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공방(孔方)
"황금가족"은 순수한 몽골인을 가리킨다. 라시드 앗 딘의 <집사>에 따르면, 몽골인의 시조는 알랑-고아이고, 그녀는 남편이 죽은 후 신인의 감응을 받아 회임하여 낳은 세 아들을 낳는다. 이런 전설이 있으므로 세 명의 신인이 낳은 아들의 후손은 가장 순수한 몽골인 즉 '황금가족'으로 보았던 것이다.
<몽골비사>의 기록에 따르면,징기스칸은 바로 알랑-고아의 세 신이 내린 아들의 후예이다. 그러므로 <몽골비사>, <집사>는 모두 징기스칸의 가계에 대하여 대량의 찬송을 보낸다. 그러나 징기스칸이후, 그가 전무후무한 위대한 정복을 이루었으므로, "황금가족"이라는 명칭은 실제로 그의 후손에게만 붙여졌다. 특히, 그와 정실부인 보르테 사이에서 낳은 4명의 아들(주치, 차카타이, 오코타이, 톨루이)의 후손을 말한다. 그후 역사에 언급되는 "황금가족"은 모두 징기스칸의 후예들이다.
징기스칸은 "황금가족"의 영예를 구축한다. 그러나, "황금가족"은 처음부터 깊은 틈을 남기고 결국은 전체 "황금가족"이 분열되고, 결국은 몽골제국이 분열되게 된다.
"황금가족"의 분열은 반드시 주치의 출생부터 얘기해야 한다. <몽골비사>, <집사>에 따르면, 주치의 모친인 보르테는 징기스칸과 결혼한 후 얼마되지 않아, 집안의 원수인 메르키트인에게 붙잡혀 간다. 징기스칸은 부친의 결의형제인 왕한(王罕) 및 자신의 결의형제인 자무카와 연합하여 메르키트인으로부터 보르테를 다시 빼앗아 온다. 회군도중에 보르테는 주치를 낳는다. 그러므로 주치가 징기스칸의 혈육인지에 대하여는 의문이 있다. 다만, 두 사서에서는 모두 보르테가 약탈당했다가 구해진 시간을 명확히 기록하지 않고 있다. 사람들은 문헌의 해석에서 보르테가 9개월 혹은 12개월이상이라는 두 가지 가설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주치가 징기스칸의 친아들이건 아니건 간에 확실한 것은 그의 출신에 대한 의문은 그와 차카타이의 대립을 가져왔다는 점이다.
<몽골비사>의 기록에 따르면, 징기스칸이 1219년 호라즘으로 출정하기 전에, 그의 비인 예수가 징기스칸에게 진언한다. 원정을 떠나기 전에 자신의 후계자를 확정하라고. 징기스칸은 그 건의를 받아들여, 여러 아들과 장수들을 불러서 후계자문제를 논의한다. 이번 회의에서 징기스칸은 먼저 주치의 의견을 물어본다. 그러나 주치가 대답하기도 전에 차카타이가 즉시 그의 신분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한다. 이것은 주치와 차카타이간의 갈등이 처음으로 폭발한 것이다. 그후 두 사람의 불화는 점차 표면화된다. 특히 징기스칸이 두 사람에게 공동으로 출병하여 호라즘제국의 수도인 우르겐치(玉龍杰赤)를 공격하게 했을 때, 두 사람의 불화로 전투가 지연되게 되고,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다. 결국 징기스칸이 오코타이를 파견하여 총사령관을 맡게 하여 두 사람과 협조하게 한 후에야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주치와 차카타이의 갈등은 "황금가족" 분열의 도화선이었다. <몽골비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의 분쟁과정에 징기스칸은 말한마디 하지 않는다. 앞에 나서서 화해를 권하는 코코쇼스도 주치의 신분에 대하여는 따로 말을 하지 않는다. 그저 차카타이가 주치를 비난하면서 모친인 보르테의 가슴아픈 일을 들추었다고 질책한다. 즉, 당시 징기스칸의 친족이건 심복이건 모두 주치는 징기스칸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말이다. 징기스칸 본인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주치는 '황금가족' 내부에서 고립된 위치에 놓인다. 이와 비교하면, 후계자를 선정하는 문제에서 차카타이는 오고타이를 지지한다. 양자의 관계는 아주 밀접했다. <집사>의 기록에 따르면, 오코타이는 즉위한 후 모든 큰 일에 차카타이의 의견을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 구육을 차카타이에게 파견하여 케이테이(怯薛, 숙위병)를 맡게 했다. 오코타이가 죽은 후, 차카타이는 여러 왕을 이끌고 토레거나황후(乃馬眞后)에게 충성을 표시하고, 토레거나황후가 칭제감국하여, 구육이 귀국하여 황위를 계승하도록 하였다. 이를 보면 양자간의 관계는 아주 친밀했다.
이와 비교하면, 징기스칸의 넷째아들 톨루이는 오코타이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몽골인들은 막내아들이 집을 지키는 습속이 있다. 톨루이는 징기스칸의 오난하원의 주요 영지를 모두 상속받는다. <집사>에서는 징기스칸이 한때 톨루이에게 칸의 자리를 승계시키려는 생각을 했었다고 한다. 비록 끝에는 포기했지만. 그러나 십만천명의 몽골대군은 톨루이에게 넘겨준다. <집사>의 고증에 따르면, 당시 몽골대군의 총병력은 십이만구천명이었다. 이는 결국 톨루이가 오고타이칸의 강력한 경쟁자이자 잠재적 위협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사>의 기록에 따르면, 오고타이가 즉위하기 전에, 톨루이가 망설였다고 한다. 나중에 야율초재가 적극 설득하여 톨루이가 쿠릴타이를 개최하고 정식으로 오코타이의 칸의 지위를 확립한다. 이를 보면 톨루이와 오고타이간에는 껄끄러운 점이 있었다.
<원사> <집사> <몽골비사>에는 모두 톨루이가 오고타이의 병이 위중할 때, 병의 고통을 나누기 위하여 부적을 쓴 물을 마시고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식의 죽음은 의문이 든다. 이로 인하여 오고타이가 톨루이를 모살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집사>에는 두 가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오고타이계가 톨루이계를 꺼리고 시기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톨루이의 미망인인 소르칵타니-베키의 정절을 논하면서, 작자는 오코타이가 소르칵타니-베키를 자신의 아들 구육에게 재가시키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소르칵타니가 완곡하게 거절했다. 만일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오고타이가 병권을 톨루이계의 손에서 회수하려는 첫번째 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같은 페이지에, 작자는 또 다른 사건을 기록하는데, 오고타이는 톨루이의 유산에 속하는 2천의 부대를 자신의 아들인 코단(闊端)의 휘하로 넣어버렸다. 만일 전자가 온화한 수단으로 병권을 회수한 것이라면 이번에는 전혀 거리낌없이 빼앗은 것이다.
오고타이의 핍박은 톨루이계와 주치계를 계속 접근하도록 만든다. 두 가족은 이익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
주치는 징기스칸이 죽기 전에 먼저 죽었다. 그의 둘째아들인 바투가 그의 영지를 승계한다. 1235년, 오고타이는 저명한 '장자서정(長子西征)"을 시작한다. 바투가 사령관이 된다. 그의 곁에는 징기스칸의 각 갈래의 대표들이 모여 있었다. "바투의 형제인 오르타, 베르커, 푸반; 오고타이의 아들인 구육과 허단; 오고타이의 손자인 하이두; 톨루이의 아들인 몽케; 차카타이의 아들인 바이다르와 손자인 부리" 이것은 거대한 규모의 정벌이었다. 몽골철기는 동유럽을 휩쓴다. 그러나 원정도중, 바투와 구육의 다툼이 벌어진다. <몽골비사>에는 연회에서, 바투가 여러 아들의 장자 신분으로 자처하자, 부리와 구육이 불만을 표시한다. 두사람은 바투를 욕한 후에 연회석을 떠나버린다. 바투는 오코타이에 호소한다. 이번 사건에서 몽케는 바투를 위하여 진언해서 그를 돕는다.
징기스칸이 죽은 후, "황금가족"은 점점 주치-톨루이계와 오고타이-차카타이계의 대립이 형성된다.
진정으로 "황금가족"을 분열시킨 것은 구육이 즉위한 후이다. 1241년 오고타이가 사망하고, '장자서정'은 급히 종결된다. 구육이 몽골본토로 돌아와서 칸에 즉위한다. 그러나, 바투는 킵차크 초원에 머물고 더 이상 동쪽으로 오지 않는다. 즉위후 구육은 바투가 몽골본토로 돌아와서 쿠릴타이에 참석하지 않은 것을 이유로 들어 출병하여 토벌하고자 한다. 톨루이의 미망인인 소르칵타니-베키는 구육이 출병한다는 소식을 즉시 바투에게 전달한다. 주치-톨루이계의 동맹은 갈수록 단단해진다. 그러나, "황금가족"의 내전은 이미 일촉즉발이 된다.
구육의 서정은 그의 사망으로 중단된다. 그러나 그가 갈라놓은 "황금가족"은 이미 다시 합쳐질 수 업게 되었다. 오고타이계는 비록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있지만, 몽골국가는 생간지 겨우 반세기밖에 안되었다. 국가권력이 영향력이나 칸의 통제력이 칸 자체의 능력으로 유지될 수밖에 없었다. 톨루이게는 톨루이가 남긴 군대를 지니고 있었다. 이들 군대는 당연히 몽골군대의 중견역량이다. 바투는 서정에서 자신의 역량을 확장하였다. 서정의 성과는 주로 남러시아초원지구인데, 이 바투의 영지 서쪽으로는 오고타이,차카타이게가 바투의 영지를 넘여 새로운 정복지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바투는 실제로 최대의 수혜자가 된다. 그의 역량이 커졌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것은 모두 군룡무수의 오고타이계가 신경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투가 종실의 장자의 신분으로 킵차크초원에서 쿠릴타이를 개최하고 몽골초원에서 개최하지 않았는데도, 오고타이-차카타이계의 왕들만 견제했을 뿐, 다른 왕들9톨루이계와 징기스칸의 형제계 및 귀족들은 속속 참가한다. 오고타이-차카타이의 스레먼(코단의 아들. 오고타이는 코단의 사후에 그를 승게자로 삼는다. 그러나 내마진후가 자신의 아들인 구육의 승계를 원하여 등극하지는 못한다 이 점은 측면에서 몽골제국에서 존재하는 군사민주제가 비교적 큰 역량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칸인 오고타이의 뜻이라 하더라도 대항할 수 있는 것이다)가 정변을 일으켜, 쿠릴타이의 개최를 저지하려 하나 실패로 끝나고 포로로 잡힌다. 칸은 이때부터 톨루이계로 넘어간다.
이번의 칸의 지위이전은 성공적인 쿠데타였다고 할 수 있다. 오고타이-차카타이계는 거의 반격할 여지가 없었다. 1219년부터 양계의 대립은 마침내 몽케의 승리로 끝이 난다.
이 기간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차카타이와 주치의 대립은 황금가족 대립의 도화선이다. 그러나, 주치-톨루이계와 오고타이-차카타이계의 대립의 근본원이는 칸의 승계권이다. 쌍방의 갈등은 징기스칸이 후계자를 세울 때부터 시작되었다.
주치가 죽은 후, 주치에 대한 미안함에서, 징기스칸은 주치일계를 완전히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주치계와 '황금가족'간의 갈등은 점차 약화된다. 다만, 오고타이-차카타이연맹은 후계자가 선정된 후에 이미 확립되었다. 그리고 양자의 연합은 지속되고 붕괴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바투는 시종 몽골제국의 권력핵심에서 벗어나 있게 된다. 톨루이는 징기스칸이 생전에 총애했고 수중에 강대한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고타이-차카타이연맹에서 배척당한다. 그리하여, "황금가족" 내부의 혈통다툼은 징기스칸과 주치의 사후에 오고타이-차카타이계와 주치-톨루이계의 권력투쟁으로 바뀐다.
자세히 이 맥락을 관찰하면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황금가족"의 틈은 생기자마자 이미 메우기 힘든 상태였다. 이것은 징기스칸의 책임이 가장 크다.
먼저, 주치에 대한 불신이 '황금가족'의 틈이 생기도록 만든 최초의 원인이었다. 그러나, 징기스칸은 주치계를 철저히 없애지 않았다. 또한 주치계와 차카타이계의 갈등을 해소해주지도 않았다. 바투와 구육, 부리가 결렬한 주요원인은 주치계혈통에 대한 의심때문이었다.
다음으로, 톨루이에 대한 과도한 총애가 '황금가족' 분열의 근본원인이 되었다. 징기스칸은 톨루이를 아주총애한다. 그에게 오난하원의 목장과 오르도스를 넘겨준다. 그리고 몽골군의 주력을 톨루이가 계승하도록 한다. 비록 이 승계는 몽골인의 전통습속에 따라 정해진 것이지만, 실제로 오고타이와 톨루이간의 최고권력갈등을 불러오고 국가분열의 단초가 되었다.
"황금가족"의 내부갈등은 결국 칸의 자리를 다투는 것으로 전이된다. 그러나, 칸이 톨루이계로 넘어간 것은 몽케와 바투가 공동으로 노력한 결과이다. 동시에 군사민주제의 배경하에서 실력정치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몽케시대의 제국은 반드시 몽케와 바투가 나란히 존중되는 국면을 낳았다. 이런 국면을 타파하기 위하여 홀레구의 서정이 나타난다. 이것은 몽케칸의 톨루이계의 역량이 서쪽으로 확장하려는 노력이다. 이를 통하여 주치계-톨루이계가 나란히 하는 국면을 타파하고 톨루이계가 독존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몽케가 칸에 오른 후, 톨루이계와주치게간의 갈등이 점점 더 드러난다. 다만, 오고타이-차카타이계의 세력이 톨루이게와 주치계의 세력 사이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쌍방의 완충지역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주치계와 톨루이계는 직접 충돌하지는 않았다. 몽케-바투연맹은 공동의 적을 앞에 두고 있어서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몽케, 바투가 차례로 사망하면서, 쿠빌라이는 쿠릴타이를 거치지 않고 스스로 칸에 올라서 '황금가족'의 유대를 철저히 무너뜨린다. 톨루이계의 일한국과 주치계의 킵차크한국은 서아시아에서 대거 출병하고, 오고타이-차카타이계의 하이두는 공공연히 반발한다. "황금가족"의 내부모순은 마침내 국가와 국가간의 충돌로 번졌다. 억지로 유지되든 몽골제국은 이로서 끝이 난다.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 > 역사인물 (징기스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징기스칸의 후계자문제 (0) | 2012.08.15 |
---|---|
몽골대군은 왜 천하무적이었는가? (1) | 2012.07.15 |
레닌은 징기스칸의 후손인가? (0) | 2009.12.09 |
징기스칸이 남긴 세 가지 유언 (0) | 2009.09.02 |
징기스칸의 후계자 선정과정 (0) | 2008.05.27 |