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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보시라이-왕리쥔사건

보시라이 몰락의 내막

by 중은우시 2012. 4. 7.

책임편집: 초생(肖笙)

 

홍콩의 매체는 북경의 소식통들은 왕리쥔사건이래 중국고위층의 후진타오,원자바오집단과 보시라이,저우용캉세력간의 내부투쟁의 내막을 정리했다. 보시라이는 충칭에서 "창홍타흑"을 진행하면서 중국공산당 최고권력핵심을 위협했고, 리좡(李庄)사건은 당내 민주파, 법치파의 분노를 불러왔다. 왕리쥔이 미국영사관으로 도망친 후, 후진타오 원자바오, 시진핑은 함께 손을 잡고 보시라이를 몰아냈다. 보시라이는 면직된다. 보시라이를 어떻게 처리할지, 현재 중국공산당의 고위층에는 여전히 의견불일치가 있다. 여러가지 상황을 보면, 보시라이와 결맹을 맺은 저우용캉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홍콩개방잡지는 2012년 4월호에서 한 북경소식통을 인용하여, 왕리쥔, 보시라이사건은 6.4이래 중국공산당의 가장 격렬한 권력투쟁이라고 했다. 중국공산당의 이번 내부투쟁은 이미 몇년전부터 쌓여온 것이며, 작년부터 점차 급박해졌으며, 금년 봄에 마침내 터진 것이다. 보시라이의 몰락은 표면적으로는 왕리쥔사건이라는 우연적인 요소로 촉발된 것처럼 보이지만, 작년 중국공산당내의 여러가지 이상한 조짐들로 볼 때, 우연적인 것은 아니다. 보시라이의 몰락은 시간문제였고, 어떤 방식으로 몰락할 것인가의 문제였을 뿐이다. 이번 투쟁의 결말은 중공18대에 누가 올라가고 누가 내려올지를 결정할 뿐아니라, 중국의 미래방향도 결정하게 될 것이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보시라이는 2009년부터 '창홍타흑'을 진행하고, 마오쩌둥파분자들은 보시라이를 추켜세워서 개인숭배로까지 승화시킨다. 충칭을 중국의 신연안(新延安)이라고 부르고, 보시라이는 마오쩌둥의 정신을 이어받은 후계자라고 하였다. 이는 후진타오, 원자바오등 중앙지도자들로 하여금 보시라이에 대하여 경계심을 크게 갖도록 만들었다. 후진타오는 일찌기 당중앙판공실을 사람들에게 보시라이가 중경에서 허튼 짓을 하고 잇다고 말한 바 있다.

 

소식통에 다르면, 보시라이는 2007년 충칭으로 쫓겨나 시위서기를 맡으면서, 중국공산등의 고위층간에는 컨센서스를 이루었다. 보시라이는 충칭에서 임기를 다하게 하고 퇴직시킨다. 그러나, 생각지도 않게, 보시라이는 '창홍타흑'으로 도박을 걸었다. '여론을 조성하여 중앙을 핍박'하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최고권력핵심에 위협이 되었다. 비록 후진타오, 원자바오가 약한 중앙정권이긴 하지만 이 사나운 호랑이에 대한 조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년 보시라이의 "창홍타흑"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실제로는 이미 그가 몰락할 화근이 심어진 것이다. 4월 22일, 충칭에서는 북경변호사 리좡을 기소하여 계속 가두어두려는 시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6월 11일, 리좡은 마굴을 벗어나 안전하게 베이징으로 돌아온다. 그날 보시라이는 천인홍가단을 이끌고 베이징으로 가서 홍가를 합창한다. 그러나 중앙지도자는 1명도 참석하지 않는다.

 

북경소식통에 따르면 보시라이가 상승세를 타다가 몰락의 길로 접어든 계기는 "리좡사건"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리좡사건은 중국공산당체제내의 민주파,법치파와 충칭측의 대결로 승화되고, 전국의 16만변호사들은 일치하여 보시라이의 리좡사건에 대한 처리에 반대했다. 최고인민검찰원, 최고인민법원 내부에서도 리좡사건 내지 충칭이 법치를 무시하고 '타흑'을 진행하는데 대하여 아주 불만이 컸다. 중공의 당내인사들도 속속 중앙에 글을 올린다. 당중앙은 이로 인하여 충칭의 타흑진상을 조사하는 팀을 조직한다. 보시라이는 결국 리좡에 대한 기소를 취소하였는데, 이는 북경최고인민검찰원으로부터의 압력때문에 부득이한 조치였다.

 

그리고 '충칭모델'외에 왕양이 추진하는 '광동모델'이 있는데, 둘은 서로 경쟁했다. 왕양은 혼자서 이 모델을 추진한 것이 아니라 당중앙(최소한 총리 원자바오)의 지지를 받았다. 보시라이가 몰락하기 전에 '광동모델'은 우칸촌 민주선거로 약간 앞서가고 있었다.

 

상임위원중 보시라이를 지지하는 주요인물은 자스민혁명을 진압하고, 전국에 걸쳐 6.4이래 최대규모의 체포구금을 단행한 정법위서기 저우용캉이었다. 자스민혁명의 바람이 지나간 후, 비난을 받았다. 과도하게 대응하여 국제적인 이미지가 나빠졌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잘 주의하지 않는 또 다른 한가지 현상이 있다. 금년 1월, 보시라이는 '충칭모델'이라는 말을 돌연 부인한다. 그는 1월 10일 홍콩상보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무슨 모델을 얘기한 바 없다. 만일 충칭의 발전에 무슨 특징이 있다면, 다른게 아니라, 착실하게 중앙의 요구에 따라 민생을 위주로 하여 잘 해냈다는 것이다."

 

왕리쥔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보시라이의 처지는 이미 아주 좋지 않았고, 부득이 중앙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보시라이와 왕리쥔의 결맹은 이익결맹이다. 큰 어려움이 닥치면 각자 따로 움직인다. 위기가 닥치자 이익결맹은 손쉽게 붕괴된다. 중앙권력구조에서 태자당인 보시라이와 비교하면, 왕리쥔은 그저 작은 인물일 뿐이다. 쉽게 버려지고 희쟁양이 될 역할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부득이 자신의 살 길을 따로 찾아야 했다.

 

최신 소식통에 따르면, 왕리쥔은 보시라이의 부인 구카이라이가 관련된 영국상인 헤이우드사망사건에 대하여 사건을 묻어두지 않으려고 해서, 보시라이의 분노를 샀고, 두 사람은 반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왕리쥔은 아마도 보시라이가 정치적으로 세력을 잃는 곤란한 입장에 처해있다는 것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보시라이의 미움을 사더라도, 보시라이를 위하여 이 사건을 그냥 묻어두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보시라이의 '타흑'에 많은 무고한 사람을 해치는 일을 저지른 그가 한 가지 나쁜 일을 더 한다고 해서 대수는 아니었다. 이 각도에서 보자면, 왕리쥔이 미국영사관으로 도망친 사건은 북경중앙으로부터의 압력이 거세지면서 발생한 것이다. 사건의 발생은 의외로 중공고위층에게 보시라이를 제거할 큰 화력무기를 제공해준 셈이다.

 

사건발생후, 인터넷에서는 정치국 9명의 상임위원중 1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8명이 일치하여 보시라이의 서기직을 면직시켰다고 한다. 상임위원 1명이 보시라이에 대한 처분에 반대하자 원자바오가 헤이우드사건이 조사기록을 던져주며, 사건이 이미 외교관계에 미쳐서 국제적인 압력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그제서야 그 상임위원도 보시라이를 면직시키는데 동의했다. 그 상임위원은 바로 저우용캉이다. 그리고 가장 먼저 미국매체가 왕리쥔이 미국영사관에 제공한 정보에 근거하여 보시라이와 저우용캉은 후계자인 시진핑을 최고권력자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려고 밀모했다고 밝힌 바 있다.

 

북경소식통은 이번의 보시라이몰락에 시진핑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후계자의 지위는 이미 확립되었는데, 중국의 미래 최고지도자인 시진핑의 의지표명은 보시라이에게 불만을 계속 가지고 있던 후진타오, 원자바오에게는 유력한 지지였다. 정치국 상임위원회의 의사결정의 저울추는 후진타오 원자바오쪽으로 크게 기울게 된다.

 

북경소식통에 따르면, 저우용캉이 보시라이를 지지한 것은 이념적인 일치때문이라고 한다. 두 사람은 모두 정치적으로 반대하는 인사들에 대하여는 강경수단을 고집해온 철완인물들이다. 다음으로 두 사람에 왕리쥔을 합쳐서 서로간에 복잡한 이익관계가 얽혀 있다. 보시라이는 저우용캉(쓰촨성 서기를 역임함)의 쓰촨 및 충칭의 이익을 보장해주면서 저우용캉의 그에 대한 지지를 얻어냈다. 작년 해외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저우용캉의 아들인 저우빈(周斌)이 부친의 권세를 이용하여 저우용캉이 근부했던 지방이나 부서에서 권전(權錢)거래를 했다고 한다. 쓰촨의 대형공사프로젝트에 끼어든 것도 포함된다. 왕리쥔은 일찌기 랴오닝에서부터 저우용캉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저우용캉은 그를 공안영웅으로 보았다. 보도에 따르면, 왕리쥔과 저우용캉의 아들은 사업상 관계도 있다고 한다.

 

이번 왕리쥔, 보시라이사건은 인터넷에서 소문이 무성하다. 그러나, 사건의 이후 발전과정을 보면 이들 소문이 아주 정확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저우용캉과 보시라이의 결탁이 그러하다.

 

왕리쥔사건후, 보시라이는 북경으로 가서 양회에 참석한다. 저우용캉은 다른 8명의 상임위원들과는 입장을 달리하여 보시라이를 지지한다. 후진타오, 원자바오, 시진핑등 상임위원은 다른 직할시의 대표단을 만났지만, 충칭대표단은 가보지 않았다. 허궈창은 전임 충칭지도자로서 인민대회당 빈관에 격리되어 있던 충칭대표단을 찾아간다. 그러나, 그저 날씨만 얘기했지, 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매체에서의 평론은 허궈창이 간 목적은 충칭시의 다른 관리들을 달래기 위함이라고 한다.

 

저우용캉이 3월 8일 오후 전인대 충칭대표단 심의회의에 특별히 출석하여, 현임 충칭정부의 '5개중경'정치업적을 충분히 긍정적으로 인정하는 말을 한다. 다음 날, 보시라이는 충칭대표단 개발일을 맞아서, 강경한 태도로 자신을 변명한다. 왕리쥔은 그저 '사람을 잘못 썼을 뿐(用人失察)"이라는 것이다. 충칭의 '창홍타흑'은 상부의 동의를 받은 것이며, 실제로 공안뿐아니라, 공안, 검찰, 법원, 사법, 국안에 중앙기율검사위까지 공동으로 노력한 결과라는 것이다. 즉, 정법위가 조정한 것이라는 것이며, 왕리쥔 1명의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책임을 저우용캉에게 떠넘겼다. 이것이 보시라이와 저우용캉이 사전에 얘기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보시라이는 8일오전에 전인대회의에 불참한다. 이 반나절동안 그는 어디에 갔던 것일까? 인터넷에서는 왕리쥔사건전담팀이 그와 얘기를 했다고도 하고, 그가 북경의 원로들을 찾아가서 도와달라고 요청했다고도 한다.

 

3월 14일, 전인대폐막기자회견이 열린다. 원자바오는 기자회견의 마지막 질문에 대하여 왕리쥔사건등을 거론하며 보시라이에 대한 정치생명의 사형을 선고한다. 보시라이는 분명 미리 알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페막색의 모든 카메라는 그의 얼굴표정을 포착하고 있었고. 그의 욕곡무루(欲哭無淚, 울고 싶어도 눈물이 없다), 폐목조천(閉目朝天, 눈을 감고 허공을 바라본다)의 고통에 찬 모습을 찍은 사진에서 그의 내심의 비분을 엿볼 수 있다.

 

보시라이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중앙은 이 역심을 품은 제후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어떤 방식으로 징벌할 것인가? 반당노선? 부정부패? 모살? 혹은 이 모든 것.

 

둘째, 보시라이의 충칭 독립왕국의 흑막은 백일하에 공개할 것인가?

 

셋째, 정치국 상임위원회에서 나타난 보시라이사건에 대한 이견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저우용캉의 현재상황과 이후상황은 어떠할 것인가? 중공권력투쟁은 더욱 격화될 것인가?

 

저우용캉이 관련된 중공상부의 권력투쟁은 지금 대륙의 인터넷에 소문이 많다. 네티즌들은 천선보보(天線寶寶, 원자바오), 윤태(輪胎, 후진타오. 윤태는 타이어라는 뜻인데, 금호타이어의 금,호,가 후진타오의 앞글자 두 개를 뒤집어 놓은 것이어서), 화과(火鍋, 보시라이, 충칭훠궈가 유명해서)와 캉스푸(康師傅, 저우용캉)등 암호를 사용하여 소식을 전파하고 있다. 보시라이부부가 인신자유를 잃은 후, 북경에는 비정상적인 일들이 나타났고, 저우용캉도 아마 이미 밀려난 것같다는 것이다.

 

원자바오의 기자회견후,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선전등 여러 대도시에서는 고도경계상황을 보였다. 분위기가 아주 긴장되어 있었다. 아마도 보시라이를 지지하는 좌파민중들이 시위를 벌일까봐 우려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북경의 경비정도는 지나칠 정도였따. 19일 북경거리에 탱크가 나타나고, 군인들이 대량으로 시내에 들어온다. 북경의 주요장소, CCTV의 경비인력도 군인으로 바뀐다. 인터넷에서는 북경에 사건이 터졌다는 소문이 퍼졌고, 무경을 지휘할 권력을 지닌 저우용캉이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소문으로 번졌다.

 

소식통에 따르면, 고위층은 현재 보시라이의 최종처리에 대하여 이견이 심각하다고 한다. 특히 원자바오와 저우용캉이 심각하게 맞서고 있으면서 서로 양보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고위층의 거의 모든 사람이 이 사건에 말려들었다. 투쟁이 치열하고, 범위가 넓은데서는 사상유례가 없을 정도이다.

 

3월 19일, 베이징의 양회는 폐막한다. 저우용캉 혼자서 중앙정법위회의를 주재한다. 후진타오, 원자바오, 시진핑과 리커창의 4거두는 전국민정회의 전체대표를 만났다. 분석가들은 이것이 통상적이지 않다고 본다. 왜냐하면 정법위회의가 민정회의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22일, 전국정법선전회의가 상해에서 거행된다. 그러나 저우용캉은 서신을 보내었을 뿐, 참석하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저우용캉이 이미 구금되었다는 추측이 돌았다. 그러나 23일 저우용캉이 인도네시아 외무장관을 접견하면서 외부의 의혹은 불식된다. 네티즌들은 웃으며 말한다. 현재 9명의 상임위원은 매일 TV에 얼굴을 비추는데, 자신에게 아직은 문제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9명 상임위원이 'TV에 출근카드를 긁는 것"이다.

 

26일, 전국정법위 교육훈련반이 북경에서 열린다. 전국의 삼천삼백명의 정법위원이 기를 나누어 북경으로 와서 교육훈련을 받는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저우용캉에 대한 권력박탈로 이해한다. 왜냐하면 정법위는 이미 저우용캉의 독립왕국이 되었으므로, 중앙에서 정리정돈할 필요가 있으며, 전국정법위원들이 당중앙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저우용캉은 정치국 상임위원이다. 그에 대한 처리는 보시라이와는 다르다. 전제는 저우용캉 자신이 진퇴를 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내부투쟁이 더욱 격화될 것인지는 더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