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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보시라이-왕리쥔사건

보시라이의 세 가신(家臣)

by 중은우시 2012. 4. 26.

글: 방효(方曉)

 

보시라이의 사당(死黨) 혹은 가신(家臣)이라 칭하는 인물중에서 3명의 중요한 인물은 각각 쉬밍(徐明), 위쥔스(于俊世) 및 마뱌오(馬彪)이다. 쉬밍은 다롄스더(大連實德)집단의 동사장이고, 위쥔스는 군정(軍情)계통이며, 마뱌오는 화후이(華匯)생명보험 동사국 주석이다. 보시라이집안의 이 세 가신은 일찌기 왕리쥔이 미국영사관으로 도망가기 전에 충칭으로 가서 보시라이에게 왕리쥔과 화해할 것을 권했다. 세 사람은 화해권유가 실패로 끝나자, 황급히 쉬밍의 자가용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나갔었다. 2월말 중국공산당의 양회 전에야 귀국한다. 그리고, 3월 14일 원자바오의 기자회견후 동시에 체포된다.

 

보시라이의 가신 위쥔스는 보시라이사건의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위쥔스는 중국공산당 총참정보부 출신이고, 보시라이부부의 가까운 친구이며, 왕리쥔과 보시라이를 연결시켜준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다롄에서 사업을 하고 있고, 어떤 사건으로 감옥에 들어갔는데, 구카이라이가 그를 감옥에서 빼내주었다. 그래서 보시라이의 가신 겸 일당이 된다. 왕리쥔은 이전에 테링시 공안국장을 맡았는데, 보시라이가 당시 랴오닝성 성장이었다. 두 사람을 소개시켜준 사람이 바로 위쥔스이다.

 

위쥔스는 보시라이가 충칭으로 전근되고 아직 부임하기도 전에 집을 충칭으로 이사간다. 충칭 위베이구 올림픽화원의 한 고급빌라에 산다. 그는 충칭에서 아주 조용하게 지냈고, 유일하게 기자들의 인터뷰에 응한 것은 바로 빌라의 사냥개가 마을 주민을 물어서 발생한 분쟁때문이었다.

 

4월 25일 타이완의 <연합보>는 "대륙과 타이완의 내부사정을 잘 아는 인사"가 썼다는 글에서, 구카이라이의 살인과 왕리쥔의 도망사건의 발생과정, 도망내막을 상세히 묘사했다.

 

글에 따르면, 2월 5일, 충칭의 한 유명한 작가의 집안에 오랜 친구가 찾아온다. 그 친구는 사전에 연락이 없이 찾아온 것이다.  그 친구는 다롄시절부터, 보시라이와 왕리쥔의 '한 패거리'였다. 작가는 알았다. 이 옛 친구와 다롄스더집단 총재 쉬밍등 세 사람이 2월 2일경 다롄에서 충칭으로 왔고, 보시라이에게 부탁을 한다. 왕리쥔을 봐주고, 왕리쥔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지 말라고.

 

세 사람은 보시라이의 성격이 냉혹하고 무정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보시라이의 옛 친구들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가 보복행동에 나서고, 킬러를 보내어 그들을 죽여 입을 막을까봐 겁먹고 있었다. 세 사람은 충칭에 있는 기간동안 계속 핸드폰을 바꾸었고, 활동장소를 계속 옮겼으며, 차량도 계속 바꾸어, 행방을 감추려고 극력 노력했다. 작가는 어느 정도 예감이 들었다. 이들의 말이 마치 유언같았던 것이다. 죽임을 당할까봐 겁을 먹은 것같았다.

 

2월 2일, 충칭시정부 신문판공실은 공식웨이보를 통해서, "최근 들어 충칭시위는 결정했다. 왕리쥔 동지는 더 이상 충칭시공안국 국장, 당위서기을 겸임하지 아니하고, 충칭시 부시장의 신분으로 경제분야업무를 연락하는 것을 관리한다."

 

자유아주방송국의 보도에 따르면, 충칭 현지의 소식통은 "2월 3일 저녁, 위쥔스는 차를 몰아 충칭의 마뱌오와 쉬밍을 맞이한다. 세 사람은 직접 충칭 우두호텔로 가서 보시라이를 만나 1시간여를 얘기한다. 나중에 충칭 공안국 왕리쥔판공실(당시 왕리쥔은 이미 공안국장의 직무를 면직당했고, 부시장만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공안국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로 가서 밤새도록 얘기했고, 날이 밝아서야 나왔다.

 

위쥔스, 쉬밍, 마뱌오의 세 사람은 보시라이와 왕리쥔을 화해하도록 권했으나, 세 사람의 노력은 실패로 끝난다.

 

2월 5일, 세 사람은 황급히 쉬밍의 자가용비행기를 타고 국외로 나간다. 2월 220일, 세 사람은 귀국한다. 이 자가용비행기는 원래 보시라이의 부인 구카이라이와 아들 보과과를 위해서 준비한 것이다.

 

2월 6일 정오, 충칭시 부시장 왕리쥔은 돌연 청두의 미국영사관으로 들어가서 정치망명을 신청한다.

 

왕리쥔의 진술에 따르면, 그를 박해한 것이 바로 보시라이이다. 보시라이에게 암살될 것을 우려하여, 미국을 제외하고는 중국정부의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아무도 보시라이의 오른팔이었던 사람을 위하여, 보시라이와 원수지간이 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대륙에서 그는 도망갈 곳이 없었다. 살고 싶으면, 유일한 길은 미국에 정치적 망명을 하는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왕리쥔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일찌기 보시라이의 활동장면, 섹스장면과 대량의 영상을 찍어서 가지고 있었다. 왕리쥔은 증거를 가지고 도망쳤다. 그는 관련증거를 복제하여 미국에 준다. 중국공산당이 사실을 숨기고 살인멸구하는 것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3월 14일, 전인대 폐막기자회견에서 총리 원자바오는 기자의 마지막 질문에 대답하면서 엄중한 말투로 충칭의 현임 시위, 시정부는 반드시 '반성'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자유아주방송의 소식통에 따르면, 3월 14일 저녁 위쥔스, 쉬밍, 마뱌오의 세 사람이 동시에 체포된다.

 

충칭현지의 정보원에 따르면, 원자바오 기자회견후 1시간도 되지 않아, 충칭시위 판공청은 충칭에서 양회에 참가하기 위하여 북경으로 가지 않은 청장급이상의 간부 합계 78명에게 전용기를 타고 북경으로 가도록 통지한다.

 

저녁에 전용기가 북경에 도착한다. 국무원의 한 부비서장과 중앙조직부의 한 간부는 정치국의 보시라이의 충칭시위서기를 직위해제한다는 결정을 전달하고, 상술한 고위관료들에게 태도를 명확히 하도록 요구한다. 절대다수의 충칭관리는 모두 '중앙의 의사결정을 지지'한다고 말한다. 보시라이의 정치비서, 충칭시 부비서장 우원캉(吳文康)등 몇명의 관리들은 의견을 보류하고, 이들 관리들은 조사협조를 받기 위하여 데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