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정치/보시라이-왕리쥔사건

충칭사변으로 본 중국공산당

중은우시 2012. 4. 3. 12:09

글: 진적(陳跡)

 

보시라이의 면직은 사변(事變)이지 정변(政變)이 아니다.

 

왕리쥔이 미국영사관으로 간 후, 보시라이, 왕리쥔이 모두 면직되기까지 충칭사변은 요란스럽게 진행되었다. 중국공산당이 막 90주년을 경축하면서 스스로 얼마나 선진적인지를 자랑할 때, 돌연, 현대정당발전에서 아주 낙후된 원형을 드러내게 되었다.

 

보시라이는 중공중앙에 의하여 면직되었는데, 이건 뭐 비정상적인 일이 전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중공중앙에 의하여 충칭의 서기로 보내어졌고, 그의 권력은 임명에서 나온 것이지 선거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은 각지에 군경을 배치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 이를 보면 이번 사변은 정변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시에, 국내에는 콩칭둥(孔慶東)과 같은 인물이 보시라이면직은 "반혁명정변을 일으킨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국외의 왕시저(王希哲)은 대거 욕설을 하면서, '후진타오 원자바오의 과두우파 당중앙이 백색공포를 실시한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후 베이징에서 정변이 일어났다는 소문까지 나왔다. 충칭사변은 베이징사변으로까지 확대된 느낌이다.

 

기실, 중국공산당이 정변의 수단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한 것은 역사적인 전통이 있다. 중국공산당은 '총부리에서 정권이 나온다'고 인정한 바 있다. 그것은 자체적으로 칼을 든 정치군사집단이다. AB단(반볼세비키단)을 친 것이 초기의 두드러진 표현이고, 연안정풍때는 많이 성숙해졌다. 사상이론노선의 투쟁을 위주로 하고, 창구운동(搶救運動)으로 발전했으며 또한 원형을 드러냈다. 정권을 장악한 이후, 마오쩌둥이 류샤오치와 린뱌오를 타도하고, 화궈펑 및 예젠잉이 '사인방'을 타도하고, 덩샤오핑이 화궈펑을 물러나게 하고, 후야오방 및 자오쯔양을 내쫓은 것, 장쩌민과 쩡칭홍이 양씨형제를 타도한 것은 모두 정도가 다르지만 정변의 수단을 운용한 것이다. 이와 비교하자면, 천시통, 천량위의 하야는 정변이라고 할만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보시라이가 파면된 것자체는 정변이라 할 것도 없으나, 이번 사변은 머리카락 하나를 건드려서 온 몸에 영향이 미치므로 정변을 촉발시킬 것인지는 좀더 관찰해봐야 겠다.

 

중국의 한 대사는 얼굴두껍게도 중국이 '공산당국가'가 아니라고 말했다. 영국이 '보수당국가'가 아닌 것처럼. 영국은 당연히 보수당국가가 아니다. 보수당은 노동당 및 다른 정당과 경쟁하여 집권당의 지위를 얻었다. 중국은 다르다. 중국공산당은 영원히 집권한다. 공산당영도가 국가의 기본원칙이다. 다른 정당이 집권을 위하여 경쟁하는 것을 금지할 뿐아니라, 심지어 새로운 정당을 조직하는 것도 금지한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국가는 당연히 공산당국가이다. 이런 국가는 기본적인 권력균형도 이룰 수 없다. 국가화된 중국공산당 자체는 민주를 실행하기 어렵다.

 

이렇게 하여 중국공산당이 집권하고 있지만, 여전히 스스로 정치군사집단의 본색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정변수단으로 자체적인 정치모순을 해결하는데 익숙하다. 중국공산당은 이를 악물고 '군대국가화'에 반대했다. '인민군대'를 당의 사유재산화라혀 하고, '당군'이 공산당의 영구적인 집권당지위를 유지하도록 보호하려 했다. 그러나, 비록 '총이 당을 지휘하지 않는다'고 맹세하고 있지만, 사물의 변증법은 증명한다. '국군'이 아닌 '당군'은 비록 당파의 군대이지만, 당파의 싸움에 이용되기 마련이다. 정변의 도구가 될 수밖에 없다. 마오쩌둥은 린뱌오로 펑더화이를 대체했고, 군대를 '모가군'으로 만들었다. 군인은 '모가군의 좋은 전사'가 되어야 했다. 이 군대의 지지를 등에 업고 류샤오치,덩샤오핑 관료집단을 타도한다. 그러나, 린뱌오가 군대를 장악한 후, 여전히 마오쩌둥의 심복의 근심거리가 된다. 그는 머리를 써서 논쟁을 일으키고, 운동을 발동한다. 그리고 그 바람은 전국을 휩쓸어, 린뱌오에 불리한 국면을 형성하고, 린뱌오는 실패할 수밖에 없게 된다.

 

덩샤오핑은 후야오방, 자오쯔양등 개명한 정치가들을 내몰아 버림으로써, 당내모순을 크게 감소시킨다. 그리하여 지속적인 노력으로 중공권력의 '일대양임십년(一代兩任十年)'의 국면이 기본적으로 형성된다. 방대한 당정관료기구는 완비되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이 당시에 '자산계급이 공산당내에 있다' 고 갈파했다. 트로츠키는 더 일찌기 비슷한 말을 했다. 모두 공산당국가의 현실이다. 공산당독재하에, 정치변화와 정치모순은 모두 현재의 공산당내부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중국은 일당독재의 신질서를 만들엇지만 정치모순이 이 새로운 질서하에서도 여전히 존재하고 발전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보시라이는 중공중앙 정치국 위원으로 새로운 일들을 벌였다. 그것은 그가 최고위층의 정치결정을 그대로 따르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자신이 최고위층으로 들어가는 길을 하나 새로 마련하려 한 것이다. 그의 충칭모델은 독창적인 것이고 혁신적인 것이다. 민생에 중점을 두었으니 실로 시대흐름에 맞는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실용성과 투기성이 분명한 정객에서 독특한 정치강령과 집권풍격을 지닌 정치가로 성장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중요한 순간에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여 무정하게 자신을 위하여 공로를 세운 부하를 버렸다. 그 결과 반격을 받고 궁지에 몰린 것이다.

 

이렇게 되자 중국공산당 권력의 국면이 변화한다.

 

문혁이 실패한 후, 마오쩌둥식의 정치가는 이미 작일황화(昨日黃花)가 된다. 중공은 당정관료가 주도한다. 6.4사태이후 후야오방, 자오쯔양을 대표로 하는 개명한 정치가들이 세력을 잃고, 중국공산다으이 관료분위기는 더욱 짙어진다. 덩샤오핑은 원래 실용주의를 중시하는 관료였다. 이때 그는 곤란을 돌파하기 위하여 정치가의 면모를 보여 시장경제를 받아들인다. 그후 중국공산당의 파벌은 더욱 분명해지고, 이전과는 크게 달라진다.

 

대체적으로 말하자면, 중국공산당에는 3대파벌이 있다. 단파관료, 비단파관료, 그리고 태자당이다. 장쩌민은 비교적 특수하다. 그 본인은 덩샤오핑, 후야오방, 자오쯔양등과 같이 중공제2대에 속한다. 지방관료로서 약간의 태자당혈맥도 지니고 있다. 일단 최고위층이 되려면 태자당의 지지를 받아야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는 덩샤오핑의 핍박하에 시장경제를 실시한다. 그러나 점차 스스로 적극적이 된다. 개혁개방의 추세를 유지할 뿐아니라, 권력귀족집단에 상당히 넓은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평민출신의 단파관료인 후진타오는 당권을 장악했다. 원자바오는 당기구관료출신이고, 단파의 굴기와 더불어 득세했다. 그들은 원래 민중의 지지를 얻기 쉬웠다. 그러나 그들은 습관적으로 수성에 골몰한다. 그들은 장쩌민의 세대보다 권력승계질서가 비교적 규범적으로 진행되기를 원했다. 동시에 그들은 당과 국가의 대국을 보는데 정치가의 시야가 부족했다. 중국이 개혁개방에 처해있고, 전환이 필요한 시기인데, 단파관료는 점차 평용(平庸)해졌다.

 

신질서가 형성될 때, 장쩌민의 도전을 받는다. 이어서, 보시라이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서남에서 활동을 크게 벌인다. 동시에 개혁이 정체되고, 사회각계각층에서 후진타오 원자바오 집정에 관한 불만이 날로 증가한다. 관민갈등도 점차 첨예화된다. 단파는 습관적으로 안정유지를 중시하고, 태자당은 위기의식이 비교적 강하다. 많은 사람들은 변혁을 통하여 당을 구하려는 웅심을 품게 된다.

 

바로 이때, 보시라이 및 그의 충칭모델이 마오쩌둥의 개조 및 혁명을 본뜬 듯한 모습을 보인다. 보시라이가 면직된 것은 그 자신의 잘못도 있지만, 후진타오와 원자바오가 충칭사변을 처리하는 것은 다른 양파를 건드렸다. 권력균형을 회복하려면, 반드시 복잡한 힘겨루기를 거쳐야 한다. 특히 정변이 일단 나타나면, 거기서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다.

 

안개로 가려진 국면이 어떻게 발전할 것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현재 확실한 것은 중공당내의 민주를 실시함으로서 중국민주를 실시하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국제대순환은 국제시장에 도움을 구한 것이고, WTO에 가입한 것은 국제규범에 도움을 구한 것이다.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민주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다. 중국공산당이 민주를 거절한다면 정변이 계속 일어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