비한 변호사사무소, 양다오(昻道)율사사무소와도 관계가 밀접하다.

 

양다오는 Horas고문투자공사라는 회사와 다롄과 베이징에서 사무실을 같이 쓰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과 인터뷰할 때, Horas회사의 주석인 청이쥔(程怡君)은 이렇게 말한다. 그의 회사의 현재 주요주주는 다롄스더집단이라고.

 

베이징양다오율사사무소가 소재한 후이웬아파트는 오래된 아파트건물이다. 수시로 주민이 애완동물을 데리고 나타난다. 4월 13일, K동 9-318의 문앞에는 여전히 양다오율사사무소의 간판이 걸려 있다. 그러나 대문은 굳게 잠겨 있다.

 

스더의 전 경영진인 리원은 이렇게 말한다. 이 공식웹사이트도 없는 율사사무소는 여러 건의 랴오닝성 국유기업개혁과정에 참여했고, 서비스대상은 동북의 대형국유기업을 포함한다. 여기에는 진베이자동차, 다롄여우이, 다롄이스다, 다롄텐바오주식, 창춘백화빌딩그룹, 동북제약, 다롄공항집단등이 있다.

 

2000년, 인수합병으로 리원은 다롄스더에 들어간다. 어느 날, 리원은 쉬밍의 사무실에서 업무보고를 하는데, 중간에 쉬밍이 전화를 받는다. 리원이 듣기로 전화상대방은 다롄의 어느 부시장이었다. 이 통화는 반시간동안 계속되었다. 리원이 듣기로 그 부시장은 쉬밍을 통하여, 상급지도자들과 연결하여 승진할 기회를 찾는 것이었다. 쉬밍은 모두 응락했다.

 

9개월후, 리원은 사직한다. 그는 쉬밍에게 일이 터질 것을 예감했다고 말한다."그는 모 지도자와 이익이 너무 깊이 묶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